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친부살해를 넘어 자유와 창조로

'여성주의 그 자체'와 '여성성 그 자체'의 공존 딜레마

by 나루
'여성주의 그 자체'와 '여성성 그 자체'의 공존 딜레마




들어가며


나는 대중매체의 생산자들이 보여주는 페미니즘적 표현이 단지 성별 그 자체에 집중된 서사나 표현에 갇히지 않기를 바라 왔다. 달리 말해, 페미니즘적 시도가 여성성이라는 재현과 남성성에 대한 전복으로부터 벗어나서 페미니즘이 겨냥하는 가치와 자유 그 자체로 나아갔으면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여성주의와 여성성의 미묘한 관계


오늘날 페미니즘과 대중예술이 결합된 작품들은 - 인류 역사에 등장할 타이밍이 1,000,000년정도 늦은 감이 있어 비감하지만 - 그럼에도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침묵하는 미디어의 수용자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 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대중예술에서 '페미니즘 그 자체'와 '여성성 그 자체'가 혼합되어서 표현되고, 또 다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Ariana Grande의 God is a woman이다. (공식 뮤직비디오)


God is a woman이 얼마나 큰 관심을 받았는지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노래는 우리 모두에게 젠더적 영상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다. 크리스천은 기절했을 것이고 무슬림은 쇼크사했을 것이다. (아직 Grande 때문에 사망한 무슬림이 보도되지 않은 것을 보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튜브를 꼼꼼히 차단한 듯하다) 수많은 블로거들, 특히 페미니즘을 '계속 뒤통수에 쥐고 있는' 음악 블로거들이 이 곡을 리뷰했다. 물론 God is a woman이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헌사라든지 주체성의 주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가사는 중의적으로 쓰여졌고, 어떻게 보면 남성에게 섹스를 통해 숭배받는다고 보여질 여지까지 있다.


헌데 가사는 또 그렇지마는, 다른 한편으로 Adobe After Effects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뛰어난 이 뮤직비디오는 그래픽아트를 통해 명백하게 신이 여성이며 거꾸로 말해 여성성이 신의 권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단지 그러한 몽상적이고 신화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정말로 명백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Ariana Grande에게 (그리고 그가 상징적으로 대리하는 여성 자매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한심한 남성들을 내려다보고, '나의 자매들을 해치고 파괴한' 남성성을 향해 심판의 망치를 투척하는 장면들은,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이 행동하는 남성들에게 밤낮으로 틀어줘야 할 계몽의 은총이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마음 한 켠에 걸리는 것이 있다. 나는 여전히 여성주의와 여성성이 별개의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에서 여성주의는 여성성 그 자체에 의해서 계속해서 간섭받고 제약받는다고 생각한다. 즉, 여성주의(나는 통상 '페미니즘'으로 표기하지만 여성성이라는 단어와의 대조를 위해 잠시 이렇게 쓴다) 과 여성성 그 자체는 별개일 뿐만 아니라 경합적인 관계에 있다는 주장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여성성이 그 쌍둥이인 남성성과의 대조를 통하여서만 다루어지고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여성성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서 갑자기 Ariana Grande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섹스와 젠더 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니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섹스와 젠더에 관한 논의들: 아예 악랄하거나, 너무 나갔거나


여성성은 젠더이다. 젠더는 자아의 일부이며 구체적인 행동이자 사회의 문화이기도 하다. 젠더란 성에 관련해서 우리가 영향받은 모든 요소들이 담겨 있는 한 그릇의 매운탕과도 같다. 그러나 그 핵심적 기원은 분명하다. 매운탕이 본질적으로 바다에서 왔듯, 마음의 실체가 두뇌에 있고 행동의 기반이 몸에 있듯, 젠더적 행동의 기반은 대체적으로 성별이 존재하는 몸으로부터 비롯한다. 왜냐하면 성별을 가진 몸이 주로 이성을 구하기 위하여 고등 집행 기관(우리가 뇌라고 부르는)에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갈망이, 어떤 것이든 심지어 일상화된 몸단장에 불과할지라도 성행동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젠더가 형성되기까지의 경로의존성을 역추적하면 결국 생물학적 두 성이 존재할 것은 자명하다.


