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시대는 상처를 남기고

사건이 개인에게 트라우마를 남기듯, 시대는 세대에게 트라우마를 남긴다

by 나루

그 시절은 아름다웠나요


올해는 2021년이다. 만약에 우리가 40대나 50대 정도 되는 지인 분들께, "1980년대의 한국은 아름다웠나요?" "1990년대의 사회는 살 만한 시절이었나요?"라고 물어본다고 하자. 그분들은 그 시절에 관해서 어떻게 대답해 주실까?


내가 예상하기에, 아마 "아, 그 시절은 정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웠어요. 시장에서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었고, 사회는 안정되어 있었고 정부기관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고요 시민권은 보호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과 함께 돌이켜볼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먼 옛날들 - 가령 1980년대, 1990년대, 어쩌면 1970대 시절들을 돌아보면서 그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 선뜻 좋았다고 대답하지 못할까? MRI가 발명되기 전이라서? 서울-부산을 2시간 만에 배달해주는 KTX가 건설되기 전이라서?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어서? 아니다. 그 시절에는 그 세대가 겪었던 끔찍한 트라우마적 사건들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로 시작하는 네 자리 숫자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1970년대의 상류층 문화를 그린 드라마인 <패션 70's>를 보면 '아, 저 시절이면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이겠구나.', 1920년대 미국을 배경인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아, 저 시절이면 한국이 일본제국에게 박살이 나던 시절이겠구나.', 1960년대 홍콩이 배경인 영화 <화양연화>를 보면 '아, 저 시절이면 한국에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형당하고 있을 시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야만의 시대


나는 그 사실을 특히 한국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절감했다. 이 드라마는 2015년 큰 인기를 끌었고 그 당시에는 거의 매일같이 이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작품을 편하게 시청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는 어떤 복고 풍의 콘텐츠도 즐길 수 없었다. 가능하다면 2010년대 이전을 묘사하는 모든 미디어를 TV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것이 촌스럽거나 경박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나에게, 그리고 어쩌면 이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20세기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세계의 과거는 그 시절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위험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1988년은 군사독재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통치 시기였다. 사람들은 어이없는 이유로 잡혀가서 고문당하고 천천히 죽었다.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에, 좌익이었기 때문에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었다. 우리가 흔히 '시민의식'이라고 하는 것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고, 사회의 치안 인프라도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실종되거나 납치되어도 찾을 길이 없었다. 페미니즘이 전혀 보급이 안 되었던 시절이라 성폭력은 숨 쉬듯이 일어나는 일상이었다. 기안84라는 만화작가가 함부로 언급해서 논란이 되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이춘재 사건)도 이 시절 일어났다. 군대에 끌려간 남자들은 3년 동안 구타와 부조리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반죽음이 되어 나왔다. 군대에서 살해당하거나 사망해도 그대로 무마되는 의문사 사건이 빈번했다. 남한과 북한은 여전히 서로의 영토에 공작원을 보냈다. 사지로 밀어 넣은 사람들의 생명은 책임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선생들이 신나게 뇌물을 받았고, 열심히 학생들을 두들겨 팼다.


야만의 시대였고 서기 1988년이었다. 그 연도는 1988이라는 네 자리 코드가 되어, 순간순간마다 그 기억들을 소환하는 것이다. 그 시절의 트라우마는 한국의 훌륭한 배우인 혜리나 류준열과 같은 사람의 미모로 재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새로운 스토리텔링이나 미려한 표현도 야만 시대의 냄새를 가릴 수는 없다. 그것은 아무리 기발한 미장센을 동원해도 부당한 살인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형식은 내용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1988>이 1988년을 배경으로 가지는 한, 극의 어떤 아름다운 장면에서도, 한반도의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안기부 요원들이 사람 머리를 물에 처넣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배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잊겠는가?



추억으로 미화된 국가지옥의 생존자들


요즘 세대의 주력 청년층을 형성하고 있는 40대 · 50대 · 60대는 이 트라우마적 시대의 생존자들이다. 그 시절에서 성장하고 청년기를 보냈고, 가장 예민하고 감수성 높은 시기에 엄청난 폭력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시절이 남긴 상처들을 대부분 여전히 가지고 산다. 절대 아이를 때리지 않는 부모, 청렴하고 교육학적으로 잘 준비된 모범적인 교사 같은 것을 이 사람들은 겪어보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자신도 절대 아이를 때리지 않고 학생을 폭행하지 않고 청렴하고 합리적으로 일하지 않고 클라이언트를 위해 완전히 준비된 서비스 공급자가 되는 데에 종종 어려움을 겪곤 한다.


