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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Nov 01. 2020

두려움과 몸

몸은 나의 마음보다 더 멀리까지도 괜찮다

두려움은 생활 속에서 자주 나타난다. 큰 두려움을 느낄 일은 자주 없지만(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자주 없기를 바라지만) 작은 두려움은 어디에나 있다. 샤워하고 나서 문고리를 돌리기 직전에 생각한다. 거실의 바람이 춥지 않을까? 문고리를 잡기 전에 생각한다. 더럽지 않을까? 옆집 사람과 집에 들어가는 길이 비슷하면 생각한다. 나쁜 사람이 아닐까? 글을 쓸 때는 생각한다. 이 글이 끝까지 제대로 써 질까?


두려움은 나에게 있다. 자연처럼 주어져 있다. 지리산을 옳다 그르다 따지지 않듯이 나의 느낌도 나를 구성하는 환경일 뿐이다. 심리학에서 환경이란 나 빼고 전부를 의미한다. 내가 아닌 모든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타자라고도 부른다. 타자. 나의 의지와 힘이 곧바로 미치지 않는 다른 자인 것이다. "내가 아님." 이 핵심 표현을 생각해보면, 나 역시 내가 다 알 수 없는 여러 마음들이 솟아올라 내 정신의 식탁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나도 나의 환경이기도 하다. 내 성격을 포함한 여러 특질을 구성하는 것은 유전자라는 의학적 설명은 거기에 확인 서명을 넣어 주는 셈이다. 인간은 마치 내 소유의 거대한 소 떼 사이에서 최대한 소를 쳐보려는 소치기와 같다. 이 소는 모두 내 것인데, 분명히 내 것인데, 아무 소에게 걷어차이기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찻잔 속의 폭풍처럼, 마음 속의 목장에 웅성거리는 소 떼에 불과하다. 우리는 마음 속에 들어가 소를 친다. 하지만 참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는 언제든지 이 거대하고 완고한 소의 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 한 가운데서 소들이 속삭이는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 소치기로서의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 몸으로 갈 수 있다. 몸은 다행히 하나로 통합되어 있으며, 하나로 통합된 약간 독자적인 판단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히 나의 것이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내가 선택한 나는 아닌데다가, 소 울음으로 부산스러운 소 목장에 갈 수 있다. 다른 곳으로도 갈 수 있는데, 그곳은 나와 같이 이곳에 고요히 살아있지만 나와는 언제나 약간 다른, 가끔은 한발 앞서나가고 가끔은 한발 물러서는 이 몸과의 식탁이다. 나는 몸을 걱정한다. 하지만 몸은 말하지 않는다. 단지 천천히 느끼고, 내가 호들갑을 끝낸 이후에야 천천히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다. 트랙을 달릴 때 내가 힘들어 죽겠어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난 다음에도, 몸은 천천히 달리기에 적응한다. 몸은 샤워하고 나온 후의 찬 공기도, 나의 두려움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의견으로 느끼고 적응한다. 계곡의 물이 차서 보송보송한 몸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다음에도, 어찌되었든 물에 들어가면 몸은 환경을 받아들이고 내 생각의 불만도 물의 차가움도 수십 킬로그램의 무겁고 단단한 생체 조직 속으로 흡수한다.


몸은 흡수한다. 그래서 몸은 대부분 '괜찮고', 그 괜찮음은 자신이 그어 놓은 한계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괜찮다. 몸은 자신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은 느리고, 매우 위험하거나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결정하고 표현한다. 친구가 손 안 씻고 만진 더러운 문고리를 막상 만졌을 때, 몸은 그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아주 느린 침묵의 방식으로, 병균은 존재하지만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추워도 괜찮다고 말한다.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고 조용히 열을 내며 주변의 공기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성난 황소들과 노는 것은 여전히 괜찮고, 지루하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몸은 언제나 고요하게 당신의 것으로 당신과 정렬되어 있다. 몸은 내구성이 좋고 안전하며 언제나 당신의 편이고 당신보다 훨씬 더 많이 괜찮기 때문에, 몸을 지켜보고 그것과 대단히 느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몸은 행복의 길로 자신을 안내하는 안내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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