물론 꼭 짚고 넘어갈 논의가 있다. 이론페미니즘의 살아있는 전설인 Judith Butler의 등장 이후로, 요즘 많은 제3물결 페미니즘 논자들이 생물학적 성별은 단지 둘이 아니라 스펙트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윤리적 생각을 옹호하고 특정한 특수사례들을 단지 장애로 인정하기보다는 보편적인 성별의 지평에 편입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통계적으로 너무나 유의한 것에 대하여 실재라고 인정하기로 하고 또한 그것을 그러하게 분류할 때 인간에게 절대적인 편의를 가져다줄 때 세우기로 한 분류 체계에 대한 과학적 합의' 자체를 왜곡하는 무리한 접근에 가깝다.


생물학적 성으로서, 암컷과 수컷은 물론 존재한다. 그것이 인간의 전인격에 있어서 절대적이지 않을 뿐이고 경우에 따라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을 뿐이다. 그 생물학적 토대가 우리에게 퍼붓는 명백한 갈망들과 경로의존성이 존재한다. 문화로서의 젠더는 성별으로서 섹스라는 기원이 제공하는 갈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우리의 언어가 Broca Area와 Wernicke Area에서 나왔고, 우리의 시야가 Visual Cortex로부터 나온 것처럼, 우리의 젠더를 구성하는 구체적 행위들의 근원에는 주로 마음에 드는 짝 꼬시기와 성행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뒤 꽉 막혀가지곤 '동성애는 질병입니다' '젠더는 거짓말입니다' '성평등이 아니라 양.성. 평.등. 이라고 해야죠!' 라고 지껄이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참을성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기독교인들이나 TERF(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스트)같은 괘씸한 원숭이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단지 기독교인들처럼 우리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 오직 영혼이라고 주장하거나, TERF처럼 우리 인간이 어떤 영혼적 자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오직 몸의 기계성에 종속된 깡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단백질로 이루어진 기계가 맞다. 그 기계로부터 우리 마음과 행동이 나오지만 스스로의 기계됨이 자신의 전인격을 모두 결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몸과 인격은 그저 영향을 주고받을 뿐이다. 나는 단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과 행동을 알기 위해서는 그 기계가 어떻게 생겼고 대체적으로 어떻게 나누어져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 기계는 거의 모든 사례에서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성별의 토대는 우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전통과 결합하여 인간에게 특정한 행동을 촉발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대의 문화로 자리매김한다. 그것이 젠더이다. 몸으로부터의 '(주로) 이성을 꼬시라는 충동'과, 사회로부터의 '집단에 순응했다는 것을 과시하고 이성도 꼬시려면 남녀가 각각 이러저러하게 하라는 강압'이, 젠더라는 수행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Judith Butler의 논의들은 대체로 타당하다. Butler의 '젠더는 패러디다'라는 선언은, 문화의 강압과 개인의 창조와 창발이라는 두 요소를 통합한 대단히 훌륭한 통찰이다. 나는 여기에 실용주의자의 자격으로 한 마디를 꼭 덧붙이고 싶다. '그래도 그 무대는 여전히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두 성별로 나뉘어 있으며, 그 거대한 양분(兩分)이 초래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잊지 말 것'.



거대한 양분(兩分)이 초래하는 일


여성성이 젠더에서 나왔고, 젠더가 섹스에서 초래되었으며(나는 그것이 단순히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결과적으로 볼 때 우리가 '젠더'라고 부르는 거대한 문화적 양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뿐이다), 섹스가 거의 모든 경우에 양분되어 있기 때문에 젠더도 대체로 양분되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젠더는 반드시 그 의미에 있어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필연적으로 소환한다' 고 할 수 있다. 여성성은 남성성과의 대조를 통하여서만 그 의미가 파악되기 때문에, 여성성을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는 것은 남성성을 의식하고 하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라고 말할 때 그것이 여자임을 어떻게 아는가? 남자가 아님으로써 여자다. 반대로 '남자'라고 말할 때도 여자가 아니니까 남자다. (물론 거듭 말하건대 최근 들어 퀴어 문화가 재발견되고 유니섹스 혹은 탈젠더적인 시도가 나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대한 양분'의 세계 아래에서, 인간의 두 성별이 문화와 역사에 끼치는 영향은 여전히 절대적이며 나는 지금 그것에 대하여 다루고 있음을 일러 둔다.)


