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루 Oct 25. 2020

돕는 삶에서의 원칙

사랑을 회수하기 위해 비굴하지 말라.

기대를 걸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때 깨끗이 물러서고 기대를 걸 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비굴하지 말라. 나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도왔고 아예 직업까지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정했으나 도움을 받고 나서도 도울 가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많이 만나지 못했다. 은혜를 알고 보답하기는커녕, 예의가 사라지는 걸로 모자라 나중에 등돌리지나 않으면 감지덕지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는 언제나 돕는 사람이었으나 도리어 내가 돕는 사람들을 가장 두려워했다. 단지 내가 잘 해 주고 열과 성을 다한 사람들이 등돌리지 않기만을 바라였기 때문에, 그들이 도리어 나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도 참아 주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에게 해로웠고, 타인이 자신의 행동을 개선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타인에게도 해로웠다. 심지어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인 '나의 친구들을 수단으로 대하지 마라'는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준 사람이 나쁜 인격으로 밝혀졌을 때, 내가 그냥 나쁜 친구를 사귀었음을 받아들이고 절교하는 대신 명백히 상처받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비위를 맞춰 주고 곁을 맴도는 까닭은, 사실 내가 그에게 투자한 마음과 자원들이 아까워서 미래에라도 내가 준 덕들을 돌려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타인을 손실 회복의 수단으로 보는 것은 인간을 비굴하게 만든다. 이것은 세 가지 지점에서 그렇다. 첫째로 호의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데 뒤늦게 대가를 찾는 것이고, 둘째로 손실이 날 만한 인간에게 투자한 것은 자기 오판이고 자기 책임인데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셋째로 그런 인간들이 비굴하게 군다고 해서 더 잘해줄 것도 아닌데 구차하게 예의를 구하려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좋은 인격이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것만큼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애초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고마움 말고는 받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한 가지 실수를 하였는데, 내가 도와준 사람의 인격이 나쁘다고 밝혀졌는데도 지금까지 잘 해 준 것이 아까워서라도 계속 잘 해 주며 그의 부적절한 언행마저 참아주는 아이러니를 저지른 것이다.


이익관심과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구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선행 그 자체가 옳고 좋기 때문에 베푼 호의라면, 그 호의가 자격있는 사람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그에게 뭔가 더 건져내리라는 기대를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굴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다 퍼주고, 내가 먼저 잘해 놓고, 무릎꿇고 이해를 구하고 사과를 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잘못된 기대를 걸었음이 밝혀졌음에도, 그 사실을 부정하고 사실은 기대를 걸 만한 사람이니까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 같이 못 갈 사람임이 밝혀졌으면 미련없이 접어야 한다. 사실 이 사람이 어떤어떤 부분이 치명적인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내가 잘 고쳐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은 못 고쳐 쓴다. 건강한 사람조차 사랑을 다 돌려주기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데 내가 주었던 사랑을 돌려받고 싶어도 돌려받을 것이 없다. 


그러니 더 많은 탐색을 하고 더 자주 사람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버리기로 선택한 사람에 너무 많이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기대를 걸 만한 사람은 당신에게 잘 해 준다. 문제가 있어도 자기개방과 대화로 해결하지, 공격성을 보이고 갑질을 하여서 비굴하게 굴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기대를 걸 만한 사람은 상처주거나 감정적이지 않고 당신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아니면 미련없이 털고 떠나야 한다. 그것은 손해가 맞다. 그러나 손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탐색임을 수용해야 한다. 탐색했다면 소득도 있겠지만 손해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손해를 메꾸기 위해서는 다른 소득을 찾아야 한다. 손해를 손해 속에서 회복하려고 하는 순간 과몰입의 덫에 빠지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번역한 법구경의 <코끼리의 장>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328.

생각이 깊고 총명하고 성실한

지혜로운 도반이 될 친구를 만났거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마음을 놓고 기꺼이 함께 가라


329.

그러나 생각이 깊고 총명하고 성실한

지혜로운 도반이 될 친구를 못 만났거든

정복한 나라를 버린 왕처럼

숲 속을 다니는 코끼리처럼 홀로 가라


인간사회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어느 땅에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주워먹는 것이다. 흙을 주워먹고 배탈이 났다고 우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건 자기 행동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는, 행위가 브라만을 만든다고 했다. 부처의 시대에, 가장 선천적이고 가장 견고한 장벽으로 인식된 인도 계급 제도조차 단지 행위의 결과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자기 행동에 책임지는 것을 강조했다. 노동착취나 치안 위험은 사회의 책임이지만, 사람을 충분히 알지도 않은 상태에서 간과 쓸개를 내어 주고 결과적으로 배신당하는 것에 책임 있는 존재는 전 세계에 나 한 사람밖에 없다.


내 일에 대한 내 책임을 받아들일 때, 상황을 바꿀 단단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은 내가 선택한 것이며, 배신도 분노도 기쁨도 희망도 나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고, 그 중에 나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아서 내 호혜적 마음의 달콤한 냄새를 귀신같이 알고 달려들어 착취하려 하겠는가? 그러니 단 몇 번의 배신, 단 몇 번의 실망에 무너지는 것도 책임있는 태도가 아니다. 인간의 배신이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의 좋은 삶과 훌륭한 친구를 위한 여행이 그 마지막 배신을 마지막으로 영구히 주저앉을 수는 없다. 자신이 하나의 비극에 너무 많은 피해를 입게 방치하는 것도 책임있는 태도가 아니다. 다시 일어나서 다시 돕고 호의를 건네고 일으켜세우고 함께 더 높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여러모로 좋아지는 것만이 책임있는 삶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이 좋아지기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대부분 인간은 원래 되먹지 못한 존재이므로 개의치 않고, 계속 앞으로 가는 것이다.


끝.



작가의 이전글 알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