소위 말하는 '국가관'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국가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거의 마지막 세대다. 국가관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의 물리적 실체가 정부라고 할 때, 실체가 있는 대상에 형이상학적 용어인 관(觀)을 붙일 이유가 없다. 국가관이라는 단어는 국가주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사상을 검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이다. '당신의 국가관이 의심스럽습니다.', '당신의 국가관을 입증해보시오.'라고 하는 식이다. 우리는 결코 '경제관'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혹은 '시장관'이라고 하지 않는다. 시장이나 경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입과 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형이상학적 믿음이나 가치관이 상호작용할 대상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한다. 그들은 티타늄처럼 존재하는 실체를 본인들의 뇌만큼이나 말랑한 형이상학으로 비벼보려고 깝죽대거든.) 시장을 우리가 만든 게 아니듯, 국가도 조상들로부터 계승된 것으로서 그냥 주어져 있다. '국가'라는 어휘의 용례를 아무리 보수적으로 해석하더라도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같은 형이상학적 주권자 같은 게 아니라 시민권자와 시장 그리고 정부기관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실체라는 것은 명백하다. 실체는 실체 그 자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할 뿐 어떤 '관점' 따위 철학적 접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국가관'이라는 단어 자체가 국가주의자들이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가 사람 개개인에게 해준 것이나 책임지는 것이 1도 없어도,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는 '국가관'이라는 지엄한 환영(illusion)을 통해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공짜로 막노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국가의 실체보다 더 많은 이미지를 영사(projection)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것이다. 황국 신민이 값싸게 자폭공격해 주기를 대체 얼마를 줘야 설득할 수 있는가? 북한에 잠입해서 시설 사진을 찍어 오라고 얼마를 줘야 설득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애국'이라는 환영을 머릿속에 박아주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는 미친 거래인 것이다.


그런 식의, 국가주의자들이 강요한 미친 거래에 가장 많이 피해 입은 사람들이 이 세대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군사독재 시대에서 성장했다. 당시 정부기관의 지배자들은 사실 시민 공동체의 다른 이름인 국가를 참칭 했고, 그 자신의 존재 이유인 사람 목숨을 헐값에 좌지우지했다. 민주적 시민 공동체를 보호하는 시민군으로서의 한국군, 성과 중심의 합리적인 군사훈련 시스템,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업으로서의 정부기관 같은 것을 겪어보지 못했고 상상해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군사주의 · 군국주의는 스스로 깎아내야 할 정신의 덫과 같이 남아있다. 요즘 보복적으로 '스티븐 유'라고 불리는 유승준 씨처럼, 나라 팔아먹은 진짜 역적들에 비해 딱히 커다란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국가를 배신했기 때문에' 비난하고, 거꾸로 엄청난 잘못을 했어도 국가의 대표자라는 이유로 존중한다. 이런 수준의 사회였으니, 당연히 시민과 거류민의 인권과 헌법적 권리를 책임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복지 정부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분노는 다시, 병역거부자들과 복지 수혜자들에 대한 은근한 증오로 전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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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cs2hchoi on Daum Blog, <청룡여단 특별위문공연 실황(1971)>



생존자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들


성 인지 감수성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저 세대라면 여성인권운동가에게조차 젠더 감수성을 바라지 않는다. 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눈과 귀로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못 믿는 것이 당연하니 불만은 갖지 않겠다. 다만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세대 효과는 촘촘하다는 것을. 코호트 효과라고 해야 할까, 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세대가 가지는 효과가 개인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40대 이상 그룹의 젠더 감수성? 있으면 행운인데, 없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사람들이 살았던 세계에는 그런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예전 세대에게 새 시대의 윤리는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받아내는 것이 아니다.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억지로 흉내라도 내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어른들에게 교사, 양육자, 정부기관, 군대, 상사, 자신의 담당자를 포함한 모든 윗사람들은 부조리의 출처였다. 그들에게서 교육이나 행정 서비스를 받고, 훈련을 받고, 양육된 사람들 중 일부는 안타깝게도 거의 비슷한 사람이 됐다. 꼰대가 되었고, 혹은 침묵하는 기득권의 수호자가 되었고, 일부는 명백한 가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어른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언제나 사회의 부조리한 관습으로부터 '선한 탈주'의 승리를 가져온 사람들이 있었다. 어린 세대들이 의탁하고 존경하는 어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자신의 지성과 선한 마음 그리고 더 나은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 창조력을 가진 일부 어른들은, 폭력을 대물림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았다. 쉬운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걸었다. 이 소수의 인간들은 인류가 어떤 존재인지 자신 있게 보여주었다. 인류가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님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런 진정한 어른들도, 상처 자체에서 피해 간 것은 아니다. 상처를 극복했을지라도, 시대가 그들에게 입힌 흉터 같은 기억 자체를 지운 것은 아니다. 가장 훌륭한 어른들도, 여전히 그 옛날에 자신을 두들겨 패던 선생들과 군대에서의 체험을 상기한다.