자 그렇다면, Grande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페미니즘을 여성성 그 자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상당한 아쉬움을 남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성성은 결코 남성성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성을 상관쓰지 않는 여성 서사 또는 페미니즘 서사가 좀 필요해 보인다. 여성성을 의식하다 보니까, 여성성에 가해진 어떤 남성중심적(혹은 '보편적') 시선들을 단지 뒤집기 위해 특정한 기호와 낙인을 괴물화시켜서 왕관처럼 뒤집어쓰는 쇼를 보이게 된다.


역사적으로 여성성 그리고 구체적인 여성 개인들은 공격받고 낙인찍히고 괴물화되었는다.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모든 영광은 남성의 차지였다. 심지어 상상 속의 모든 좋은 것조차 남성이었다. 예컨대 제우스도 남성이었고 야훼도 남성이었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들은 그것을 뒤집어서 일종의 대항표현으로 만들기 위하여 일종의 '화난 여성상' 또는 '괴물 여성상'을 만들어내었다. Grande의 경우에는 심지어 '신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내가 알기로 '어머니 하나님' 드립치는 기독교 소종파 녀석들을 제외하면 세계 최초다) 그렇게 표현된 여성들은, 실제 역사 속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과 여성들에 대하여 보았던 괴물적인 시선들을 똑같이 돌려주곤 한다. 칼로 찌르고, 방망이로 때리고, 이런저런 반사회적 표현으로 악랄함을 과시하고,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거리낌 없이 공격성을 드러낸다.


몇가지 예를 들면, Winona Oak - SHE (공식 뮤직비디오)이나 Psycho - Mia Rodriguez (공식 뮤직비디오) 전 세계를 대혼란에 빠트렸던 Cardi B - WAP(공식 뮤직비디오)가 있다. 세 작품 모두에서 여성성은 특별히 미친 사람이거나, 괴물이나 마녀로 분장하거나, 아니면 가슴이나 엉덩이와 같은 여성성의 상징들이 터무니없이 극대화된다.



페미니즘은 성별으로부터 벗어날 때 가장 유리하다.


나는 이러한 작품 시도들이, 지배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을 해체하거나 대체하려는 페미니즘적 의도를 가졌다고 한다면 혹은 비평 단계에서 그러한 의미를 추출해낸다고 한다면, 여전히 상당한 아쉬움을 남기는 작품이라고 평할 수밖에 없다. 여성성의 극대화나 괴물화는 남성성을 부정하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이 적대하고 자신을 적대하는 어떤 적수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것과 반대로 '행동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의 표현 양식이 단지 가부장제의 안티테제를 되풀이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안티테제는 테제를 의식하고 그 시선을 단지 뒤집을 수밖에 없다. 안티테제는 테제가 내뱉은 욕설을 목적어만 바꿔서 되돌려줄 수밖에 없다. 안티테제는 제시된 스테레오타입 안에 닻을 내린 채로 반항적 상상력을 펼칠 수밖에 없다. 미러링의 이미지는 원본의 실재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호명에 대한 응답이지, 호명의 소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은 다르다. 페미니즘은 사상이고, 여성성은 주로 시각적 표현의 재현이다. 표현의 원본은 생활에 있다. 현실 생활 속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고 분류되는 문화적 편향들이 존재하고, 또한 그 편향을 핑계삼거나 깃발삼아서 자행되는 젠더 폭력들이 존재한다. 그 젠더 폭력을 꺾기 위해서는, 그리고 생활에서 되풀이되는 강박적 젠더 문화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젠더가 더 나은지 다투는 것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페미니즘을 성취하기 위하여서는 궁극적으로는 젠더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물론 어느 젠더가 특정한 젠더적인 상황에서 공격받거나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 특정한 사람을 지원하고 회복케 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것까지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묻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실제 인간들의 희노애락에서 발견하고 선언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갑자기 남성성이 낄 필요는 없다. 왜 갑자기 남성성이 끼냐고? 여성성이 부각되니까 그 쌍둥이인 남성성이 당연히 딸려오는 것이다. 생활을 재구성하고 재현하여 공식적 상징으로 삼는 미디어에 있어서, 여성성은 남성성의 부정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대단한 페미니즘 기획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감각적 재료로 여성성을 쓰는 한, 한계는 즉각적으로 구성된다. 마치 우리가 왼쪽 양말을 보고 오른쪽 양말을 즉각적으로 떠올리듯이, 여성성을 아무리 새롭게 정의하고 재현한다고 해도, 남성성이라는 '반드시 호명되는 쌍둥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성별은, 성별로부터의 해방에 있어서 강조할수록 손해이다. 남성성이 여성성에 대하여 그러하듯이 여성성도 인식되는 자에게 남성성의 쌍둥이고, 그렇게 성별이분법 안에 머무르게 되고, 그래서 아무리 여성성을 갖고 새로운 시도를 해 봐야 여성성 그 자체의 클리셰에 머무르게 되어, 종국에는 지루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외국 사례들을 주로 들었으니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한 K-POP을 사례로 들어 보자. 나는 다음 두 작품을 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SUNMI - Siren (공식 뮤직비디오)과 SUNMI - Heroine (공식 뮤직비디오). 선미는 훌륭한 가수이고, 선미의 뮤직비디오들이 기술적으로 한국 뮤직비디오 스타일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단히 탁월한 전범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 '떠난 남자를 그리워하고 처벌하려 하고 양가감정을 느끼면서 미쳐간다는 서사'에서 벗어나지를 못함으로써 상당한 미학적 한계를 갖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이른바 '미친년 클리셰'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이 클리셰가 정말로 한국 특유의 전통적 여성혐오관인 '미친년'개념을 정말 똑같이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에 매여서, 남자에 홀려서, 남자 때문에…… 결국 미쳐버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개념은 한국에도 이처럼 살아있는 것이다.


