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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Feb 11. 2021

돈 잘 버는 직업:
절댓값과 상댓값이라는 돈의 마법

나루의 직업상담 칼럼 003 - 돈 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돈 버는 직업의 원리와 빈부격차가 생기는 제1이유




설날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나루칼럼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 돈 많이 버시라고, 돈 칼럼을 썼습니다.



내 DNA 찢기


최근 나는 부동산업계와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있다. 자주 오해를 사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의 말하지는 않았지만 정부 공인 손해보험설계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보험설계사가 되고 싶어서는 아니고, 여러 노동시장에 대해 파악하고 더 정확한 직업상담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직접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머지않아 (지금도 지인들 위주로 무상 직업상담을 매주 한 건 씩은 해주고 있지만) 유상 직업상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을 때, 여러 니즈를 가진 내담자께 폭넓은 시야를 제공하기 위하여서는 지금까지 자격증 공부와 실무훈련에서 배웠던 일반적인 직업정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또한, 단지 일을 해주고 월급을 받는 고정급의 직업을 택하는 것도 물론 좋은 선택이지만, 일을 한 만큼 돈을 버는 성과급의 직업과 그 직업을 지배하는 시장의 생리에 대해서도 안내가 가능해야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직업상담사이기는 하지만 직업상담을 청구하는 내담자의 니즈는 단지 일이 아니라 경제적 확장과 노후대비의 방향으로 겨누어진 벡터와 같기 때문에, 일이 아니라 자본을 통해 돈을 버는 방법도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했다. 일반적인 B2C/B2B 업계를 넘어서 이른바 B2F(Finance), 즉, '돈 그 자체를 굴려서 돈을 버는 직업', 그리고 그것에 관계되어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업계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 뵙고 어마어마한 유동성(돈)이 굴러가는 그 업계의 생리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요즘은 그러한 경험을 쌓는 데 시간을 보냈다. 내담자의 삶을 책임지는 직업상담사로서 나는 지금도 쉬지 않고 매주 새로운 세미나에서 배우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일정한 제한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다. 나의 백그라운드 역시 명백하다. 나는 죽어가는 빈민들과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보고 유년기를 보냈다. 진보-좌파 교육 그룹에서 성장했으며, 오직 세상의 아픈 사람들께 봉사하기 위하여 휴먼서비스의 길에 들어섰다. 이것은 정확히 나의 정신적 DNA에 각인된 사실들이다. 그러나 DNA는 존재의 출처인 동시에 감옥이기도 하다. 내가 나의 시에 '우리는 새인 동시에 새장이다'는 취지로 자주 언급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우리가 DNA를 뛰어넘어 삶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고 다 늙어버렸어" 라고만 치부할 뿐,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벌떡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낯선 곳으로 뛰어들겠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바코드 같은 DNA를 반복하는 생체 기계 이상이 되지 못한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물음처럼,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DNA를 부정하고 - 우리의 나이와 부모와 학력과 버릇과 정신질환과 동창과 친구들로부터 되풀이되는 패턴을 부정하고,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아버지를 죽이는 대신 그와의 상징 전쟁으로부터 빠져나와서 - 아예 새로운 정보와 행동들을 우리의 염기서열에 건설적으로 외삽(外揷)함으로써만이 진짜 살아있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업가의 DNA


금융. 금융업계 사람들을 만나 보면 그런 새로운 DNA의 외삽을 경험하곤 한다. 동료 사회복지사들이나 교육자들 또는 공부하는 청년들이나 사회운동가들과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느새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조이고 정확한 매너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회생활에 안 그런 데가 어디있겠나 하지만, 금융권의 코드는 그 사회적 제스쳐 중에서도 가장 엄밀하고 견고하다. 혹자는 그것을 '보수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실제로도 직장생활을 지배하는 규율로서 그러한 성격이 크지만, 나는 그 보수성을 형성한 최초의 정신은 폐쇄성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에 대한 추구'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을 다 만나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자신의 색을 억제함으로써 모든 사람과 합치하게 되는 것. 그것은 분명 보편성에 대한 추구이다. 사람을 오직 돈으로 판단하는 것과 돈을 포함한 모든 편견으로 판단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나쁜가? 입금하면 고용주이고 입금하지 않으면 아닌 것. 때로는 가장 솔직한 것이 가장 덜 나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DNA는, 이른바 우리가 '기업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집에서도 일을 멈추지 않고, 과로를 마다하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그 와중에도 헬스장에 다니며 운동한다. 서른, 마흔이 된 남성들이 배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런 사례를 거의 보지 못했다. 요즘 사람들이 GRIT이라고 부르는, 어떤 돈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정열과 추구를 금융업계 종사자들은 가지고 있다. 각자의 개인적인 동기를 알 수는 없다. 그들이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려고 마음먹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돈 그 자체를 정확히 겨냥하고 달려가는 허슬러들이고, 그래서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가치를 번 카드(Burn Card)처럼 태워버린다. 



