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이유
어떤 사람들은 공포스럽고 압도적인 절대악이나 파국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혹은 천국과 지옥이 실재한다고 말하고,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일군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는 곧 망할 것이다! 혹은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영원히 승리한 체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너무 모호한 단어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란 무슨 뜻인가요? 자본주의라는 포괄적인 개념이 지칭하는 낱낱의 실물들은 무엇무엇이 있나요? 자본주의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자본주의입니까? 이렇게 포괄적인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해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망한다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해의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면 망한 것입니까, 아니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처럼 주가 대폭락이 오면 망한 것입니까? 그러면 2020년의 호황은 '부활'입니까? 망한다는 것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예컨대 사회나 시장이 망했다고 주장한다면, 그 추상적인 개념을 구성하는 낱낱의 요소 전체가 완전히 무너질 수 있습니까?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면, 몇 퍼센트까지 무너져야 망했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여기서 '무너짐'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공산주의는 망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란 무엇입니까? 조선사회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체제를 말하는 것입니까?(심지어 북한은 헌법에서 공산주의를 삭제했습니다) 아니면 소련의 체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심지어 진정한 공산주의는 실현된 적도 없고 실제로 인류가 말아먹은 것은 공산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스탈린주의나 국가자본주의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공산주의는 누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까? 영국 공산당의 것을 말합니까, 아니면 틀림없이 이름은 공산당인데 삼성과 협력해 노조를 탄압하는 베트남 공산당을 말하는 것입니까? 혹은 자본주의 선진국이 된 중국 공산당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예는 끝도 없습니다. 이 나라는 망했다! 한국이 망했다! 미국이 망했다! 북한이 망했다! 아니면 한국이 최고다! 미국이 최고다! 북한이 최고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사용하는 포괄적인 단어들이 너무 많은 서로 다른 개념들과 아마 포착되지 않을 잠재적인 개념들까지 포괄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거치며 우리가 사용하는 주된 개념어들이 오늘날에 이르러 굉장히 섞이고 희석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 역사 속의 갈등은, 두 개의 포탄이 서로를 향해 발사되어 그 중 더 강한 하나가 더 약한 것을 산산히 부서트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장 완벽한 학살자조차도 사람들의 기억과 진실을 다 없애 버릴 수는 없었기에 어떤 사람도 이 세상에서 폭력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유족이 남거나 아니면 기억이라도 남는 것입니다. 가장 거대한 대립이었던 자본제와 공산제의 냉전도 결코 자본제가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자본제와 공산제라는 두 영역 자체도 그 내부의 숱한 대립 속에서 대략적으로만 윤곽을 띄게 된 것이라 결코 '하나'였던 적이 없습니다. 냉전은 그저 두 편으로 갈라야 인지적인 에너지가 적게 드는, 게으른 인류의 실수였습니다. 정확하게는 모든 이념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욕구와 욕망과 필요가 섞여 있다고 보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서 간략하게 말하자면 자본제와 공산제는 군사적으로는 경쟁을 그만두었지만 정책적으로는 서로에게 섞여 들어갔다고 볼 수 있고, 더 심하게 말하자면 자본제와 공산제는 단지 수많은 정책들을 속편하게 분류한 이름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포탄이 둘 중 하나를 깨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물복숭아와 포도를 서로 부딪히는 것에 가깝습니다. 물복숭아와 포도를 양 손에 들고 서로 부딪히면 처음에는 버티겠지만 점점 으스러지고 두 과일이 터져서 섞일 것입니다. 그 아래에 물 양동이를 받치고 있으면 복숭아와 포도 물이 떨어지겠죠. 그걸 10분 정도 한다고 해 봅시다. 