자, 이렇게 우리가 짚어본 몇 개의 작품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여성성을 그것도 남성성을 의식한 방식으로 재현함으로써, 진정한 자급자족의 주체가 되거나 폭압적인 남성주체라는 타자를 성공적으로 제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이 두 과정; 젠더-섹스-섹스어필의 반복에서 벗어나 자신을 그 자체의 전인격으로 드높이는 동시에, 폭압적 남성주체를 애써 죽이는 대신 단지 잊어버리고 슬며시 새 버전으로 대체하는 시도는 대표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한 가지 꼽고 싶은 것은, Tiësto&Mabel - God Is A Dancer (공식 가사 뮤직비디오)이다. 신이, 춤을 춘다는 것이다. 신이 흰수염난 할배인 것도 아니고 번개를 내리꽂는 것도 아니고 그저 춤을 준다는 것이다. 가사도 그냥 춤 추는 내용이다. 이게 대체 머선 일이고? 가사를 읽어봐도 온통 춤 추는 내용이다. 신이 댄서이고, 같이 열심히 스텝을 밟으면서 몸을 흔들고 자신을 모조리 쏟아내고 관객을 열광하게 하자는 내용이다. 이게 무슨 어이없는 소리인가 싶지만 이것이 해방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God Is A Woman과 God Is A Dancer의 중간에 있는 게 Maggie Lindemann - Pretty Girl (공식 뮤직비디오)이다. 이것을 나는 '세속적 페미니스트'의 전범이라고 하고 싶다. Lindemann은 분명하게 자신의 여성성과 그것을 보는 세간의 시선 - 그 시선은 주로 남성중심적이며 빈번히 여성혐오적일 것이다 - 에 대하여 언급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남성성에 대하여 자신의 여성성을 우뚝세우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가끔은 보여 주기 힘들 때가 있어, 루머 속의 내가 전부는 아냐'라고 말하면서 그 싸움터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간다. 그는 자신의 한 파편에 불과한 여성성과 자신의 전체 생활과 전인격이라는 깊고 끝없는 바다의 대비를 통하여, 남성성과의 대립 양상을 전투가 아니라 자기 전인격의 존재를 선언하는 훨씬 고차원적인 행위로 승화시켰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자면 Lizzo - Juice (공식 뮤직비디오, 훌륭한 번역 뮤직비디오)를 꼽을 수 있다. Lizzo는 자신의 여성성을 단지 위협이나 대립물이 아니라 자체 발광하는 쩔어주는 매력 덩어리로 표현한다. 이것은 물론, 가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신에게 흘러넘치는 매력(Juice)이 불특정 이성애자 남성을 목매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남성성과의 본질적 연결이 유지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그는 그러한 자신의 매력 넘치는 여성성을 자신의 드높은 자존감으로 통합해낸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Lizzo는 결코 노력하지 않는다. 미치려고 노력하지 않고, 복수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유혹하지도 파괴하지도 않고, 남성에 대한 별 노력 자체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본질적으로 그냥 '잘났고' 그 잘남을 자기 스스로 음미하고 그것에 만족한다. 그에게 여성성이란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자아를 충족하는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Lizzo는 그렇게 남성성과 여성성의 싸움터를 뛰어넘어 자존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친부살해 신화에 숨겨진 생활에 대한 은유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멈추기보다는, 이러한 적대적 관계에 숨어 있는, 인간이 자신의 적과 어떻게 관계맺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다. 물론 나는 이것을 '무의식'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데, 그것은 무의식을 쉽게 조작적으로 정의내리기는 힘들고 의견도 분분하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이것을 '버릇'이라고 부르고 싶다. 싸움의 버릇. 자신의 적과 맞서는 우리 많은 인간들의 버릇에 관해서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이 '버릇'을 가장 먼저 비교적 정확하게 짚어낸 사람들은 그리스와 로마 전통에 영향받은 유럽인들이다. 유럽인들은 수많은 신화와 창작물에서 이것에 대해 암시했다. 우라노스, 크로노스, 제우스, 외디푸스, 다스 베이더 그리고 스타로드를 통해서 이 버릇에 대하여 이름붙였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친부 살해'. 즉 Patricide이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단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신화가 하나의 은유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신화는 특히 인간과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확장된 비유인 '가정(family)'에 대하여 또다시 확장된 은유이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우리는 각자가 겪는 인간관계를 가족 관계에 빗대어 말하는 습관이 있다. '가족 같은', '남매 같은', '할머니 같은', '엄마 같은' 등의 표현은 우리가 흔하게 사용한다. 그런데 신화 역시 이 가족 관계를 확장한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가족들 집안 싸움 하는 이야기다. 제우스가 바람나면 헤라가 잡으러 오는 식이다. 아브라함계 종교의 신화에서도 '경륜하시는 하나님' 개념은 굉장히 중요하다. 여기서 경륜한다는 것은 집(특히 가정)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경륜의 원어인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 oikonomia)라는 어원에 이것이 잘 드러난다. 고대 그리스어 oikos는 집을 뜻하고, nomia는 '관리하다'라는 뜻이다. (출처 1, 출처 2, 출처3) 즉, 집을 관리하고 가정을 통치한다는 뜻인데, 기독교에서 오이코노미아란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가정인 우주와 백성들을 통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대인관계라는 원본 체험이 먼저 있고, 이 체험은 대부분 사람이 쉽게 참조할 수 있는 가족에 빗대어서 삶 속에서 다루어지다가, 이 가족의 비유는 다시 신화적 은유로 확장되는 것이다. 신화라는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각자가 겪은 대인관계 체험의 특정한 보편적인 면모 - 예를 들면 질투, 의심, 미움, 용서 - 와 같은 요소들은 인격과 이야기가 입혀져 추상화되고, 추상화됨으로써 비로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교훈과 비유의 이야기보따리가 된다.