그들의 패에는 왜 '안전빵'이 없을까


그들이 태워버리고, 반대로 내 주변의 수많은 교대 출신들이 꼭 쥐고 있는 그 카드. 그것은 바로 '고정급'이라는 카드다. 그들은 그 카드를 태워버리고 대신 어느 카드를 손패에 넣었을까? 그것은 바로 '비율급'이라는 카드다. 이 '비율급' 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으로는 '성과급' '변동급' 등으로 불리고, 또한 특수한 고용형태인 선원법 제57조(어선원의 임금에 대한 특례)에서 이른바 '보합제'를 대체하는 공식 용어로 사용되고는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는 회사의 이익에 관련없이 고정적으로 약정한 금액을 받는 고정급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서, 회사 이익의 비율에 연동하여 받는 개념으로서 '비율급'을 사용하려 한다.


금융권의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임금이 자신의 성과와 연동되어 약간의 - 혹은 아예 없는 - 기본급을 제외하면 봉급의 상당 부분을 비율급으로 수령한다. 잠깐 알바처럼 일하는 사무원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금융업시장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금융계 커리어를 쌓는 진지한 참여자들은 그러한 조건에 크게 저항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단지 이 업계가 특별히 노동자를 공정하게 대하지 않아서 비율급을 노동에 대한 주된 보상으로 제공하는 것은 아니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개별 기업이 어찌하든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우리는 기업을 지배하는 시장에 대해서만 신경쓰면 된다고 주장해 왔다는 것은 독자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기업의 성격이 비율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성격이 비율급을 만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금융시장은 그 자체로 비율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가령, 아파트 가격이 얼마나 올랐느냐고 하는 것은 개인 아파트 투자자들이 자녀를 그 돈으로 사교육을 시켜서 서울대에 보낼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한다. 그들이 아파트 가격이 '몇 퍼센트'가 아니라 '얼마'라고 묻는 까닭은 그들이 결국 그 돈을 이를테면 사교육 시장과 같은 다른 소매시장에서 '얼마'에 해당하는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쓰고자 하기 때문이다. 금액을 써야 하기 때문에 금액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돈을 쓰기 위해 돈을 불리는 게 아니라면, 단지 자산 그 자체를 위해 자산을 불리는 것이라면, '얼마'냐는 물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대신 '비교적 얼마나?' 라는 물음이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거시 수준에서, 그리고 판매가격을 통해 현금화가 되지 않은 모든 자산은, 오직 다른 자산들과의 비교가치를 통해서만 가치가 책정되기 때문이다. 



왜 돈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다른 돈에 대한 상대가치만을 갖는가?


역사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지난 2020년 11월, 김영훈 고려대 의료원장은 자교 사회사업에 1억 65만원을 기부했다. 왜 1억 하고도 65만원이었을까? 65만원은 1937년 우석 김종익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에 기부한 상징적인 금액이기 때문이다. 액수로만 보면 65만원은 오늘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은 금액이고 때로는 한 달 밥 값도 되지 않지만, 1938년에는 1800억원이었다. 미국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이 1928년에 설립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우석이 남긴 65만원의 지원을 받아 4년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재조직된다. 그것이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다.


