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적 진리도 미시적 사례에는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심리학자 Alfred Adler는 인간은 '사회적 관심'을 가진 존재라고 말했다. 사회적 관심이라는 것은 별 것 없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도움이 되려고 하는 우리 내면의 선한 날개인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문제까지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때로는 남성들이나 기업들이 일으키는 대량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가부장제'나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처럼 개별 사례들을 모아서 경향성을 파악하고 언어화시킨 '이론'을 만들어 그에 맞서기도 하였다. 이론은 세상 대부분의 실제 사례들의 경향성을 반영하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세상의 어떤 구체적인 사례와도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덜하고 때로는 심하며 때로는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거시적인 이론일지라도 개인의 상황은 단지 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으며, 그 전체를 개인의 전체 삶에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타인의 삶을 조력하거나 조언할 때에도, 거시적일 때 거시적인 말을 하고 미시적일 때 미시적인 말을 해야 한다. 미시적인 문제를 대할 때는, 그 개인의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 그 둘은 물론 상충할 수 있다. 정치적 역동이 개인의 삶에 대단히 깊게 스며든 분야들 - 그 중에서도 페미니즘의 활약이 필요한 장면에서 유독 그런 불일치가 자주 나타난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젊은층에게 특히 재조명받은 임신-출산 문제가 대표 사례이다. 예를 들어서 10대 후반이나 20대 초의 어린 미혼모가 존재할 때, 그 미혼모 당사자가 지금 거기서 그러고 있는 까닭은, 거시적으로 설명하자면 여성의 출산을 부추기는 동시에 무책임한 가부장적 남성 중심 문화와, '한남충'들의 개념없는 헛짓거리 때문이다. 거시적으로야 그렇다. 그런데 당신이 미시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 어떻게 될까? 어느날 살아있는 하나의 미시 세계가 당신에게 말을 건다면, 그 이론이 가리키는 실제 사람을 만난다면, 실제 10대 여성 청소년이 남자 만나서는 임신 해놓고 낳겠다고 하면, 그렇게 당신에게 올바른 의견을 말할 책임이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걔한테 가서 '자 너의 임신과 출산 문제는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것으로서 남성이 책임지지 않은 탓이야.' 라고 하나?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할까? '하지만 너는 여성으로서 오롯한 주체이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 지금 그 남자를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한다면 출산해서 엄마가 되렴' 이라고 할까? 둘 모두 거시 수준의 말이지만, 그 둘은 충돌하고, 그것을 미시적인 개별 사례에 적용시키면 모순이 발생한다. 우리는 마땅히 논리적인 일관성을 가져야 하지만, 거시적인 논리를 미시적인 수준에 무조건적으로 적용시킨다면 오히려 일관성이 훼손되고 실제로도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다. 애초에 사회 이론이라든가 거시적 설명틀 자체가 낱낱의 개별 사례들을 반영할 수 없고, 그 설명틀을 만든 사람들도 물론 여러 자료를 폭넓게 검토하긴 했겠으나 결국 지구의 한 지역에서 한 언어로 특정한 사례만을 주되게 다루면서 자기 이론을 개발했을 것이기 때문에 많은 것들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놓친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이라면? 모든 거시적 이론에는 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게 바로 거시 이론의 딜레마이다. 페미니즘이 설명하는 거시적인 설명틀은 물론 진실이다. 모든 진실을 윤리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인간 개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매우 중대한 불가피함이 없다면 결코 침해하지 않는 것. 그 관점은 보편적이며 윤리적이고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페미니즘' 혹은 '성 인지적 사고'라고 부른다. 거의 2천만 명의 한남과 그 가운데서 눈치조차 없는 500만 명의 한남충이 개처럼 짖어도 공공성과 민주주의의 열차는 어김없이 전진한다. 누가 현전하는 여성에 대한 젠더적 공격과 위협을 부정할 것인가? 누가 지엄한 통계적 증거를 개무시하는가? 여성을 집에서 밥이나 하고 경력단절되고 사회에서 바비인형 취급이나 당하게 살라고 할 것인가? 가부장제는 당연히 악이고, 가부장주의자들은 심지어 그 중에 여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의심할 여지 없이 깨끗이 쓸어버려야 할 죄악의 집단이다. 가부장주의는 주둥이로 하는 파시즘이요 '생활 나치'다. 그러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성의 주체성이 발휘되지 않았다면 그것을 지지하고 촉진하여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회학에서 숨 쉬듯이 다루는 정론이다.