친부 살해 신화의 실체


'친부 살해' 신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화 단계에서 그 대상이 제우스이기는 하지만, 제우스의 인격을 고려하건대 그것은 권위와 지배이다. 또다른 신화인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에게 그 증오의 대상이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오이디푸스가 왜 아버지를 미워하고, 이 세상의 전형적인 아버지들이 왜 우리가 '아버지같다' 라고 특정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는지 고려하건대 그 본질은 권위이며, 오이디푸스가 왜 아버지를 죽였고 현실에서 사람들이 왜 통상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아버지같음'을 규탄하는지를 고려하건대 그 권위의 실제 모습은 폭압이다.


그러므로, 실제 우리 각자의 아버지가 어떻든 간에, 비유와 신화의 층위에서, 아버지는 그저 인격화된 권위와 폭압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 슬픔이, 소심이, 버럭이, 까칠이가 인격화되어있지만 사실 그 원본은 우리가 체험하는 감정일 뿐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친부 살해 신화와 친부 살해 전통이라는 것은, 사실 별 게 아니라, '마치 가부장적인 아버지처럼' 나를 지배하고 훈육하고 규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길러내고 성장시킨 어떤 권위 또는 권위자, 그리고 그것와 맺었던 과거의 관계를 끊어내는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친부 살해는, 성숙한 방식으로 잘 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 가장 비극적인 신화가 바로, 프로이트가 주로 경고했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은유임을 고려할 때, 그것은 마치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하던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크게 싸우며 자랐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그 부모님과 부모님과 똑같은 수준에 똑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이 된' 비극적인 실제 사례들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이러한 신화적인 언어를 계속 차용하여 말하자면, 페미니즘이 자신의 '친부'를 살해할 때는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친부 살해는, 그 자체로 저주가 걸려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너의 과거, 너의 적수, 너의 원수로부터 벗어나라