원래 그 과일은 찾아보기도 힘들고 아래에는 멀건 과일 물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실제 이념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극한의 대립을 보이는 이념이라 할지라도 공론장에서 여러 입장의 사람들의 입에 계속 돌고 돌다 보면, 각각의 이념이 가진 합리성이 사람들의 의견 속에 섞여들어가면서 점차 원래의 색은 희석되고, 양동이의 맹물처럼 양적으로 압도적인 다른 이슈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결코 '중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중도들은 단지 이 세상이 이렇게 생긴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소수자 차별을 보완하는 법이 대상자를 보호한다고 생각해서 법제화되도록 추진하지 않고, 비대상자를 역으로 차별한다고 생각해서 저항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의견에도 뚜렷이 찬동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만족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중도'는 의견이 없다는 방식으로 자신이 현재 상황에 만족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생각은 전통적인 찬성-반대-중도의 세 축이 아니라, 찬성-반대-'현 상황에 만족함'의 세 축으로 분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의 명백한 정치적 의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둘 중에 어떤 이념이 옳느냐는 식의 질문은 마치 '역사에 만약 누가 이겼더라면' 하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이승만이 아니라 조봉암이나 여운형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미 군정이 어느날 아침에 뭐를 잘못 먹고 군사통치를 하지 않기로 했다면? 소련이 어느날 뭐를 잘못 먹고 한반도를 완충지대로 내버려두자는 마음을 먹고 평화롭게 조선인에게 정권을 주었다면?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이렇게 된 게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다행스러울 일일까요 아니면 통탄을 금치 못할 안타까운 일일까요. 제 대답은, 아마, 어차피 지금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반도라는 땅 자체가 이렇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사람들은 다른 모든 나라의 사람들과 같이, 공업 생산력을 끌어올렸으면 군사주의와 독재 채제를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기 때문입니다. 공업 생산력이 낙후되었다면, 아마 다른 평행 세계에서도 신생국가에 높은 확률로 등장할 독재자를 누를 만큼 충분한 돈과 먹거리와 주택을 가지지 못하여서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어느 나라에서든 대체적으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만약에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이겼다고 해도, 한국은 다시 공업화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민주화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수출중심 중화학공업 집약적 산업으로의 전환이라는, 거시적으로 중요하고 유리한 결정이 내려졌을지는 미지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빠른 공업화라는 경제정책 특성은 박정희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공산권 국가 전체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국기가 어떻게 생겼든 한반도의 생산품은 엇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최종적으로는 민주화 혁명도 반드시 일어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듯한 호남 곡창 지대는 그 식량 생산력 때문에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한국이 가난하던 80년대에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대단한 일이지만 확률적으로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반대로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완전히 져서 없어졌다고 해도, 한국은 여전히 군사주의적이고 꼰대들이 난무할 것입니다. 북한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일본과 중국을 지목하면서 20대 남자들에게 공짜 군인노릇을 강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없어지더라도 그 강제징병 정당화의 슬로건은 '우리는 70년째 전쟁중인 나라야'에서 '우리는 700년째 전쟁중인 나라야'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핑계야 말이 안 통하는 북한이나 아니면 침략 좋아하는 이웃나라 핑계이지만, 근본적으로 싸게 먹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노동을 덜 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월급 40만원 주고 건강한 남성 청년 50만명에게 군인이라는 위험한 기피 업종을 2년간 맡긴다? 군대가서 우는 사람 제외하고 모두가 이득을 보는 이 '임시 노예 제도'는 당연히 온 백성이 나란히 지옥에나 떨어질 일이지만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 상당한 달콤함이 있습니다. 공짜 공무원 50만명은 괜찮지 않나요?
국방 인력만 말도 안 되는 싸구려 가격으로 부려먹는 것이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대민지원도 나와 줍니다. 강제 봉사활동이죠. 홍수나면 징집병들이 공짜로 대민수해복구 나와주죠, 쌀농사 도와주죠, 사회복구사업에 돈이 거의 안 풀리니까 내가 먹는 밥값이 싸집니다. 2020년 코로나 사태 초기에, 징집된 군인들이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휴일도 없이 수당도 없이 방역마스크 도매업체 물량 처리에 강제동원된 사실을 아시나요? 국방부는 이 징집병들에게 식비 8,000원만을 지급했습니다. (기사 출처) 이것이 논란이 되자 국방부는 그럼 '자원 봉사 시간'으로 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기사 출처) 이렇게 공짜 좋아하고 인간의 시간과 노동을 약탈하는 체제를 북한 핑계 대면서 찬미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강제 노동에 대해서는 할 말이 대단히 많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참 그래요, 대민 지원이 아니면 괜찮나요? 사기업을 돕는 대민지원이 아니라 그냥 신성한 병역 의무만 이행하도록 평일에 내무반에 가둬 놓으면 다시 국가를 위한 활동이 되고요?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공무원 월급도 40만원에 맞춰 봅시다 그러면.
