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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Nov 21. 2020

근거중심 자신감

연애는 자신감이다.

모든 연애하고 싶은 선생님들께 이 글을 바칩니다.


개인적인 문제가 왜 골치아픈지 아는가? 그것은 교훈이 전승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시적 문제 또는 집단적인 문제들은 지난 5만 년에 달하는 인류의 역사동안 신화, 서사시, 기록, 에세이, 법률, 서적, 논문, 속담을 통하여 그 모델과 솔루션이 어느 정도 전승되고 재생산되었다. '호랑이보다 나쁜 정치가가 무섭다', '물을 막으려 하지 말고 물길을 내어 다스려야 한다',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그것을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물과 같다', '나중에 온 이 자에게도 1데나리온을 주라'…. 많은 거시적인 일들에 이러한 고문헌의 충고들을 적용시켜보면 잘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개인적인 문제는, 듣자마자 숨이 턱 막힌다. 누군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외로워." 이제 아인슈타인도 아이작 뉴튼도 거인의 어깨도 못 도와주는 문제적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외롭다'는 호소에 적용할 수 있는 경전이나 고전은 아무것도 없다. 외로움이라는 폭탄을 해체하는 열쇠는 오직 다른 인간뿐이다.


나도 그런 질문을 많이 했고, 이제는 많이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럴 때는 잘 대답해야 한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인데 차가운 대답을 듣는 고통까지 얹어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에 관하여 오랫동안 고민했었는데, 남자가 외롭다고 하든 여자가 외롭다고 하든(이러한 두 성별과 성적 지향에 포함되지 않는 분들의 외로움은, 아직 나에게는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 말할 수 없다) 공통되고 또한 대단히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를 추려내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감이다. 그것도 자기 자신이 객관적으로 사회 평균에 비추어 보아 충분히 자신할 수 있는 객관적 자신감, 즉 '근거 중심 자신감'이다.


외로운가? 연애를 하고 싶은가? 정서적 애착을 형성하고 싶은가? 육체적 애착을 형성 하고 싶은가? 둘 다 바라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연애 대기열에 스스로를 올린 것이다. 연애 대기열에 올라간 사람은 연애 대기상태를 적절히 유지하면 원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 연애 대기상태의 기본은, 나랑 안사귀면 니가 손해라는 확신이다. 또는, 나랑 섹스 안하면 니가 손해라는 확신이다. 자기 확신.


그러나 보통 한국의 찌질한 남자는 정반대로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나랑 사귀어 달라' 라거나, 나랑 섹스를 해달라고 하지. 그건 인간의 지난 5만 년 역사동안 전승되어온 대단히 중요한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바로 '무임승차'에 대한 분노이다.


인간은 협력한다. 인간은 정당하게 교환한다. 우리 중 누구도 소시오패스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더욱 그렇다. 그들의 공통점은 이기적이고 적대적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반사회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 반대는 '친사회성'이다. 함께 공동의 이익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자신의 몫을 부담하는 것. 누구도 폭리를 취하지 않고 관계자 모두가 공동의 평준화된 이익을 취하는 것. 그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남과 친구들에게 바라는 중요한 미덕인 것이다.


한국사회가 일종의 병영사회가 되고, 대부분 남성이 자신이 당하는 병역 의무를 개탄하면서도 강제징용/강제징병 그자체를 증오하기보다는 강제징용/강제징병에서 면제받은 여성을 증오하는 것 역시, 물론 윗동네 '조센징 파시스트'와의 대치관계에 얼마나 많은 공짜 청년 노동을 갈아넣어도 반란이 안 일어날지에 관한 방정식의 숫자들이 안타깝게도 국방부가 제 이익대로 값부르고 있기에 접근성이 떨어지기 때문도 있겠으나, 심리적으로는, '무임승차에 대한 증오' 때문이다. 그저 이것에 대한 분노를 상기시키면 어떤 논쟁이든 끝난다. '나는 이렇게 고생했는데 너는 왜 꿀빨아?' 실제로 여성이 꿀빠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전혀 아닐 것이겠으나, 다소간 이견의 여지가 있다. 모두가 고용시장 퇴화로 망하는 나라에서 만 2년을 위험천만한 강제개병제에 빼앗기지 않아서 좀 덜 망하는것도 이익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그러한 전인격적 파국의 면제를 여성이라 당하는 사회적 위험과 거시적으로 스왑할 수 있을지, 생수통이라는 남성성 십자가의 반대급부로 그렇게 많은 (Ulrich Beck 관점에서) '사회적으로 창조된 젠더적 위험'을 정당화해도 괜찮은지에 관하여서도 약간의 이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견을 가질 수 없는 사실이 있는데, 그토록 여성이 사회에 무임승차한다고 믿는 많은 남성이 이상하게도 연애와 섹스에 있어서는 마치 무임승차를 하려는 듯한 태도를 가진다는 것이다. (사실 가부장제 자체가 초대형 무임승차 사기극이지만 이는 따로 다루겠다) 남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나와 사귀어 '주겠'어요? 나를 만나 '주겠'어요? 나와 결혼해 '주겠'어요, 라고? 이 말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두 존재의 교환이라는 마인드가 박혀 있지 않은 것이다.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구차해 보이는데, 그것이야말로 절대 감지되어서는 안 되는 신호이다. 연애라든지 아니면 여러 애착형성 활동 어떤 것도 봉사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이익 추구이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현장에서 어느 한 쪽이 부탁을 하는 입장이 되는 것은 그 제안 받는 쪽을 굉장히 심란하게 한다.