그런데 고등학생 미혼모가 애 낳겠다고 하면 지지하고 촉진하여야 할까? 그것이 여성으로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니까? (경제력과 사회적 안정을 갖추고 진입각을 보고 들어가는 비혼모 얘기가 아니다.) 당신의 여성 친구가 만 19살에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남편이라는 놈을 데리고 와가지고는 결혼하겠다고 하면 '아 그래! 그것이 바로 여성의 주체성이지! 멋져 응원해!' 라고 할 것인가? 만 22살에 30살 넘은 개저씨를 데리고 와서는 트루러브라고 주장하면서 결혼할 거라고 하면 오우 일등 신랑감!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라고 박수 쳐 줄 것인가? 가끔 저를 때리고 목조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이 남자에게는 제가 필요해요, 라고 말하는 여성을 존중해야 하는가? 걔가 나중에 어떻게 될 지 미래가 훤히 보이는데?
아마 당신도 그런 개소리를 실제로 듣는다면(그런 일이 결코 없기를 바란다), 듣자마자 그 자를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의 판단력 상실한 등신 새끼로서 일단 한 대 갈기고 싶을 것이다. 죽창은 성별 앞에 평등하다. 나는 여러분이 결코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런 내밀한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 멍청한 놈을 패고 싶은 것은 인간의 매우 깊은 욕구 중의 하나인 것을 내가 어떡하겠는가. 수많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회운동을 하는 젊은 동지들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X같은 X신새끼 그 X끼는 X나 쳐맞아야돼 X이이이발!!!' 을 연호하는 것을 나는 몇 년째 보아 오고 있다. 인간… 인간의 빡침은 옳은 일을 할 때도 그른 일을 할 때도 동일하게 튀어나오는 자동차의 엔진소리와 같다….
하지만 그런 내밀한 욕구를 제어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배우거나 깨달아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것은 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사실 마음속 깊이 저 등신이 내린 에바참치 결정에 어이가 털려서 그런 인간의 주체성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남들에게는 내가 그렇게 깨어있고 PC한 사람임을 일단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자 그렇다면 우리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내면의 진실의 문을 개방하여서 X신 같은 판단력을 가진 저새끼 등짝을 정신 차릴 때까지 후려쳐야 할까? 아니면 그의 주체성을 존중해야 할까?
이것은 바로 주체성의 딜레마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계속해서 되찾고자 분투하는,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주체성에는 커다란 딜레마가 있다. 그 딜레마는 인간의 '주체적 어리석음'에서 나오고, 그 딜레마에서 무엇을 결정할지는 여러분께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받아들질지가 결정한다.
'주체적 어리석음'의 문제는 바로 '내가 나를 해할 수 있음'의 다음 일곱 가지 가능성에 존립한다.
첫째, 인간은 때로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정을 내린다.
둘째, 인간이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결정 중의 일부는 제정신인 상태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셋째, 인간이 지금 이 시점에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정을 하고 만족하였더라도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를 원망한다.
넷째, 인간이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정을 하고 후회하지도 않았더라도, 사회의 보편적인 상식선에서 봤을 때 그것은 터무니없는 손해로 보인다.
다섯째, 인간이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정을 하였을 때, 그 결정은 하나의 선례가 되어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타인도 그렇게 살도록 촉진할 수 있다.
여섯째, 인간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정을 하였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복구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합리화하며, 그러한 합리화 과정도 하나의 문화가 되어 타인의 비슷한 잘못을 촉진하거나 지속케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일곱째,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결정은 장기적으로 경로의존성이 되고 본인 자아개념의 일부로 융합되어, 점점 삶이 진행될수록 복구하기가 어려워지고 그에 따라 위의 여섯 가지 해악들이 강화된다.