'친부 살해'는 근본적으로 폭력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남성성이라는 친부를 죽이려 들 때, 그것은 수행하는 자에게 남성성에 대한 전투적 의식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전투적 의식 혹은 경쟁적 의식 또는 적대적 의식이 그것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남자-여자 관계라고 해서 반드시 화해하고 잘 지내야 한다는 안티페미니즘 서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여야 할 정신은 죽여야 하며, 그것이 아무리 삐까뻔쩍하게 정당화되는 거대한 질서일지라도, 5000억원을 들여 지은 안동시의 자아랑거리 '유교 랜드'에 묻힌 등신 같은 철지난 여성혐오 제삿상 차리기 종교일지라도 그렇다. 아버지를 부정하며 성장해 온 서양 정신이 그리하였듯, 우리 역시 죽여야 할 아버지를 죽여야 하니까.


그러나, 진짜 문제는 우리 각자의 라이오스(외디푸스의 아버지)가 칼에 찔려 죽으며 내뱉은 저주의 말 따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라이오스 따위를 인생의 문제로 삼아서 부담스러운 친부살해까지 감행하는 우리 각자의 상상력 부족에서 온다. 아버지를 의식할 때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서양 홀로주체성 정신의 핵심적인 성과는 친부살해였지만, 핵심적인 실책도 친부살해이다. 그래서 죄책감이 생기고, 그래서 아버지와의 마음 속 대결이 평생 지속되고, 아버지의 테제들이 신경쓰이고, 그 테제들을 곱씹고 곱씹다 그 안의 일말의 합리성을 발견하고, 그 합리성이 새롭게 느껴지는 한편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회한과 뒤섞여 발효되고 적대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용서되더니 종국엔 아버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게 되고 그렇게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건 천하의 추한 짓이다. 친부는 살해하는 것이 아니다. 친부는 유기하는 것이다.


친부살해의 전통은 친부유기의 전통으로 바뀌어야 한다. 연락을 끊고 알아서 굶어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것은 미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왜 안티테제의 검을 세우는가? 테제를 굶어죽도록 놔두라. 친부가 싫어서 떠났으면 질척대지 말고 자기의 길을 가라. 나를 해친 권위존재에게 아득바득 이를 갈고 괜히 다시 찾아가서 죽이는 것은, 친부의 부도덕한 내용에 분노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친부의 권력에 상처입은 것이고 동시에 질투한 것이다. (다시 강조하겠지만 여기서 우리가 '친부살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인간 행동의 상징에 불과하다.)



친부살해는 증오를 키우고 약자를 짓밟을 뿐


우리는 우리를 해친 진짜 그 친부 본인을 살해할 수는 없다. 예컨대, 한국인들이 이념 대전쟁의 대리전에 희생되었다고 할지라도, 소련 그 자체와 미제 그 자체를 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대속 희생양을 친부인셈치고 죽이는 것이다. 백범 김구가 일본인 상인을 살해하고, 2차대전 전후 프랑스 남성들이 독일군과 사귀었던 프랑스 여성들을 조리돌림하고, 독일에 진군한 소련군이 독일 여성을 성폭행한 것과 같다. 우리는 정작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그 '개새끼' 자체를 추격해서 정말 실제로 죽여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히틀러를 죽인 연합군은 아무도 없다. 히틀러는 스스로를 죽였다. 히로히토 천황을 죽인 조선인은 아무도 없다. 히로히토 천황은 늙어서 죽었다. 조선인도 연합군도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희생되었었기에 새 희생양을 찾았다. 그들이 한때 희생당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파괴된 지위를 - 옛 아버지의 수준으로 - 복구하기 위해, 아버지를 처벌하지 못한다면 아버지의 상징적 대리물이라도 처벌하기 위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새로운 처벌 규정들을 만들고 새로운 죄인들을 구속한다. 소련이 미국을 죽이지 못해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잡아죽였듯이. 남한 군부가 북한 군부를 죽이지 못해서 민간인을 학살하였듯이. 한국 운동권이 자본주의를 죽이지 못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잡아족치듯이…. 상징적인 층위에서의 친부살해는, 현실 세계에서는 새로운 희생양의 심장을 뽑을 뿐이다.