내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친한 친구와 섹스 타임이 있었는데, 평소에 늘상 하던 공손한 태도가 무의식적으로 침대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상대방이 해 주는 어떤 성적 행동에 '고맙다' 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다소 정색을 하면서, "섹스는 고마움의 대상의 아니고 내가 뭔가를 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마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꼭 그렇게까지 개념적으로 철저해야 하나?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지…. 정이 없구만 정이….' 하며 당황했었는데, 많은 시간이 지난 이제는 그 말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섹스는 '완전한 이익 균등에의 믿음'에 의하여 완벽해지는 것이다.


다행인 점은 이러한 '완전한 이익 균등에의 믿음'이, 표현 그대로, 믿음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스스로 평가한 개인적 만족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말이다. 칼라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본인 만족감을 누가 평가해주겠는가? 동네 맛집처럼 블로그 후기랑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즉, 실제로 누가 이익이고 손해인지는 굉장히 제한적인 비교군 속에서 최종적으로 당사자 각자가 사정(assessment)하는 것이며, 그 고려목록에는 라포 형성된 상대방이 말하는 인간적 퀄리티에 대한 자기보증의 선언이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다. "나 놓치면 너 땅 치고 후회한다니깐?" 물론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 놓쳐도 돼… 나랑 한 번 자 줘…" 라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믿음직하다. 후자는… 타이핑하는 것조차 불결하게 느껴질 정도로 역겨운 태도이다. 그런데 더욱 어이없게도, 많은 남성들이 저런 태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베데스다의 샘물이 아니다. 목마르다고 하여서 결코 타인에게 값 없이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기 바란다. 인간관계는 필히 서로에게 행복을 주어야 한다.


물론 그 행복이라는 것이, 돈으로 유혹하는 인간관계가 아니라면, 아니 심지어 돈으로 유혹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마음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의 평가도 나 혼자만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최종적으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성적인 유혹과 그 평가에 대하여 우리는 훨씬 더 '통 속의 뇌'가 된다. 누구도, 종국에 이르러 양자가 침대에 뻗기 전까지는, 실제로 자신과 섹스하는 것이 구체적이고 또한 실증적으로 상대방에게 이익일지는 알 수 없다. 섹스를 권한다는 것은 표준화 마약(그러니까 담배)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귤을 권하는 것이다. 그건 반드시 귤이겠으나 대단히 맛있는 뀰일지 후숙이 덜 돼서 새콤해죽겠는 귤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자신의 전인격을 걸고 그 귤의 달콤함을 스스로 믿고 또한 스스로 믿기에 자신있게 권하는 진솔함이다. 이것은 마치 교회 다니는 애들이 정말 진실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전도와 플러팅은 그 근본에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원리'가 동일하다. 아, 결과는 전혀 다르겠지. 후자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으나, 전자의 양반들은 혼전순결이라서 일관된 결과가 나올 것 아닌가? 통계학에서는 이것을 '바닥 효과'라고 한다. 기대를 걸어봤자 바닥을 칠 것이야.


그런데 이 자기확신이라는 것이, 단지 상대방의 믿음을 일으켜세우기 위해서라고 해서 아예 완전히 나태하게 살아서는 곤란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하여서도 그렇지만, 단기적인 관점에서 자기 자신이 그 주장을 '믿기' 위하여서도, 아니, 그 주장이 그냥 사실이라는 것을 '알기'위해서라도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정말로 자기중심적이거나 환상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을 하고 할 수 없는지, 나의 성취 수준은 어떠한지 잘 알고 있다.


