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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Dec 05. 2020

찬장을 쓸어버리며

나루시선, 19

찬장을 쓸어버리며


                                        서나루




명언 모으기를 좋아했다. 인생살이의 복잡한 것들을

압축해 간직하면 어른이 된 것 같았고

선인들의 지혜가 내 것인 듯 했다. 나는 그것을 출력해서

부적처럼 붙여 놓았다. 민주주의를 해명하는 데 평생을 바친 

내 스승은 젊은 시절 독일의 책상에 앉아 인신매매 당하는

한국 젊은 여성들의 소식을 접하고 한아름의 책상에 앉아

이를 갈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내가 이따위 세상을 모두 갈아 버리리라

내가 가진 펜으로 갈아 버리리라. 나는 그것도 유리병에 담아

마음의 예쁜 찬장에 올려놓았던 적이 있었다. 명언을 콜렉션하는


어느 새벽 우연히 2011년 3월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동아일보

50대 악마가 5년간 성폭행한 사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아니 상상할 수 없는 창의력으로. 회칼로 협박하고 영상을 찍고

어머니라는 아킬레스건을 잡고 살해를 시도하고 1년간 200회가 넘는

1심 15년. 2심 판사는 상습강간을 무죄로 판결하고 전자발찌를 기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강간으로 볼만큼 반항할 수 없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였다고 볼 수 없고

...

A씨가 보낸 70~80통에 이르는 편지는 윤씨의 협박에 의해 억지로 쓴 허위 내용의 편지라고 보기 어렵
 ...

A씨의 대학성적(4.5 만점에 4.33)과 토익점수(920점), 회계실무사 2급 등 소지한 자격증,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격 등도 판단의 근

...

A씨가 수년간 신고도 하지 못한 채 계속 강간당할 정도로 지적 능력이 낮거나 사회성이 뒤떨어진다고 보이지 않

...

녹취록을 보면 윤씨의 폭언이나 폭력 앞에서도 A씨는 반말하면서 상당히 당차게 대들었음을 알 수 있
 ...

수년간 계속해 강간을 당해왔다면 적어도 윤씨가 교도소에 수감됐을 당시 윤씨를 고소할 수 있었을

...

A씨 정도의 지적, 사회적 수준을 갖춘 사람의 경우 출소하기 전에 고소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

3심 자료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원하는 대로

하루종일 경찰서에 있을 수 있고, 총도 가질 수 있는 경찰이 되었을까

몇 건씩 쏟아지는 살해 기사와 이 질긴 악마의 사건 중에 무엇이 더 나쁠까

다른 종류의 극악무도한 악

나는 찬장을 다 쓸어버렸다. 


망할 펜잡이의 운명은, 검사가 되지도 악마가 만든 다른 악마를 잡으러다니는

경찰 군인이 되지도 못하고, 멋있는 총잡이나 영화 속의 슈퍼 히어로처럼

하나의 악마에 하나의 보복이 있지도 못하고 까보면

악마들을 위해 준비된 사형제나 반대하고 가부장제라는 그림자 없는 적*과 허우적대는 일이

더러운 펜잡이의 운명이지만


내 손에도 공이가 젖혀진 꼭 맞는 권총처럼 두꺼운 펜이 쥐어질 수 있을까**

이 눈물들과 이제는 주인을 잃은 피와 살점들을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정말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정말 누군가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게 남은 시간이 충분할까


아무에게도 화낼 시간이 없다


다짐은 줄여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다시쓰고 고쳐쓰고

다짐은 몇 마디에 줄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고통이 담겨 있다

이 시를 끝낼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 김수영, <하…… 그림자가 없다>

** 셰이머스 히니, <땅파기> (류시화 역)

Photo by Valentin Salj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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