새 천년 잿더미


그렇다면 20대와 30대는 어떤가? 우리가 자라난 환경은 어떤 곳이었나? 80년대생부터 90년대생을 아우르는 밀레니얼 세대는 새로운 천 년기에 태어나는 나름대로 큰 행운을 누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야만은 스타크래프트의 럴커처럼 잠복해 있다가, 새천년 찬가를 부르는 예스맨들의 목을 뚫었다. 우리가 맞이했던, 천 년에 한 번 오는 인류의 대축제 명절이었던 2000년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은 산업의 중심축이 재래식 실물산업에서 IT산업으로 전환되는 상징적인 해였다. 그 해 한국은 IMF에서 빌린 돈을 다 갚았고, 인터넷 관련 주식은 폭등했다. 2년 뒤면 최초로 한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이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희망적인 신호들이 많았다. 남북 교류가 가장 활발한 시기 중 하나였고, 현재 분열되었던 여러 진보정당과 좌익 정파들이 한 때 마블의 어벤저스처럼 힘을 합쳤던 민주노동당이 출범했던 해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나? 군산 대명동 성매매 여성 화재 참사가 있었다. 10대에 가출을 했다가 인신매매당해서 감금 후 강제 성매매를 당한 5명의 여성이 불타는 성매매업소에 갇혀서 죽었다. 야만의 20세기를 극복하던 2000년의 영광이, 군산 화재 참사의 사실을 덮을 수 있는가?


아니면, 자랑스러운 한일월드컵 개최의 해였던 2002년의 영광이 그것을 덮어씌울 수도 있겠는가? 2002년 서울 상도2동 철거민들은, 임시 주거시설이나 주택 입주권 보상도 없이 철거 보상금 150만 원 만을 받고 쫓겨났다.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게 된 철거민들은 망루에 올라 저항했고 경찰과 용역과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 협상은 계절이 여섯 번 바뀌고 나서야 그리고 주동자들이 모두 구속되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나? 군산 개복동 성매매 여성 화재 참사가 있었다. 사건의 모든 디테일이 대명동 참사와 똑같았다. 경찰이 포주에게 뇌물을 받고 눈감아주고 있었고, 인신매매로 감금된 상태로 성매매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었다. 이번에는 14명이 죽었다는 점이 달랐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죽은 게 아니면 사람들이 주목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산 성매매 여성 화재 참사 이후 성매매가 성매매방지특별법은 겨우 2004년이 되어서야 제정되었다. 2003년에는 미국이 이라크에 순항미사일을 퍼붓기 시작했다. 대량살상무기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전쟁 명분은 전부 거짓말이었다. 미친 독재자 하나를 죽이기 위해서 이라크의 도시를 파괴하고, 민주주의의 씨앗을 불태우고, 중동을 분노와 광기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의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이라크의 일반 시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시간이 흐르고, 네이버가 성장하고, 게임 <하프 라이프 2>와 <모던 워페어>가 출시되고, 우리가 네이버 카페와 다음 카페에서 놀고, 소녀시대와 카라가 데뷔하고, 아이폰이 출시되고, 일종의 원시 스마트폰인 연아의 햅틱 휴대폰이 출시되고, K-POP 음악이 문화산업의 첨단에 서서 점차 안정적이고 견고한 아름다움을 구축해 가던 2000년대의 첫 번째 10년 기도, 이런 트라우마들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되어, 완전한 영광으로 밀봉될 수가 없었다. 몰카 촬영물과 리벤지 포르노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그 시절에 대해 어떤 영광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 세대의 트라우마


우리는 불과 한 달 전에, 2000년대의 두 번째 10년기를 지나왔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치안과 수사기법이 보다 확충되어서 납치나 실종도 상당 부분 추적할 수 있고, 폭력이나 성폭력에 관한 법제도가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올라서던 2000년대의 두 번째 10년 기…. 우리가 감히 '현대'라고, 이것은 '현대국가의 모습입니다'라고 부르기를 기대하던 2010년대는 우리에게 약속된 현대의 영광을 가져다주었는가?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어김없이 이 시대는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우리의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로 불리는 80년대~90년대 생들과, 진짜 밀레니얼 베이비였던 00년대생들의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나는 아직도, 영화 같은 데에서 주인공과 메인 악당이 싸우다가 주인공이 악당을 물에 담가서 죽이는 장면이 나오면 흠칫 흠칫한다. 불과 며칠 전 봤던 영화도 그랬다. 벌써 몇 년이나 된 참사가 자동으로 소환된다. 그래. 우리 세월호 세대가 정신적으로 완전히 홀가분해질 수 없는 세월호의 기억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사람의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슬픔과 죄책감을 누르는 버튼이다. 개중 극히 냉정한 인간들은 '그것은 단지 사고이다.'라고 주장하며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애도의 무게를 몇 년이 지나 아직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도 그것이 사고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그 문장 뒤에 가려진 한 문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고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건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사건이었다.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의 죽음은…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나는 요즘도 영화나 웹툰 같은 창작물을 감상하는 중에 여성이 공격받거나 죽게 되는 장면을 보면 그만 몰입하지 못하고 이 현실 세계의 그와 관련된 골칫거리들에 대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나이를 먹고 뉴스에서 접한 사건들이 더 많아질수록 그 예민함은 점점 심해져서, 여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거나 소위 말하는 여성혐오적인 관점이 의심되는 묘사를 볼 때면 작품 자체에 몰입할 수 없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면 거의 모든 한국의 창작물들이 마치 페이지 곳곳에 피가 묻은 듯 즐기기가 꺼림칙해진다.