결국 상대방에 대한 최종 판단이라고 해봐야 작은 두뇌 안에서 제한적인 근거 안에서 일어나고, 현재의 개인적 만족감과 그보다 더 큰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서 갱신 가능성을 늘 품은 채 존립하는 영원한 '중간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평가하는 자가 언어라는 모호한 매질과 신체접촉이라는 순간적 매질로 접속할 수 밖에 없는 '타자라는 암막'과 그보다 더 압도적인 '미래라는 암막' 앞에 홀로서서 일종의 영구적 정보불균형의 핸디캡을 지닌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수준에 대하여서는 결코 암막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뼛속 깊은 부족함과 열등감에 있기 때문에, 타인을 설득하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설득하고 스스로 깊은 자부심과 통계적 근거들로 일어서기 위하여서는, 본인이 탁월하여야 한다.


이처럼, 연애를 하기 위해서든 애착 행동을 하기 위해서든 타인을 유혹하기 위하여서는, 결국 자신의 탁월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물을 수도 있다. "나는 딱히 잘난 것이 없는데 어떡해?" 특별히 내세울 만한 탁월성이 아직 갖추어지기 전이라면, 언제든 그 자리에서 마치 눈알을 한 번 굴리듯 즉시 얻을 수 있는 탁월성도 있음을 기억하라. 성실성, 마음의 고요, 경청, 내려놓음, 겸손함, 열심히 배움, 절식, 운동, 정돈은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탁월함이고 또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없는 유니크한 탁월함이다. 자비, 현존하기, 균형있게 생각하기, 이해심, 헌신, 안정된 마음, 예쁜 말, 선호되는 몸매, 깊은 학식, 좋은 섹스 스킬과 스태미너는 비교적 장기적인 정진이 필요하지만 더욱 귀한 탁월함이다.


탁월함을 얻게 된다면 스스로를 자신있게 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태도 덕분에 더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귀게 되거나 섹스를 승낙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축하받을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스스로 확신하는 그러한 탁월함을 얻게 되면, 자신의 부족한 탁월함을 타인에게서 찾고, 타인을 함부로 찬양하고, 타인을 쓸데없이 동경하고 우러러보고 앉아있는 시간낭비를 그만두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명백한 탁월함으로 우뚝서면, 타인의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정말로 얻기 어려운 미덕에 대하여 정밀하게 인정하고 존경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탁월한 사람이 되어갈수록, 스스로 만들어낸 타인에 대한 환상들은 시시해지고, 진정으로 탁월한 인간 자체를 원하게 된다. 탁월함 그 자체를 모르면, 자신이 타인에게 매력 느끼는 이유의 진위를 잘 파악할 수 없다. 내가 그를 진짜 존경하는지, 섹스하고 싶어서 존경한다고 생각하는지는 나 스스로 존경받을 만한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모른다. 내가 스스로 탁월성의 첨단으로 접근해본다면, 타인에게 느끼는 장점이 나의 급한 애착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스스로 얼버무린 모호한 장점들인지 아니면 정말로 존경할 만한 강점이 존재하는지 체감하게 된다. 타인이 가진 전인격의 한 변두리를 얻기 위하여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별볼일없는 약한 탁월함을 과대평가하거나 과대칭찬하지 않게 된다. 내가 타인에게서 감탄하는 것이 무엇인지, 타인이 나에게서 감탄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로 진실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가진 서로 다른 탁월함의 정확하고 효과적인 공동-향유가 이루어질 수가 있다.


십 년 뒤에도 한결같을 사람이 아니면 섹스하지 말고, 백 년 뒤에도 탁월할 사람이 아니면 사귀지 말고, 천 년 뒤에도 모범이 될 사람이 아니면 애착을 형성하지를 말아야 한다. 스스로 십 년 뒤에도 한결같을 자신이 없으면 먼저 자신을 안정시키고, 백 년 뒤에도 탁월할 자신이 없으면 자신의 일에 묵묵하고, 천 년 뒤에도 모범이 될 자신이 없으면 마음을 닦아야 한다. 고전적이지만 결국 '좋은 인간 만들기' 문제가 몇 천 년째 지속된 이유가 있다. 좋은 인간 됨이 거의 모든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단, 개인의 수양도 사회적인 문제 해결과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마음수련 어프로치랄지 '불교적' 어프로치는 주의해야 한다. 다만 개인적 문제를 다시 보건대, 명백히, 연애는 자신감에 달려 있다. 자신이 좋은 인간성과 탁월한 역량이 있으며, 더 이상은 최소한 자기만한 사람이 아니면 괜한 인연 만들지 않는다는 자신감이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자신감이다. 헌데 그쯤 되면 이제 더 이상 연애가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삶의 충족이란 무엇인가?





Photo by Jason Leung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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