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화>는 없다.

사상의 원본은 당신의 삶에 있다. 사상의 검증책임도 당신의 것이다.

by 나루

극복하는 정신으로서 탈근대성의 탄생


페미니즘을 포함해서, 사회적 취약 그룹에 대한 포괄적인 보호의 정신은 현대 윤리의 핵심 축이다. 또한 기존의 근대적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의심하고 대안을 제공하려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 정신적 회의주의의 핵심 축이다. 정상성 · 보편성 · 근대성을 의심하는 것. 무엇을 정상으로 정의하고 · 무엇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 무엇이 근대적인 가치라고 평가하는 행위가, 사실은 '정상'과 '보편'이라는 낱말의 사전적인 의미에 진실로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권력을 가진 그룹으로부터의 강요에 불과하여 왔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 그러한 강요에 의한 부작용들을 겪었던 근대를 극복하려고 하는 현대적 정신인 것이다.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모든 말과 논의들이, 근본적으로 현실에 사는 실제 인간들의 삶과 필요 그리고 불만사항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라는 것을 언제나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단지 어떤 추상적인 문화적 유행으로서의 '근대성'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 같은 저항이다. 단지 사후적으로 '근대성'이라고 포괄적으로 지칭되는 모든 과거 수십 년동안 저질러졌던 권력을 가진 그룹으로부터 가해지는 구체적인 낱낱의 해악에 대항하는, 오늘날의 낱낱의 대안적 행위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바로 '탈-근대성'인 것이다.


이러한 탈근대성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책 속에 저자가 적어 둔 구체적인 주장이나 명제의 형태로도 존재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사상의 하드웨어'로서 줄글과 문장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감각적인 선호와 직관 등의 형태로도 존재한다. 사실 그러한, 단지 나의 내밀한 정신에만 존재하는 선호도 · 직관 그리고 감정적인 반응들이 '사상의 하드웨어' 이전에 존재하는 진정한 '사상의 실제'인 것이다.



사상의 실제 존재 주소


그래서 어떠한 특정한 상황에서, 예를 들어 우리 동료시민 가운데 누군가가 결코 당해선 안 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자. 그때 그 부당한 대우가 단지 "무슨무슨 주의 하에서 무슨무슨 원칙을 침해했기 때문에" 나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그냥 '부당함' 그 자체를 느낀다. 부당함에 관해 기술한 구구절절한 사상이 아니라. 그러한 대우를 방지하자는 사상이 이 세상에 존재했든 존재하지 않든, 알든 모르든 간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부당함과 저항의 욕구를 '느낀다'. 사상은 단지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매일 지각하듯이 구성되는 학자들의 사후 정리에 불과하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올라오고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현장에서 문장과 논리를 조립해내어서 피해자와 함께 저항하는 것, 강자의 폭력을 저지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것, 그것이 '사상의 원본'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어떤 사상을 하나의 자격증이나 정체성처럼 말하는 것이 굉장히 안 좋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기 행동의 근거를 매일매일 스스로 체험하고 그 체험의 결과에 따라 갱신하는 생생한 나의 도덕적 직관이 아니라,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묶여 있는 '사상의 하드웨어'에 종속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는 세상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들 가운데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이후부터~' 혹은 '내가 페미니즘 정체화를 한 이후부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이 아닌 누군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이 발견하기 전부터 당신에게 존재했다. 규정되기 이전의, 그러나 자신을 규정하는 모든 것을 불러들이는 언어의 원본. 그것은 당신의 양심이다.


페미니즘이 옳다고 여길 만큼의 양심이 없었으면 당신은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을 것인가? 페미니즘이 가부장제가 나쁘다고 생전 처음으로 속삭여준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보기에 가부장제는 원래부터 사악한 짓들이었나? 나는 분명 당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페미니즘의 언어를 만나기 이전에도, 이미 세상의 사악한 짓거리들에 대하여 개인적인 부당감과 분노를 느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당신이 페미니즘을 옳다고 생각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을 뿐이다. 그 원본의 감정과 직감이 이제는 여러 이론들 속에 녹아들어서 감지되지 않을 뿐이다.


언어화되지 않은 양심은 당신이 한 때 몰랐던 당신의 내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당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사실과 사건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당신의 양심이 먼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면(사상의 원본), 그것을 서술하는 페미니즘이 당신에게 편입될 수는 없다(사상의 하드웨어). 자신이 새로 '정체화'할 새로운 일부는 없다. 기존에 있었던 나의 일부에 새로운 언어라는 간판을 달아줄 뿐이다.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총체적 삶의 일부분을 새롭게 설명하는 더 나은 이론적 도구를 추가할 뿐이다.