적어도 한국의 굉장히 많은 여성 관련한 모든 형태의 담론과 창작물들은, 그것이 칼럼이나 댓글처럼 현실에 대한 것이든 가상적 아이디어의 표현이든, 여성에 대한 과도한 공격성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 공격성은 양적으로 과도할 뿐만 아니라 남성에 비해 비율적으로도 과도하다. 요구 기준은 비현실적이고, 하나만 잘못해도 마치 모욕 면허가 발급된 것처럼 폭언을 퍼붓는다. 남성 그룹에 의한 여성 그룹에 대한 왜곡된 표현은 여성 그룹 자신의 자기표현을 계속 덮어씌고 차폐하고 있다. 여성의 잘못에 대한 과도하게 높은 기준과 공격성…. 멸시…. 그리고 또 공격성….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은 그 문화적 공격성과 정신증적 광기가 결합한 결과 중 하나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때문이냐, 정신증 때문이냐고 묻는 무식한 소리는 이제 그만 들렸으면 좋겠다. 정답은 '둘 다' 그리고 '둘 다를 포함한 훨씬 더 많은 이유들'이다.) 우리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나를 일순간 가상세계에서 지리멸렬한 현실세계로 불러 세우는 트라우마적 불편감 없이 미디어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가? 여성혐오적 시각과 여성에 대한 공격성이라는 하나의 세트가 우리 세대의 또 하나의 트라우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디어나 예술 작품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단지 특정한 방식으로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작품은, 표현의 총체로서의 작품 그 자체로 봐야 한다는 제1원칙 하에 근본적으로 보호받는다. 또한, 여성이라고 다 무결하고 선량하고 심지어 죽지도 않는 것은 아니다. 이기적이고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미친놈들 중에는 당연히 여성도 많다. 그러한 인간의 죄악에서 여자만 예외일 것이라고 주장이야말로 오히려 수많은 넷 페미니스트들이 보여주었던 '물구나무 선 여성혐오'인 것이다. 나 역시도 오래 인간을 상대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 뒤통수치는 쌍놈들을 결정하는 우주의 방정식에는 성별효과가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바가 있다. 그리고 물론 당연하게도, 여전히 상당수의 예술 작품에는, 상술한 모든 단서조항들을 뛰어넘어, 여전하고 명백하게 부당한 여성혐오가 존재하기도 한다.



전쟁터가 된 공론장과 정신적 피로파괴의 2020년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너무 날 선 반응이 우리 내면의 평화를 방해하고, 작품과 이야기를 그 자체로 감상하고 싶을 때에도 시시때때로 마음의 한 켠에 침습적으로 치고 들어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24시간 '참여하고 깨어있는 시민'일 수가 없다. 우리 마음에는 자유의 영역이 필요하다. 칸트가 자신의 미학에서 말했던 것처럼, 재미와 예술적 쾌감은 그 표현물이 어떤 목적도 없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공유하게 되어 버린, 시대의 트라우마 이후로, 2014년 세월호 사건 ·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 그리고 넷우익의 부상과 트럼피즘의 득세… 줄줄이 이어진 지리멸렬한 시민사회의 파열음들은 우리를 '시민사회적 전쟁터'의 한가운데로 던져놓았다. 이제 어느 웹툰을 가도 댓글은 전쟁터다. 물론 대체로 어느 편이 옳은지는 명백하다. <릭 앤 모티>나 <마블 유니버스>의 평행우주가 아무리 많아도, 여자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고 주장하는 안티-페미니즘이 옳은 평행우주는 없을 것이니까…. 그러나 누군가 옳다고 해서, 옳은 싸움이 계속된다고 해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이 시민사회적 전쟁터 속에서 이제 모든 표현물과 언어와 행동들은,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양쪽에서, '감시와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감시와 비평은 올바른 것 · 공공적인 것 · 공화적인 것 · 민주적인 것에 대한 합의도 계몽도 없이 그 외적 절차만이 전기톱처럼 고속 회전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없는 하드웨어 민주주의가 온 것이다. 혹은, 조정 없는 포격의 시대가 온 것이다. 아무도 그 사람의 실제 의중과 실제 의도 그리고 실제 구체적인 표현에 대해서 항공정찰을 하지 않는다. 어느 방면에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단지 그 한 방위를 향해 무차별로 사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방향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거기에는 자기 트라우마의 원천이 있다. 시대가 세대에게 상처 입힌 트라우마의 이미지가 자신이 보고 들은 실제 메시지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2020년 9월 18일 새벽에, 만화가 주호민 화백이 만화업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가 넷 페미니즘 진영의 엄청난 (그리고 부정확한) 포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발언의 핵심은, '본인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해서 자아성찰 없이 그리고 더 나은 비전을 보여주지도 않고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작자를 린치 하려고 하지 말라.' 정도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말에 앞서서는 '예술이라고 해서 무엇이든지 웃음거리로 만들어서는 안 되니 창작자들도 정신 차리라'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의 평이한 말들이, 기안84라는 만화가의 여성혐오 작품을 옹호하는 한남충 수준의 발언으로 해석되어 보이콧 선언을 당하게 되는 데에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이른바 '시민독재 발언'이라고 알려진 일이다. 사람들은 주호민이 말한 모든 의견들을 끝까지 다 듣고 팩트체크를 하고 나서 분노했던 것일까? 아니면 '주호민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더라'는 소문에, 이 시대가 우리 세대에게 상처 입힌 트라우마를 덮어씌운 것일까? 전자라고 하기에는 주호민의 의견이 해칠 수 있는 대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징후 : 왜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가?