남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돈 한 푼 안 주는 것은 달콤한 이익이 됩니다. 내 화폐는 전체 통화량에 대한 상대가치를 가질 뿐이기 때문에 공공에 돈이 덜 풀릴수록 원화 가치의 전체 풀에서 내 통장 돈이 갖는 가치가 늘어나요. 돈의 희석(인플레이션)을 방지하려면 남들 봉급을 깎아야 하고, 그럼에도 정신나간 팽창주의 옆나라들에 대한 군사적 억지력 유지이든 대민지원이든 서비스가 생성되면 그에 걸맞는 봉급이 지급이 되어야 하는데, 최고로 이득인 것은 서비스와 재화를 생산하되 돈은 안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을 공짜 착취를 시킬수록 나는 앉아서 돈을 버는 셈입니다. 재미있는 건 그래봤자 원화(KR₩) 경제규모가 워낙 크기에 모병제 군인 월급에 대한 전 시민의 분담금이 사실 몇푼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지만, 남자 인생 2년씩 노예로 부려서 자기 점심값 몇십원 몇백원 싸지면 사람들은 좋아하지요. 솔직히 좋지 않으세요? 정말 그 돈 내고 20대 남자들을 군사노예에서 풀어줄 수 있다면 왜 모병제를 지지하지 않으십니까. 신성한 국방의 의무! 자유민주주의 수호! 이념으로 포장할 뿐입니다.
이제부터 '신성한 공짜 노예' 라고 합시다.
성차별도 천벌 받을 짓이지만 그걸 하는 놈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당연히 이해가 됩니다. 지 이득이니까요. 경쟁사회에서 인구의 50%를 재껴버리고 시작할 수 있으면 나라도 할 것 같지 않으세요? 제가 세미나마다 반드시 인용하는 그래프가 있습니다. '죽음의 M자 그래프'라고 덧붙이곤 하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중절모 보아뱀을 닮은 「성별/연령대별 고용률 그래프」가 있습니다. '연령대별 여성 고용률'이라고 검색하면 바로 나옵니다. 거의 매년 갱신되니까 한 번 검색해 보세요.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는 순간, 육아휴직을 쓰는 순간, 면접에서 예 저는 결혼할거에요 말하는 순간,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그러니까 아마 당신 얘기일 거라는 겁니다) 커리어의 문은 닫히고 경제적 종속과 경력단절이 시작됩니다. 남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양심이 없으시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 않나요? 여자들을 다 재낄 수 있잖아요. 신성한 어머니의 역할!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해! 모성본능! 남녀유별! 이념으로 포장할 뿐입니다.
이제부터 '신성한 사다리 걷어차기' 라고 합시다.