이러한 일곱 가지 가능성의 경고는 스스로 할 수가 없다. '주체'의 외부로부터 제안된 것이다. 오직 타인만이 이런 충고를 해줄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학창시절 컴퓨터게임에 중독되어 있었다.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잘 때까지 게임만 했고, 공부는 손도 대지 않았고, 친구들도 게임하는 친구들만을 사귀었다. 이것은 내 커리어와 인간관계의 질을 심각하게 저해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결정들을 '주체적으로' 내리기도 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도 내 인생에 대해서 분명하게 내 의견을 말했으며, 부모나 선생으로부터 - 즉 주체 외부로부터 - 나에게 들어온 영향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분명하고 주체적으로 타인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하여 내 인생을 박살낸 것이다. 나는 아직도 중학교 2학년 때 내 멘토링 선생님과의 대화를 기억한다. "제가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달라질 수 있나요? 너무 늦은 것 아닐까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중학교 2학년이면 늦지 않았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돼." 그 때 나는 그렇게 물어놓고도 스스로 이미 공부 잘 하는 학생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고 아예 공부에는 손을 놓았다. 아수나로가 박수칠 만큼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철학과 학부 시절부터, '주체성'이라는 말을 경계했다. 주체성은 심지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변증법'이라는 동어반복의 궤변보다 해로운 유일한 말이다. 진보적인 이론들은 주체성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소수의 권력자들이 다수 민중의 자기결정권과 권리를 비롯한 수많은 인권적 · 헌법적 권리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체성을 침해한 사건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의 부조리와 악에 반하여 세상을 더 낫게 바꾸려고 노력하는 페미니즘을 위시한 거의 모든 진보 사상은, 주체성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다. "민중에게 주체성을! 성노동자에게 주체성을! 청소년에게 주체성을!"
그리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비상식적인 인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애석하지만) 주인에게 돌려주자는 그 주체성의 실제 내용 그 자체에도 별 문제가 없음을 알 것이다. 누가 결혼하지 않을 권리를 의심하는가? 누가 연인과의 만남을 거부할 권리를 의심하는가? 이제 그런 주장을 대놓고 하는 사람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비혼 · 비출산 ·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영원한 - 우주의 시작부터 끝까지 항구적인 - 권리와 권익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뒤집힐 때 문제가 발생한다. 어느, 주체성을 가진… 18세 미혼모가,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아이를 낳을 권리를 말해버린다면? 낙태할 권리가 아니라 낙태하지 않을 권리를 말해 버린다면? 19세에 대학도 안 가고 알바로 전전하는 여성이 자기랑 비슷한 남자 데려와가지곤 결혼할 권리를 말해 버린다면? 데이트폭력 피해 여성이 헤어질 권리가 아니라 헤어지지 않을 권리를 말해 버린다면? 20알의 항정신병 약을 먹어가면서 매일 밤 술먹고 담배 피고 데이팅어플 켜서 랜덤 남자랑 섹스하는 걸 뜯어말리니까 '나의 성적 주체성이니 존중하라'고 말한다면? 그래. 당연히 권리가 맞고 주체성이 맞다. 우리가 공유하는 모든 자유의 이론은 자유가 그 주인 자신에게 소속됨을 증언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주체의 주체성과 행위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 거시적인 논리를 당신 앞에 선 그 미시적인 한 사람에게 적용시켜서 그 모든 뻔한 결말들 앞에서도 '너의 선택을 존중해'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사실은, 워마드나 TERF 류의 인간들이 말하는, "결혼은 가부장제에 대한 부역이고 여성에 대한 배신이다"라는 말이 적어도 그 취지에서만큼은 타당하다. 워마드나 TERF의 논자들은 인간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그들의 앵꼬난 지성으로는 제3의 젠더따위는 볼 수가 없으니) 모두 하나의 성적으로 형성된 계급이고 그 계급성이 그 자신의 행동과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대단히 맑시즘적인 인간관을 따르고 있다. 또한 여성들이 자신이 '주체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결정들은 우리가 어항 안의 물고기가 물에 노출되듯 숨 쉬듯이 노출되는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에 물들어 있는 탓에, 사실 주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그저 타자를 충족시키는 노예와 같은 행위를 하고도 나는 주체적 여성이라 자위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TERF처럼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인간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지만, 그 주장만큼은 우리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주장은 사실, 확대하면, 인간의 주체성 그 자체에 대한 철학적이고 혁신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 질문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이것과 같다 : "주체성이란 진짜인가? 아니면 타인이 너를 악용하고선 너의 삶이 주체적이라고 믿게 할 뿐인가?" 그리고 그 배면에 깔려 있는 가치관은 이것이다. "자매여. 남 좋은 일 해주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살아라."
우리는 특히 너무 일찍 결혼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혹은 어떤 나이든 '결혼'이라는 것을 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또한 출산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어느 정도는, 아주 어느 정도는 워마드가 되고 문화주의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된다. 우리의 양심은 검토한다: 아… 그… 너가… 결혼하면 너 경력 끊겨서 나중에 빈곤해지지 않을까? 여기에 이러이러한 통계적 증거들이 있고 네가 특별히 돈으로 커버할 수 있어 보이지는 않아…. 결혼해서 가정 안에서 살기보다 너 자신의 커리어가 중요하지 않을까? 아이를 낳으면 몸도 망가지고, 돈도 몇 억이 들고, 십수 년이 들어가는데… 번식을 하기보다는 너의 하나뿐인 인생을 즐기는 것이 어때? 라고 우리는 당사자에게 묻는다.