사회의 거시적인 트라우마가 인간과 인간관계 역동에 미치는 굉장히 중요한 사례를 하나 더 들고 싶다. 그것은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오남용 되는 심리학 개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사이코패스'라는 말만큼이나 남용되는 것이 바로 이 '가스 라이팅'이라는 단어다. 나는 살면서 주변으로부터 굉장히 많은 가스 라이팅이라고 주장하는 사건 보고를 접했다. 공통 특징은, 주로 남자들이 자기 여자친구를 가스라이팅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여자가 남자를 가스라이팅한 경우는 내가 직접 발견해서 피해자 남성에게 '그 정도면 당신은 가스라이팅 당하는 수준입니다. 그 사람의 주장 중에서 이러저러한 사실의 증거를 확인해보세요.'라고 알려준 적은 두어 번 있지만, 그런 피해를 당했다는 남성 본인의 호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인간의 사악함이 성별에 균등하게 존재하는데, 왜 유독 남자들만 가스라이팅을 한다는 것인가? 물론 남성의 범죄율이 더 높고 대부분의 성폭력을 남성이 저지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스라이팅은 성폭행 같은 강력범죄와는 다르다. 말로 사람을 조종하는 것은 성폭행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큰 편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왜 여성의 가스라이팅 사례는 보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한 현직 변호사의 유튜브 방송을 볼 기회가 있었다. 영상의 9분 44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굉장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 같아서 옮겨 본다. 의중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서 중략하지 않고 11분 37초까지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


"제가 (이혼)상담을 하다 보면요, 남자분들은 가스라이팅 당했다는 얘기 하지 않아요. 한 번도 제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자분들은요, 거의 100이면 70~80이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말을 하세요. 왜 그럴까요? 왜 여자만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걸까요? 저는 거기에서 약간 남자와 여자의 삶에 대한 주체성이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저도 여자지만, 결혼을 하면 그 주체성이 떨어진다는 거죠. 가장이 생기니까, 남편이 있으니까, 남편한테 믿고 맡기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건 학습된 거라고 생각해요. 역할. 성 역할. 남편의 역할, 여자의 역할, 아내의 역할. 거기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지다 보니까,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이 있는 거예요. 성 역할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것에 익숙해져 있고, 내가 아무리 그걸 부인해도….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그런 교육받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성 역할에 익숙해져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거죠. 나의 그 무의식 속에. 그래서 그런 것이 발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단 한순간이라도 생각을 멈추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거를 가스라이팅 당했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내가 이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이 사람이 나를 의도적으로 가스라이팅 해서, 그렇게 됐다 라고 말을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우리 인생은 단 한순간도 나한테 달려있지 않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그것을 포기한 거죠. 뭘 포기했을까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편한 걸 추구하고, 저 사람을 믿고, 아무런 근거 없이 상대방을 믿고, 그리고 착하기만 하려는 것. 좋은 소리만 듣고 싶은 것. 그런 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가 내가 아닌 사람처럼 살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것 역시 내가 선택했다는 거예요."