여러 화려한 언변과 구실이 달라져도 사람들의 이익이 그 맨 아랫칸에 깔려 있기 때문에, 사람의 수는 결국 뻔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수가 언제나 뻔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역사에도 만약은 없습니다. 역사는 정당하다는 말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인간 사는 곳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결국 역사는 그 땅과 그 사람들의 물질적 조건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시행들의 평균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물론 가끔 나치나 일제나 북한 등의 침략적인 정부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희생된 사람들을 없게 하기 위해 타임머신은 필요합니다. 다만 역사를 매우 길게 보았을 때, 백 년이나 천 년 또는 만 년 단위로 보았을 때, 사람들의 평균 욕망을 향해 역사는 갱신되어 갈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균 욕망을 결코 충족시켜주지 못할 야만과 폭압은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적으로 자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1984』에 나오는 조지 오웰의 감시사회 디스토피아가 완전히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이 불편하고 부당하다고 말하고, 그것이 지속될수록 저항자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한두 세대의 열광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자녀들은 오래된 것에 열광하는 부모들을 한심하게 여깁니다. 중국의 권위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국가주의와 '국뽕'은 언제까지 갈까요? 50년, 500년 뒤에도 중국인들은 중국의 권위에 열광할까요? 한국에서 대놓고 하는 유교 가부장제는 이제 꽤 붕괴했습니다. 지금은 당연스러운 징병제도 언젠가는 폐지될 것입니다. 세상은 반드시 바뀝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수는 없는 것일까요? 인간은 원래 믿을 수 없고 이기적인 족속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인간에게 그런 이유로 상처를 받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도 아니고 늘 그런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완전히 행복한 세계가 조성된다면, 자기가 등 따시고 배부를 때는 남 일 상관쓰지 않는 경향이 있기에 단기적으로는 그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세상의 어떤 나라도 영원한 온실을 조성하지 못합니다. 애초에 인간의 정신 자체와 지구 자체가 영원한 온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신문화와 지구 환경은 지배층에게는 단지 적응해야만 살아남는 복잡한 환경일 뿐입니다. 제국의 레짐은 환경 변화와 함께 뒤엎어집니다. 평균적인 문화의 형성과 변화를, 정치 권력은 언제나 의식하고 적응하려 노력합니다. 그것을 정면으로 거스르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양심 같은 것도 가지고 있습니다. 복종과 열광도 좋아하지만, 자유와 의심과 회의주의도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여태껏 자신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왔고 내가 먹은 비료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게 된다면 그 영향은 영구적일 것입니다.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극우들도 보수들도 그렇고, 이제 진보라고 하기는 좀 애매한 '민주당' 입장의 사람들도 그렇고, 진보주의자들도 그럴 것입니다. 자신이 믿어 온 이념과 신념은, '페미니즘' 정도의 매우 단순한 강령이 아니라(사람을 성별 갖고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인간을 자유케 하라'는 포괄적인 말보다 훨씬 쉽습니다), '자유' '평등' '공화주의'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개념일수록, 어떤 식이라도 자신이 믿었던 그 거대 담론들이 사실 내부는 굉장히 논란 많고 쪼개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기초하고 있고 최종적으로는 통합될 하나의 지평이 '물리적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념은 세계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지구 지각 물질의 구성과 기후, 물질의 성질과 기술력, 별들의 먼지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의 동물적 속성, 생물학적 필요, 공통적인 특질들이 이 세계를 결정합니다. 그것은 이념 이전에도 있었고 이념 이후에도 있을 유일한 독립 변인입니다. 이념은 단지 한 때 존재하는 특정 시점에서 쓰여진 누군가의 세계 해석에, 여러 댓글과 주석이 달린 해석의 집합체일 뿐입니다. 해석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떠받드는 자본주의도 그렇고 이제 거의 버려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가 무슨무슨 주의의 이전에 있고 무슨무슨 주의를 몰라도 욕구와 필요는 여전히 동작하며 모든 사람을 구속합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체제가 자본주의라고 불리기로 약속되었을 뿐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주목한 중요한 인간의 욕구에 대한 충족 정책에서 출발한 현대화된 정책들이 여전히 반영되어 있으며, 지금 이 체제가 '자본주의인데 뭐 어때요 탐욕 좀 부리고 1%가 99%를 소유할 수도 있는 거지'라고 하는 것들도, 사람들을 계속 불편하게 하다 보면 언젠가 정정당할 것입니다.