그 배면에는 우리의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주체성을 넘어서는, 그 사람의 생애 전체에 대한 염려가 있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이가 축복이고 선물이고 자시고 해도, 결국 한 여성의 인생을 어떤 분야에 붙들어 놓고 경력을 단절시키고 그것이 장기적이고 복구하기 어려운 사실상의 자유 박탈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은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결정이 아무리 주체적일지언정, 그 사람의 인격 형성기에 노출되었던 결혼과 번식에 대한 찬양들이 거기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사실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변에 널리고 널린 NATE판 급의 레전드 썰과 후회 사례들과 통계적인 파국들을 보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가는 언젠가 본인들부터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체성 행사 vs. 뜯어말림'의 딜레마는 단지 별 탈없이 비교적 평온하게 사는 일반적인 여성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문제에게도 적용된다. 성매매 종사자(성노동자)의 주체성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당연히 본인들이야 주체적으로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폭력 아래 놓인 사람들이 강제 성판매 범죄를 당하고, 심각한 빚을 진 사람들이 정보결핍에 갇힌 상황에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성판매를 택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본인은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다고 주장하며, 당사자 중에서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만족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러나, 당사자가 좋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간에, 당사자가 얼마나 자기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하든지 간에, 성매매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들은 일관되게 성매매 환경이 인간의 정신을 박살낸다고 보고한다. 항정신병 약과 정신질환에서 해방되어서 멀쩡한 정신으로 성매매 하는 사람을 나는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주체성이란 그저 '나는 나입니다' 라는 느낌에 불과하다. 미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자신이 주체라고 말한다. 주변 사람을 파괴하는 소시오패스와 나르시스트도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하고 주체성을 행사한다.
참고 : 성매매 문제에 있어서는, 김자영&양정빈 선생님들께서 굉장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한 다음 연구를 참고하라. https://www.kihasa.re.kr/hswr/assets/pdf/748/journal-33-3-130.pdf 더 알아보고 싶다면,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간행물 목록을 참고하라. 성매매와 청소년성매매에 관한 중요한 연구들이 수록되어 있다. https://www.stop.or.kr/multicms/multiCmsUsrList.do?category=pd&srch_menu_nix=nFog4NJ7
주체성은 그 주인의 상태가 어떻든 자기애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보편적 자기의식과 그것의 행사에 대한 사회적 인정에 불과하다. 그것을 특별히 섬길 이유는 전혀 없다. 물론 주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적으로 지워지고 핍박받은 사람들에게 '당신에게도 주장할 권리가 있고 입이 있습니다' 라고 커다란 힘을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주체성만을 판단에 반영하고, 그 주체와 다른 주체와의 관계 · 주체의 오류 가능성 · 주체가 악할 가능성, 주체의 진술과 다른 객관적인 사실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람들 사이에는 유효한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진보적 · 좌파적 사회운동 전체가 주체성에 집착한 결과 생겨난 끔찍한 결과가 바로 당사자주의에 대한 반성 없는 숭배다. 그것은 세상을 하나의 객관적 세계와 그 객관적 세계를 밝히는 수많은 경합적인 진술들이 아니라, 당사자성의 유무로 분열된 서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지구는 하나이고 현실도 하나임에도, 그들에게는 n개의 지구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제한된 물리적인 현실 속에서, 협동하고 양보하고 타협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의 선 ·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가 없게 된다. 주체가 타자를 만날 때에만 마찰하듯이, 주관 역시 객관과 만날 때에만 성찰하고 반성하고 자기의 뇌피셜에 대하여 팩트체크라도 좀 하게 되는데, 이 주관이라는 것(또는 주체라는 것) 그것 자체를 숭배하게 되면, 타자와 객관과의 만남은 불가능해지고 주체성은 위험천만한 독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매매 문제에 있어서 당사자주의에 과몰입하여 '저 사람은 성매매 당사자니까 그 사람 말이 다 맞다'고 해 버리면, 그들이 가진 자기합리화 · 경로의존성 · 좁아진 세계관 · 트위터에 갇힌 사고방식 · 여러 정신과적 문제들을 간과하게 된다. 