이런 방식은 현재에도 드러난다. 일상 생활에서는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수많은 갑질과 폭언들이 있다. 더 상징적이고 문제적인 사례를 들자면, 바로 TERF와 같은 일군의 반사회적 독단주의자들이 벌이는 가짜 왕좌 만들기 프로젝트다. TERF는 자신들이 여성으로서 가부장주의자들에게 낙인찍히고 위협당하고 위협이라고 불리고 모함당하고 공격당한 바로 그 행위를,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게이와 트랜스젠더라는 희생양에게 퍼붓는다. 그러한 공격을 정작 '친부'에 가장 가까운 실제 가부장주의자에게 되돌려주지는 못한다. 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 예를 들어 실제 가부장주의자들은 공기처럼 어디에나 실제 인간으로 살아있기에, 정말로 칼로 찔러서 감옥에 가거나 매일매일을 키보드배틀로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인간은 상징으로도 만족하는 존재다. 매일을 기도로 허송세월하는 종교인들을 보라. 때때로 인간은 상징으로 물질을 움직일수도, 물질로 상징을 움직일수도 있다 보니, 현실감각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상징을 계속 움직이고 상징으로 보복하면 그 보복이 수행된 것으로 믿는다. 마치, TERF가 권력도 없고 자원도 없이 극소수에 불과한 트랜스젠더를 물고 늘어지듯이.


그들은 '친부'와 좌표평면에서 수평적으로 정반대다. 예컨대 남성성이 오른쪽 끝에 있을 때 그들은 왼쪽 끝으로 최대한 바짝 붙여 앉는다. 그러나 그들은 '친부'와 수직적으로 동일한 높이에 있으려 노력한다. 동일한 종류의 권좌에 앉으려 노력한다. 그래서 기존의 '남근'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보지'가 들어간다. 돈 벌고 표 받아서 세상을 지배하자는 계획은 가부장제와 아예 똑같다. 그들은 가부장주의를 놓아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가부장제를 아득바득 쫓아가서 타격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실제로 그 보복이 애꿏은 성소수자에게 향할수록, 가부장제의 달콤한 합리성의 체험은 그들의 나약함을 파고든다. 나도 지배자가 된다면? 나도 만만한 희생양을 잡아족친다면? 내가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준다면…(대신 만만한 놈에게)? TERF들이 성소수자를 두들겨패면 팰수록, 자신들만의 프라이빗한 이너 서클에서 웃고 떠들수록, 그들은 가부장주의의 본질에 잠식당하는 것이다. '친부'의 본질에 잠식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남 애비충'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자꾸 의식할수록 지배당하리라, 자유로우면 해방되리라


의식하면 지배당하리라. 가부장제가 가장 깊숙히 지배하는 것은 이른바 '남자 못 잃는 한녀'들이 아니다. 문화주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제의 부역자라고 그토록 폭언을 퍼붓는 '한녀'들은 살다 보면 남자가 있을수도 없을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가부장제는 적당히 나쁘다고 생각하는 적당히 양심적인 사람들이다. 오히려 가부장제가 가장 깊숙히 지배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제가 가진 달콤한 힘의 권좌에 오르기를 갈망하는, 그리고 오염강박이라는 방식으로 남성성을 머릿속에 꽉 움켜쥐고 살아가는… 래디컬 페미니즘이다.


그러나 이렇게 돌고 돌아 자신이 쓰러트리려고 했던 그 대상과 융착해 버린 존재들이 이른바 '랟팸' 뿐이겠는가? 6월항쟁과 789노동자대투쟁에서 군사독재라는 '친부'를 무너뜨리고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져왔던 한반도와 민족의 영웅 586 세대의 후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이제 한반도 위에 군림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한 때 민주화 운동가들의 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원들은 누구를 위해서 의결하는가? 그들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아버지가 되고 보호자가 되었다. 그들이 사회적 약자를 다시 주체로 세우지 않고, 인권 선언과 헌법에 따른 제 몫을 주지 않고, 늦게 온 자에게도 1데나리온을 주지 않고, 그저 약자로 만들어서 보호하려고 할 때…, 그렇게 강제로 '아들'로 주저앉은 사람들은, 그들의 '친부'를 살해하기 위해 칼을 갈 것이다.