이념은 인간의 정신 안에 갇힌 더 작은 주장과 기술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반응하는 것은 자신이 기초하고 있는 동물 인간으로서의 (물론 여기서의 동물 인간은 인간성 안에 내재된 기본값인 양심과 친절 그리고 사회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욕구에 따른 확률적인 반응입니다. 사람들이 이념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 들어가든 협박이 들어가든 회유가 들어가든 최종적으로 자신의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욕구와 욕망에 의해 어떤 행동이 확률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안다면, 집단적인 행동도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은 마치 날씨를 예측하는 것처럼 그 예측의 성공-패배 여부를 결과로만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상과 이념은 실제 인류 의사결정의 거시적인 흐름을 예측하기가 거의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기후나 물류 시스템, 물과 식량의 수급, 또는 전염병의 확산 추이를 예측하는 통계적 방법들이 훨씬 잘 예측해낼 것입니다. 그 통계적 방법들이 예측하려 하는 것이 바로 '물리적 현실'입니다.
역사는 공인 자격증 시험의 문제은행이 아닙니다. 문제은행 방식이란, 예를 들어 기존 기출문제 1000개를 먼저 보여준 뒤 20개를 그 안에서 골라서 출제하고 나머지 10개 정도만 신규문제로 내는 것입니다. 문제 유형과 정답이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제기된 모든 문제들의 합이고 (그래서 해법이 복잡하고), 모든 예측된 정답들을 유유히 피해 가는 결과만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과 예측이 잘 안됩니다).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가장 나은 길은 오직 학제간의 융합 학문이고 또한 통계와 수학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19세기, 20세기의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북한의, 소련의, 유럽의 이른바 '혁명 정국'에서 나눴던 수많은 키보드 배틀, 즉, 비판 편지와 답신들을 구경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편지에 유치하고 부정확한 통계와 그보다 더 유치한 서로의 사상을 거론하며 피 터지게 싸웠습니다. 그게 결국은 구금과 암살과 고문과 사형과 학살까지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고 폭력적이었을까요? 제 대답은 '국가통계포털과 R이 없어서'입니다. 혹은 '대학원에서 진리의 무게에 짓눌려본 적이 없어서'입니다. 세상을 해석할 데이터도 방법론도 모르다 보니 세계가 암흑과 같아서, 믿을 것은 자기 자신의 뇌피셜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탈린이나 김일성처럼 자기확신에 찬 소시오패스들은 더 승승장구 했습니다. 자기가 파악하지도 못한 세계에 대해서 책임지지도 못할 예측을 마구 늘어놓으며, 똑같이 파악도 안되고 책임도 못지는 세계에 대한 예측을 하는 다른 정적을 비난하고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바빴습니다.
위대한 육종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유전학을 소련 농업에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르주아 반동 분자로 몰려 사형선고받고는 옥사했습니다. 바빌로프는 스탈린의 말대로 간첩이었을까요? 웃긴 소리일 뿐더러, 바빌로프와 같은 과학자는 간첩이라고 해도 극진히 대우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무함마드 깐수 사건으로 유명한 정수일 교수가 북한 출신 간첩이긴 했지만 그것은 그의 전설적인 역사학자로서의 업적을 더 빛내는 '우리 교수님 레전드 썰'에 불과한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정수일 교수의 이념은 어떨까요? 바빌로프의 이념은 어땠을까요? 모릅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시든 최고의 학자들이신데, 그쯤 되면 지구에 없는 나라를 지지하더라도 이유는 들어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수일 교수는 실크로드에 묻힌 동서 문명교류사를 발굴하는 역사학자라는 것입니다. 바빌로프는 인간의 굶주림에 슬퍼하고 더 나은 생산력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과학자였다는 것입니다. 이수일 교수는 징역 12년형을 받고, 특사로 4년 만에 출소할 때까지도 감옥에서 끊임없이 역사책을 쓰고 번역했습니다. 바빌로프는 소련의 서슬퍼런 정치인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의견'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진리'를 찾고 사람들을 더 배불리 먹이기 위해 평생 연구하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서 분명히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말뿐인 '이념'이 아니라 평생을 바쳐 자신의 직업을 통해 증명해내는 '가치'입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이념을 지키기 위하여 권력 싸움을 하고 정적을 암살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투표를 조작하고 정적을 암살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 · 공산주의 ·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사실 그 어떤 이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부당하고 폭력적인 일을 하는, 짐승 수준의 추잡한 짓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커다랗고 거대한 말들로 자신을 포장하고 정당화합니다. 요즘도 그렇지요.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그리고 '퀴어'들을 아웃팅하고 못살게 굴면서 자신이 무슨무슨 페미니스트라고 그럽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저런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하면서 주님 말씀이 어쩌고 지가 하나님의 자식이네 어쩌네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이런 수준입니다.