- 아는 변호사 Korea Lawyer,

<가스라이팅은 선택이다 | 당신의 인생은 원래 당신에게 달렸다>,

2020-11-28, 09 : 44 ~ 11 : 37


당연히 진짜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이 없는 인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하고 조종을 시도하는 인간들도 존재한다. 그것이 신화 속에 나오는 죄악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인의 기분이 나쁘거나 의견 충돌이 있다고 해서, 본인의 원래 자존감이 낮다고 해서, 갈등을 빚는 누군가와 자신 사이에 펼쳐지는 모든 불쾌한 상호작용이 가스라이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현상은 충분히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억울한 마음이 들고 분노가 치미는 상황에서, 누구나 자신이 당한 기분 나쁜 일들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해석 결과 내 체험의 정서적 특징들은, 사회에서 만연하다고 알려진 가장 전형적인 폭력 중에서 내가 당한 유형과 가장 유사한 것을 불러오는 근거 자료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개인에게서 입은 상처도 있지만, 그 이전에, 우리 모두가 시대 그 자체에게 세대 단위로 입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특히 가스라이팅이라는 특유한 문제제기가 상징하는 여성-남성 간의 인간관계 역동을 생각할 때에는, 여성에게 가해진 일차적인 사회적 공격과 그 트라우마를 사유해야 한다. 이 사회의 모든 방향에서 가해지는 여성의 인격과 행동에 대한 무책임한 공격은 여성을 일반적으로 움츠러들게 만든다. 특히 연애관계 속에서, 적지 않은 수의 여성들이 인간관계 문제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만' 찾는 실수를 한다. 자존감은 위축되고, 상황을 더 장기적이고 다양한 기준으로 고민할 수 있게 해 주는 정신의 시야는 더 쪼그라든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마음속 한 구석에 자신의 상황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자동 조치를 실행하는 견고한 비상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그 비상장치는 이 상황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다. 남자친구는 계속 자기주장을 하고, 나는 자존감이 낮아서 갈등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고 단지 스트레스로만 다가오며,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남자친구니까 굳이 의견 충돌을 감수하지 않는다(내가 관찰하기에, 대부분 남성은 여자친구와의 의견충돌을 비교적 더 감수하고 더 주장적이다). 여성은 상대방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음은 분명히 느끼지만,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반박하거나 공격의 칼날을 세우는 대신 그냥 수용하고 참는다. 이 상황이 반복되면 기분은 더 나빠지고 무력감이 학습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지나, 쌓이는 분노를 참게 해 주었던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될까? 비상장치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간단한 대답을 준비한다. '그 새끼는 개새끼고 나는 가스라이팅 당했어.' 실제 가스라이팅의 구성요소인 상황 조작 · 비난 · 모욕 · 기억 부인 · 불신 · 거짓말과 같은 매니퓰레이팅 공격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본인은 분명히 남자친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남자친구는 항의한다. 그러나 가스라이팅은 그 비열함에 있어서 성추행보다 더한 수준으로 상대방에 대한 사회적 신임을 일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강력한 기소장이기 때문에, 그 비상장치는 주저 없이 그 개념을 사용한다.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한 번에 설명하기 위해 딱 한 사람만 악마로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시대가 세대로, 세대가 개인으로, 개인으로부터 역동으로,

역동이 개인으로, 개인이 세대로, 세대가 시대로.


이것이 세대의 트라우마가 개인 역동에 전이되고 스며드는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그저 '남자들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억울한 사람은 없어야겠지만, 사람 억울하게 오인을 하는 거시적인 원리를 끝까지 파고들지 않으면 결국 똑같은 비극이 반복될 것이므로 나는 무엇보다 그 원리를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특히 착하고 유순한 남자들이 가스라이팅 한다고 많이들 지탄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전술한 바와 같은 착시인 것으로 보인다. 가스라이팅 피해를 보고하는 이야기들을 끝까지 들어보면, 정작 여자 패고 다니는 미친놈들이 진짜 가스라이팅도 한다. '오인된 가스라이팅'의 근원은, 2차적으로는 낮은 자존감과 여성의 논쟁 우회 문화에 있다('경향'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그러면 또 진화심리학자들이 날뛸 것이기 때문에 '문화'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많은 여성을 대체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도록 압력을 넣은 1차적인 원인은, 여성에 대해서 끝없이 감시하고 평가하고 모욕하고 모독하며 트라우마를 찍어 내는 사회에 있다.