서양 전통에서 발달한 신화적 서사의 여러 남성성 페르소나 ; 제우스, 오이디푸스, 프로이트, 다스 베이더(와 그의 아들) 그리고 스타 로드는, 가장 가부장적인 방식으로 가부장제를 어떻게 무너트려야 하는지 보여준 존재들이다. 친부 살해는 무조건 손해보는 장사다. 아버지가 좋지 않게 군다면, 결코 아버지와 맞서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아버지를 버려야 한다. 아버지를 찌르는 순간 아버지는 떨쳐버릴 수 없는 전설이 된다. 그 전설과 평생을 살다가 종국에 아버지는 '내'가 된다.


스타크래프트2 : 자유의 날개에서 독재자 멩스크는 촌뜨기 보안관에 불과한 저항군 지도자 짐 레이너를 죽이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레이너를 자치령 유령으로 천 번도 넘게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는 짐 레이너가 죽으면 저항운동의 전설이 되어 반란에 기름부을 것을 알았다. 멩스크에게는 자유와 양심의 상징인 짐 레이너가 자신의 '친부'였던 것이다. 멩스크는 적어도 그 부분에서 현명하게 행동했다. 반대로 짐 레이너도 멩스크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멩스크는 사랑하는 애인을 외계종과 융합된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무고한 시민 수십억을 학살한 독재자이고 그러므로 '친부'이지만, 레이너는 애써 멩스크를 잊고 프로토스와 협력해 자기 나름의 가치로운 일에 몰입한다. 멩스크라는 친부살해에 집착한 것, 그리고 끝끝내 멩스크를 죽여버린 것은, 멩스크처럼 괴물이 되어버린 캐리건이었다. 그는 자신의 친부를 살해하고…. 스스로 그것이 된다.


(군단의 심장 오프닝 시네마틱)



자족적 창조를 향한 대탈출


페미니즘이 대결하는 '친부' 즉 적대적이고 폭압적인 권위자가 가부장제라면, 그리고 우리가 음악과 패션과 같은 문화적 표현을 통해서 가부장제를 쓰러트리고 새 시대의 여성적 서사를 쓰려 한다면, 그것은 가부장제를 뒤엎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부장제와 전혀 상관없는 무언가여야만 한다. 그것으로부터 탈주하면 탈주하려고 분투할수록, 그 자신의 모든 문법과 패션은 사실 가부장주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로부터 그저 자유로워야 한다. 자신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무엇이고 그 안에 악이 무엇이 있는지 골몰하지 말고, 선대가 나에게 결코 물려주지 않은 것; 나의 몸, 나의 정신, 나의 기질, 나의 상상력, 타자와의 만남, 새로운 시간이 선물하는 창발, 미래를 향한 기투들을 통해서 창조해야 한다.


친부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억압이다. 친부를 닮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나도 약자와 타자를 억압하면 된다. 그러면 그 즉시 누군가의 고통과 '친부 살해' 계획은 시작된다. 하지만 억압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의 친부도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없다. 자신의 정신과 자신의 역사를, 친부와의 대결이 아니라 자기 관찰과 자기 수용을 통해 새로 구성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고 어떤 욕구가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것이 나에게 희망과 기쁨의 눈물을 가져다주는지 지금-여기서부터 탐색하고 지금-여기에서 새 출발 해야 한다.


물론 여전히 물리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회적인 문제는 남아 있다. 우리는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여전히 그것과 분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분투하고 어떻게 싸워 이길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규합하고 조직하고 어떻게 충돌을 예비하고 힘을 행사할것인가? 어떻게 영향력을 미칠 것인가? 그 모든 것들에 자신이 살해한 그 친부의 저주받은 피가 묻어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칼은, 미래로 향하는 장막을 찢어 열기 위한 도구이다. 칼에, 자신이 살해한 친부의 피처럼 케케묵고 지저분한 것을 켤코 묻혀서는 안 된다. 우리가 과거의 세계로부터 배웠던 안 좋은 버릇들과 관습들 관행들 그리고 무의식들을 지금-여기에 버려 두고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홀가분하여야 하고, 자유하여야 하고, 또한 창조하여야 한다. 과거-현재-미래를 다루되 스스로의 새로운 건설적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잘 살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의 동력을 발견하여야 한다. 자유롭고 자족적인 창조를 향한, 우리의 '친부'와 '친부 관련한 모든 구질구질한 싸움'으로부터의 대탈출이, 모두가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새로운 페미니즘의 길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