그렇기에, 이념과 말은 그 자체로 말해주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화려한 수사는 진실을 직접 보고 판단하는 과정을 느리게 만들 뿐입니다. 오직 행동이 그 사람을 말해 줍니다. 행동의 옳고 그름은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나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하나뿐인 지구를 개선하면 좋은 것이고, 동화적 상상력으로 꾸며낸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해 줄테니(종교인들은 자기가 봐도 이 소리가 진짜 웃기게 들리다는 것을 알까요?) 동성애자들을 전환치료하거나 거리에 총을 난사하거나 대사관을 폭파하라는 둥 이 세계를 해치는 짓을 한다면 나쁜 것입니다. 웃긴 얘기들은 현실에 비추어 점점 힘을 잃을 것이고, 사람들은 더 진지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말'로 사람을 제압하거나, '말'로 윽박지르는 것은 점점 성공하기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정직함의 빛'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지식은 점점 누적되고 보급되며 거대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아랍 일부를 암흑기에 몰아넣은 이슬람교, 트럼프 전 대통령과 태극기 부대 그리고 그 비슷한 인간들의 모임인 기독교와 같은 인간의 어두운 면이 여전히 지금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실망하지 마시고 큰 그림을 보십시오. 전 세계적으로 종교인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 결코 증가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인 수에 대한 통계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기성 교회가 신규 유저를 유치하기 위해 벌이는 몸부림은 실소가 나올 정도입니다. 우주배경복사 사진이 검색창 첫 페이지에 나오는 21세기에,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신을 믿고 영원히 살고자 내세를 기원한다는 것이 다 큰 사람이 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생각이라는 사실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광신을 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천지 같은 사람들이 그 사례이지만, 큰 틀에서 보면 기독교 그 자체도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옥 간다고 겁주고, 천국 간다고 회유하는 것은 기독교와 신천지가 공유하는 공통적인 사기 수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얕은 술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뿐이지, 근본적으로 사실이 아니고 겁을 주며 겁을 질린 사람을 조종한다는 사실에서 모든 종교는 똑같이 한심하고 괘씸합니다. 폭행죄와 특수폭행죄가 동일한 범죄이듯 그 둘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판단도 점차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요즘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비웃습니다. 지식은 협박과 거짓말을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길입니다. 지식은 한 번 확장되면 전파되고, 가끔 끊기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이기도 하고, 그 지식의 활용이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도 하는 이중 추진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뒤집히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우리가 미처 다 파악하지도 못하는 셀 수 없는 변수들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수'라고 부르는 것조차, 강물의 연속성과 강물이라는 부분을 통해 파악되는 물의 순환 그 자체를 미처 머릿속에 다 집어넣기 힘들어하는 인류가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낸 분류기호에 불과합니다. 즉, 우리가 변수라고 부르는 것조차 모든 효과의 가장 눈에 띄는 봉우리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천왕봉과 반야봉, 토끼봉과 촛대봉이 없어도 지리산은 여전히 높은 산입니다. 우리가 눈에 굉장히 잘 띄고 그렇게 분류하는 게 편하다는 이유로 이름붙인 세계의 대상들과 효과들이 우리 눈에만 분절되어 보일 뿐이지 사실은 비교적 강하거나 비교적 약한 관계로 모두 이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절되지 않은 효과들을 최대한 진리에 가깝게 재구성해내는 방법은 오직 통계뿐입니다.