도덕적 직감의 주인이 되어라


그런 점에서, 자신의 어떤 사상에 동감한다고 생각하게 될 때에도, 그것은 그 사상이 천부적으로 옳기 때문에 그 사상으로 마치 '무장하고' 자신을 '정체화'한다고 착가해서는 안 된다. 단지, 애초부터 느껴왔던 도덕적 직감에 이름을 부여할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 누구도 페미니즘을 설명한 줄글들 그 자체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된 사람은 없다.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에 저항하고 적어도 저항해야 한다는 도덕적 직관 때문에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를 '부르는' 것이다. 그 직관의 탄생 이후에, 즉, 직관적으로 느끼는 부당함과 그것에 대한 저항의 존재 이후에 그 사건들이 저자들에 의하여 정리되는 과정에서 주로 젠더와 관련된 것의 일부에 대하여서 페미니즘이라고 '불릴' 뿐이다.


'정체화'라는 말과 그러한 사고방식은 사상이 발생하게 된 순서를 거꾸로 파악하게 만들고, 그래서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현실과 체험에 비추어 그 사상을 검증하고 업데이트할 기회를 앗아간다. 페미니즘적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옳은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옳기 때문에 페미니즘적이라고 불리는 행위들이 옳다고 판단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현상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현실 검증이 멈추게 된다. 어떠한 사상과 그 사상이 규정하는 행위 목록들이 실제로 인간에게 어떤 공익적 혜택을 제공하는지에 따라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당화의 근거가 사상 그 자체가 되는 참사가 일어난다. 사상을 규제하고 형성하고 정당화하는 근거가 현실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현실을 통해 추상을 정화하라


현실로부터 분리된 그 근거들은 어디로 갈까? 그것은 추상의 세계로 간다. 개가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집은 근본적으로 주인의 집이듯이, 사상이 추상으로 돌아갈 때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추상이다. 인간의 추상이란 무엇인가? 현실적이지 않은 것, 실재하지 않는 것과 실제가 아닌 것에 대한 것, 사실과 다른 편견에 사로잡힌 것, 날조하는 것, 망상적인 것이 바로 인간의 추상이다. 인간은 자신의 추상을 현실-객관이라는 유일한 검증수단과 대조해 봄으로써만 다시 과오 없는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 현실에서 붕 떠서 추상 속에서 자유유영하는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타락한다. 추상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천상계는 없다. 추상이라는 것은 단지 부정확하게 파악되는 현실을 동물적인 바램들로 재해석한 망상의 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명증한 현실의 불로 정화해야 한다.


사상은 근본적으로 추상의 영역이다. 그것은 단지 현실의 문제에 대해서 응답하고 그것에 대응할 능력이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정당화된다. 그것이 그것 자체에 의하여 정당화되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인가에 의하여 정당화되는데, 그것이 누구이겠는가? 당연히 인간이다. 현실 인간의 만족감이다. 우리는 순서를 기억해야 한다. 나와 나의 체험이 모든 사상에 앞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어떤 사상에 동조한다는 것 그 이전에, 그 사상이 탄생하게 된 인간의 악행과 그 결과로 발생한 인간의 고통, 혹은, 인간의 무지에 인한 사고와 그 결과로 발생한 인간의 피해가 먼저 있었고, 그것에 직관적인 도덕적 분노를 느끼고 좌충우돌하며 대항하게 되었고, 그것이 당신뿐만이 아니기애 저항의 공동체가 발생하였고, 그러한 체험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저항의 현황을 해석하고 최적화하면서 사상이 탄생한 순서가 있는 것이다.



현실성이라는 최고의 긍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고도로 복잡한 이론이나 사상을 말할 때에도, 지극히 적절한 평균지점을 찾아서 매우 효율적으로 일반화된 설명 프레임과 이론을 다룰 때에도, 언제나 뒤통수에서는 '그것의 실제 주소가 이 지상에 어디에 위치하고있는지' 계속 탐색하고 검증해야 한다. 오직 그 방법을 통해서만 추상화된 사상과 언어들이 타락하지 않게 하고, 그것들이 실제 인간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하는 과정을 촉진할 수 있다.


우리는 자꾸 물질 세계를 탈출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해한다. 삶이 팍팍하고,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부조리와 부정의들이 세상에 널려 있고, 심지어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죽게 된다. 물질의 삶이 어떻게 보면 좀 끔찍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물질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무엇이란 말인가?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고서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기술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의 실재는 생활이라는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다. 그것을 누군가는 우리가 현실에 종속된 것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물질인 우리가 물질세계에 종속되었다고 할 때, 내가 나에게 종속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건 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에 종속된 것이 아니다. 현실의 중력에 맞서서, 자신의 무게를 이기고 딛고 서 있을 뿐이다. 육체와 정신의 번거로움을 견디고 꿋꿋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멋진 자립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위대함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재료가 된다. 그러므로 늘, 추상의 어둠을 비추는 현실의 빛을 잘 지켜야 한다. 현실의 일을 현실적으로 대응하고, 현실을 조금씩 개선하고 또한 개혁해 나가면서 열심히 사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자. 그것이야말로 명예로운 일이다. 현실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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