오인된 가스라이팅은, 뼛속 깊은 비난이 만들어낸 낮은 자존감과 연쇄 자학의 끝에, 그 문제를 만들어낸 원인을 찾아서 제거하려는 '마음의 비상 장치'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지목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오인된 남성 입장에서도,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소시오패스 범죄자처럼 지목을 하는데, 어떻게 건설적인 관계가 형성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선뜻 '그렇게 거짓말로 매도하지 마'라고 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여성 본인이 느낀 무력감과 낮은 자존감 자체는 실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빗발치는 가스라이팅 가해자 지목은, 상당수의 경우에는, 실제 가해자도 없고 피해 입은 구체적인 사실도 없고, 트라우마의 축적과 폭발… 축적과 폭발만이 계속되는 것이다. 시대가 세대를 트라우마로 물들일 때, 이렇게 인간관계는 파괴되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민족을 만든다. 민족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은 경험의 교환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50년대에서부터 70년대에 태어난 그룹의 체험과 관점을 통해서, 80년대부터 00년대에 태어난 그룹의 체험과 관점을 통해서, 이 사회가 또는 시대가 한 세대 전체에게 어떤 깊은 상처를 찔러 넣을 수 있을지 다루어 보았다. 우리가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민족'이라는 집단을 조망할 때, 이 '민족'이라는 집단은 그다지 영광과 기쁨, 풍요와 풍족 속에서 탄생하는 것은 별로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신 '민족'은 억압과 학살 속에서, 저항과 전쟁 속에서, 배고픔과 협동 속에서 힘겨운 시절을 겨우겨우 이겨내는 과정에서, 그 역사적 현장의 당사자들이 서로를 식별하고 상호 호혜를 베푸는 과정을 통해 점차적으로 뚜렷한 바운더리를 가지고 탄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기 다른 시대로부터 생성된 각기 다른 세대들도, 이러한 민족과 비슷한 생성 원리를 가지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굳건한 단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겠는가? 나는 소위 말하는 '태극기 부대'라고 생각한다. 오늘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 분들이야말로 민족 정체성의 형성과정과 세대 정체성의 형성과정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60년~70년 세대가 국가폭력 트라우마를 안고 있고 80~90년 대생들이 세월호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것처럼, 이 세대, 즉, 1950년보다 더 옛날에 태어난 세대들은 한국전쟁, 아니, '육이오 전쟁'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그들은 공산국가의 침략전쟁과 자유세계의 방어 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 세대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이렇게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때는 소련이 미쳐서 그랬지만, 이후로 자유세계가 공산국가를 침략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았는데요! 통킹만 사건 모르십니까!" 그 말이 먹히겠는가? 그 이전에, '육이오 전쟁' 트라우마를 겪어서 평생을 터널 비전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도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까? '태극기 부대'가 보여주는 저 광기도, 사실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사실 엄청나게 짜증 나는 일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단지 분노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최근 '대깨문'이나 '문 꿀 오소리'처럼 여러 가지 멸칭으로 불리는 민주당의 콘크리트 지지층도 이러한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민주화 세력이다. 민주화는 죽음을 동반한다. 우리 세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다. 동료들이 백골단 쇠파이프에 머리가 깨져 죽고, 유력 야당 후보가 납치되고, 동료가 안기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해 죽고, 스스로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하고, 통일을 위해서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서 미친 권위주의 정권과 쇠파이프로 치고받았던 당사자 그리고 그들을 지켜봤던 사람들이 바로 민주당의 지지자들이다. 그들은 단지 20세기의 민주화 투쟁뿐만이 아니라,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권위주의 정권에서도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그 상처투성이 시대는, 그러잖아도 6월 항쟁의 충격적 유산을 떠안고 자라 온 60년대~70년대생 세대에 이중의 트라우마를 박아 넣었다.



민주당원의 마음


민주당 콘크리트 지지층 마음속에 숨겨진 '비상 장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잃어서는 안 된다. 이 정권을 두 번 다시는 잃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누가 독재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를 다 잡아가둘지도 몰라. 나와 내 친구들을 다시 가두고 고문할지도 몰라. 민주당을 지켜야 돼. 민주당을 지키고 민주당에게 유리하게 판을 짜자. 레임덕 오는 이 시국에 부담스럽게 좌클릭해야 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나 정의당과의 협력 뭐 이런 거는 지금 문제가 아니야. 이낙연 대통령 만들어야 돼. 전 대통령 사면? 사면 시켜 줘. 우리가 잡아넣었으니까 우리가 풀어줘도 돼. 이명박 · 박근혜 풀려나는 한이 있어도 민주당이 다음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거야. 아니면 다 죽게 생겼다니까!!!"


안타깝게도 민주당이 대적한다는 그 정확한 적이 무엇인지는 사실 본인들도 잘 알지 못한다. 심지어 나도 잘 모르겠다. 예를 들어서, 윤석열 검찰총장? 아무리 보수주의자라고 해도 윤석열을 대통령직으로 밀겠다는 계획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는, 지금 민주당을 위협하는 실제 어떤 세력이나 음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는 독재자도 없고, 독재자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숨죽이고 살아가던 60년~80년대의 '국민'들도 없다. 이제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시민'이라고 부르고, 이제 한국을 지배하는 장치는 단지 자본과 선거만이 존재한다.