그리고 통계적으로 볼 때,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아는 더 줄어들었고, 경제는 점점 성장하며, 과거의 문제들은 점차 해결되어가고 있고, 더 많은 사람이 윤택한 삶을 누려 가고 있고, 지식은 점차 보급되고 있습니다. 물론 기후 온난화는 더 심해지고 불평등이 가속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증가하는 경향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보급과 우리가 언제나 염원을 담아 말하는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실현도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실현도 미약하지만 점점 더 개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행성의 시간에서 비교적 단기를 살다가 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상향 그래프라고 해서 단지 안심하고 땡인 것이 아니라, 단기적인 하방으로의 진동을 막는 것입니다. 마치 주식이 장기적으로 우상향할지라도 단기적으로는 -50%나 -70%라도 깎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밝은 낮에도 구멍 뚫린 수세미의 일부 구멍에는 빛이 들지 않듯이, 누군가는 인류들이 자신과 타인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서 노력해온 일들의 결실들이 전달되지 않는 특수 사례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크게 보면 언제나 일보 후퇴와 이보 전진을 거듭하는 비틀걸음이라곤 하지만, 누군가는 하필 그 일보 후퇴의 시절에 태어나서 암흑 속에 고생하고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과 비참 앞에서는 현대사회의 찬가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음에 불과하고 사회적 책임을 가리는 자아도취에 불과합니다.
소련은 오늘날로치면 여성가족부 정도 되는, 여성 문제 전담 기구인 '제노텔'을 1919년 서기국 산하에 설치하여 인신매매와 같은 폭력적인 문제부터 문맹퇴치와 같은 문화적인 문제까지 광범위한 젠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회자되는 공산주의의 중요 성공 사례이자 소련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구가 언제 해체되었을까요? 1929년입니다. 고작 10년을 갔어요. 해체 이유는, '여성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그렇게 이른바 백래쉬 라고 할까요, 새로운 후퇴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이딴 짓, 즉, 기껏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어이없는 의사결정이 가급적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도 그리고 적어도 나의 사회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두리뭉술한 언어, 문학적이고 현란한 수사, 거대한 추상 명사, 쉽게 정의되지 않는 이념 따위를 함부로 주워섬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성 문제는 해결되는가? 가난 문제는 해결되는가? 민주화 문제는 해결되는가? 그럼,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이곳은 '문제 없는 나라'인가? 아닙니다. 수세미의 수많은 구멍, 그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 자신의 집이고 방이라 치면, 현대의 모든 혜택과 축복이 그 집을 구석구석 밝고 따듯하게 비추어 주는데 성공할 때까지, 마지막 한 명의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때까지, '사회 문제'는 사라지지 않아요. 이념 같은 모호한 관념의 덩어리도 그 수세미 구멍 안으로 파고들지 못합니다. 모든 관념 덩어리를 해체하고 모든 구겨서 던지는 개념의 종이를 펴서 거기에 적힌 한 자 한 자의 실제 세상에 대한 예측, 기술, 기록, 제안이 낱낱이 합리적인지 점검하고 열린 사회에서 토론하여야만 우리는 '말'을 세상을 확실히 더 좋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모호하고 거짓된 말에 저항하며, 우리가 진리를 획득하는 유일한 방식인 의심하는 태도 · 과학적 사고방식 · 통계적 방법론의 생활화를 자다가도 잠꼬대로 할 정도로 집요하게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추상 명사를 너무 쉽게 말하지 마세요. 세상의 복잡다단함은 추상화로 결코 덮일 수 없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세요. 안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명예로운 것이 모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려우면 두렵다고,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화 나면 화 난다고 말하세요. 감정을 말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보다 명예로운 행동입니다. 게다가 아주 중요한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 자신이나 다른 인간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대부분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바,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은 인간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며, 인간이 직감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알려주는 중요한 알람과 같습니다. 감정과 느낌을 결코 멸시하지 말고 귀 기울이세요. 감정과 느낌이야말로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공론장에서 의견을 나누고 의견 차이를 좁히고 합의사항을 만들어 나갈 때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쉽고 세세하게 말하세요. 그래야 우리가 서로 다른 몸을 갖고 살아가는 한계를 극복하여 적절히 협력하고 협동할 수 있습니다. 더욱 확실한 앎을 추구하고 더욱 확실하게 소통해서, 공동의 이익을 만들어 봅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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