그 중대한 장애물들이 제거해야 할 것들이기는 하지만, 실은 당사자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만드는 주요 요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복합적 정신 역동의 최종 결과에 불과한 액면가로서의 '주체성' 그것만에 몰입한 나머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나-아닌-세계(객관 세계)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주관의 일부가 된 장애물들을 언급하는 것을 단지 혐오로 치부하고 오직 당사자의 주체성을 무한히 긍정하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를 오히려 자아와 소수집단의 게토로 몰아넣고 사회 전체와의 의사소통을 차단하게 하는 처사이다. 당사자의 주체성도 어차피 타자들로부터 온다. 우리 모두가 세계와 환경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당사자의 오류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당사자도 자신의 주관에 갇혀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것은 객관적으로 옳고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수자 당사자의 주체성을 무조건적으로 격려하고 칭송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의 '입장'을 충분히 귀기울여 잘 듣되, 정말 객관 세계에서 우리에게 남은 카드들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도리어 도리어 객관의 세계로 점점점 이끌어내어야 한다. 강요하지 않되, 상식적이고 평균적인 잣대를 끊임없이 공급해야 한다. 개인주의와 경력개발이라는 중산층의 가치를 끊임없이 권해야 한다. 나는 세상의 어떤 사회적 약자 그룹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가난하게 살면서 서로 앓는 소리 하면서 현실검증력을 점점 잃어가고 조울증과 자살 시도만 늘어나는 21세기 게토를 형성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꾸 자꾸 세속의 세계로, 객관의 세계로, 근거중심의학과 표준적인 치료의 세계로, 낯선 타자와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만남의 세계로, 끊임없이 끊임없이 끌어내어야 한다.
다른 사례들도 마찬가지다. 청소년과 탈학교 · 탈가정 위기청소년은 어떻고, 또한 정보 빈곤에 빠진 수많은 저소득 가구와 쪽방촌 거주자 그리고 노숙인은 어떨 것인가? 명백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술 · 담배 · 과식을 하는 수많은 자기파괴자들과 비행청소년들은 어떨 것인가? '주체성의 파편화와 쪼그라듬'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동일한 원리를 공유할 것이다. 제한된 시야, 제한된 앎, 제한된 커리어, 다급한 의 · 식 · 주 등의 필요성, 정보결정 경험과 조언자들의 결여와 같은 여러 분야에서의 결핍들이 사람들을 '어리석은 주체성'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겪는, 낱낱의 구체적인, 미시 문제에 대하여, 단지 거시적인 주체성 개념만을 남발할 수는 없다. 거시적으로 모든 인간은 주체이고 그 주체성을 행사할 수 있는 사실상의 권리를 제공받아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을 우리가 1 : 1로 만났을 때, 혹은 사회적 약자의 지원 기관이 그 사람을 1 : 1로 만났을 때, 우리는 그의 삶이 결코 거시적인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고 거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는 도구로 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없고 하다못해 임파워링할 수도 없음을 알 것이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쓰지 말라는 속담은, 작은 문제를 푸는 데 커다란 도구를 들고 오는 등 과잉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작은 문제를 푸는 데는 그에 맞는 정밀 기기가 필요하며, 나아가, 해당 규격에는 해당 규격에 맞는 툴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 : 1의 수준에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거시적인 수많은 입바른 소리를 하기보다는, 정말로 진실되고 진솔하고 세속적이고 현실적으로 상대방을 염려하며 때로는 공적 수준에서는 하지 못할 이야기들도 때로는 속물처럼 들리는 조언들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모든 진실은 빻았다". 진리는 인간이 그은 학문의 경계도 국경도 상관없이 유유히 존재하는데, Political Correctness라고 신경쓰겠는가? 인간에게 유익한 진실은 정치적 올바름의 너머에 있으며, 그것을 타인에게 제공하는 방식도 똑같이 그 너머에 있다. 인간에게 가장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빻고 안 빻고를 벗어나야 한다, 거시적인 이론을 언제나 참조하고 의식해야겠으나 그것 자체를 지금 여기 구체적 개인에 바로 적용하려 해서는 안된다. 미시적 문제는 전혀 다른 경로로 해소된다. 즉각적이고 세속적이어야 한다. 지금 그 사람에게 돈과 먹고 누울 곳을 제공해야 하고, 앞으로 그 사람에게 가장 세속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래야 십 년, 오십 년, 백 년을 두고 거시적 정의가 실현된다. 그것이 바로 거시적 이익과 미시적 이익을 모두 살리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개인적 조력 앞에서 기억해야 한다.
가장 고운 진실은, 입 밖에서는 가장 거칠게 들린다는 것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Gabe Rebr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