민주당은 이제 적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모든 레짐과 융합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스스로 자본의 편이며, 또한 스스로 민주주의의 편이다. 한때 그들을 두들겨 팼던 '태극기 부대'는 이제 거의 다 늙어 돌아가실 수준이 되었다. 민주당원이 그렇듯이 한국인들은 대부분 뼛속 깊은 시장주의자가 되었다. 한 줌의 좌파들조차 적당히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이 민주당 그 자신이 표방하는 가치이다. 그렇다면 이제… 민주당이 잡아 족쳐야 할 적은 무엇이 남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민주당에 가장 많은 타격을 준 사람들은 박원순 · 오거돈 · 안희정 · 정봉주와 같은 정치인들이었다. 무시무시한 악마처럼 그려지는 김종인 · 홍준표 · 안철수가 아니다. 그러나 민주당원들은 언제나 바깥으로 화낸다. 자기 안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이.


하지만 나는 그것이 단지 민주당원들의 악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악의를 갖고, 민주당이 지배하는 새로운 권위주의와 노동 착취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정치인들이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라는 헤게모니를 통해 더 '기업 하기 싸게 먹히는 나라'를 만드려 노력하는 기업가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종의, '확신범'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민주당 콘크리트 지지층이 보이는 자기 당 정치인에 대한 열광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보인다.


트라우마의 특징은, 나에게 피해를 입힌 과거의 대상이 지금 이곳의 현실에 없더라도 그 비슷한 대상을 만들어내서 위험에 대비하려는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라우마가 현실 적응에 문제가 되는 이유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힌 원본 출처 때문이 아니라, '유사 트라우마 상황 대응용 긴급 프로토콜'이 원본 출처 비슷한 것만 봐도 사람의 현실 검증력을 저해하고 비이성적으로 대응하게끔 몰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콘크리트 민주당원의 이러한 성향을 나서서 제지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그분들이 이미 이 한반도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이제 싸움은 끝났고, 관리의 시대 · 거버넌스(Governance)의 시대가 왔다고 말해주고 싶다. 사회학에서 '민주주의의 공고화'라는 개념이 있다. 공고화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독재체제에서 민주화가 성공하여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고, 선거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다시 들어선 뒤, 다시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민주당은 이미 성공했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통한 권위주의 정권의 교체를 이미 여러 번 경험했고, 경험할수록 이 나라는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점점 더 '정상국가 체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한국에서 민주당을 부당하게 해칠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단지 민주당의 일부 정치인을 보호하려 하기보단, 공공의 정의와 공적 가치를 위해 일해주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성추행 피해자에게 심각한 2차 가해를 퍼붓거나, 월급 180 받는 서민 계급이 절실하게 요구하는 노동자 보호 법안을 생까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민주당에게는 더 나은 나라를 위한, 현대 한국을 위한 180석 수준의 기여는 충분히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현대라는 말의 의미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시대'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옛 시절을 돌이켜 보고 회고하면서 '시대'라고 한다고 할 때, 또는 어떤 특징적인 한 시기를 다소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 취급하여서 '시대'라고 한다고 할 때(마치 지금 우리가 농담 삼아 '코로나 시대'와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이 시기가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지금 내가 태어났어야 할 바로 이 시간으로 간주되는 특별한 나만의 시대 - 즉 '현대'는 언제 오는가?


우리는 현대에 사는가? 나는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표현처럼,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최신의 '현대'라기에는 너무 많은 중세적 · 근세적 · 근대적 불합리가 존재한다. 너무 많은 부조리와 고통과 눈물 그리고 불만 사항들이, 지금 이 시절을 '나의 현대'가 아니라 빨리 역사에 묻어버리고 싶은 '느그 시대'로 만들고 있다. 우리 시대를 도저히 긍지로운 목소리로 '현대'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이 시대는 현대가 아니다…. 모든 현대가 아닌 시대들은 구성원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며, 깊은 트라우마를 남길 정도로 낙후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은 인간 각자의 내밀한 시간의 방에 편입되지 못하고 '한심하고 괘씸하기 짝이 없었던 옛날 옛적 어떤 한 시대'가 되어 밀려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우리의 시간에 긍지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가 되어야 "그래, 나는 이 시대에 태어나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어! 정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대야. 시장에서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고, 사회는 안정되어 있고 정부기관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아. 시민권은 보호받고 있지. 이것이야말로 '현대'라고 불러봄직하지 않겠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기를 바라기에 나의 직업과 연구 그리고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이 사회의 취약한 사람들에 봉사하고, 사회적 약자를 집중적으로 보호하는 보다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정당에 당비를 납부하며 참여하고 있다. 현대는 참여와 개입 없이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현대가 빨리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당도하기를 바란다. 그때 우리는 눈물을 거두고 진정한 새 천년을 맞이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달력을 다 찢고 새로운 천 년을 향해 헤아리는 현대력 1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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