현금을 단순 액수로 비교한다면, 1938년 65만원과 오늘날 1800억원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돈으로 만들어낸 조선시대 의학대학과 오늘날의 의학대학 간의 가치는 비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쉽게 비교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의학대학과 오늘날의 의학대학은 인류가 걸 수 있는 최대한의 희망이라는 점에서 거의 동일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인류는 의대에 최대의 투자를 했고,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생명은 소중했으니까. 그래서 의학대학에 자산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의 원본 출처는 바로 인간의 생명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경제에 대한 중요한 통찰이 있다. 현금은 종이쪼가리다. 현금 그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삶아 먹을 수도 없고 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현금은 단지 자산과 다른 자산을 바꾸는 정부 보증의 증권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자산이 무슨 가치를 만들어내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다름아닌 사람의 니즈(needs) 그 자체다. 사람의 신체와 호기심과 졸림과 갈증과 허기짐에 있다. 자산도 사람에게 그 결핍을 공급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건물도 자산이고 자동차도 자산이고 비행기도 자산이지만 그저 비어 있고 방치되어 있는 자산들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자산은 그 자신의 이용자 - 즉, 인간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 때, 비로소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러니까 자산을 콘크리트 더미나 서류더미가 아니라 자산이라고 호명해 주고 실제 돈 주고 구매함으로써 시장가치를 부여해 주체는 다른 누가 아닌 '소비자'이고, 그들이 거시적으로 보면 '시장'이며, 그들이 자산을 자산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제 현금이 설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현금은 자산보다 열등하고, 자산은 인간보다 열등하다. 현금은 정부가 발행한 현장결제 공인인증서 같은 것에 불과하다. 현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현금은 오직, 소비자가 애타게 찾는 그 가치를 공급하는 자산의 형태로만 그 가치를 지니고 보존하고 또한 증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중요하다. 현찰 들고 있지 말라. 그건 반드시 투자해야 한다. 소액이라도, 잠깐이라도.


만약에, 우석 김종익 선생이 65만원으로 의대를 짓지 않고 단지 궤짝에 묻어두었는데 그걸 자손이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꾸로, 당시 1800억원어치가 현재 65만원이 되었을 것이다. 지폐를 불에 태우는 셈이다. 아니, 지폐에 물에 담가서 조선왕조실록 세초(洗草)하듯이 펄프로 풀어 버리는 셈이다. 이 비유와 실제 상황은 거의 비슷하다. 1800억원이 65만원이 된 까닭은, 현금 가치가 신규 현금 공급 때문에 희석되기 때문이다. 내 지갑 안의 돈은 그대로인데 남의 지갑들이 계속 불어나서 다른 돈에 대한 상대적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즉, 인플레이션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왜?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량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왜? 정부가 중앙 은행에서 돈을 찍어내서 시중에 풀기 때문이다. 왜?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노동을 하고 생산을 해서 새로운 자산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산은 '가치의 원본'이며, 그 증가분의 가치에 대응하는 추가 화폐가 없으면 시중의 화폐는 상대 가치가 점점 높아지게 된다(디플레이션).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현금 자체의 유통이 줄어들기 때문에 거래가 위축되고, 빌린 돈의 가치도 높아지기 때문에 돈을 갚을 수가 없으며, 이자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투자가 어려워지고, 현금을 지급해야 하는 기업도 고용이 어려워진다. 인플레이션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지만 디플레이션은 상품거래 자체를 경색시키기 때문에 대부분 정부는 유동성 과잉으로 인한 대공황을 감수하고서라도, 유동성을 계속 공급한다.



초승달이 차오를 때 그림자도 부풀어간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자신의 모습을 찍는다는 것이다. 밤에 달이 뜨면 강에 그 달이 대칭적으로 비치듯,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실제 실물 자산과 유동성(현금)은 대칭을 이룬다(이뤄야만 한다). 그리고 단지 경기부양과 기업 도산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감행하는 양적 완화라는 중요한 요인을 빼놓고 보더라도, 인간이 태어나서 일하고 새로운 기술과 술식을 발명하고 재화와 서비스를 증대시키기 때문에, 그 증대된 서비스들간의 교환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시중 통화량의 추가 공급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고 또한 저축/채권 등으로 묶여 있는 돈을 보상하는 유동성도 공급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것은 '물리적인 결과'이다. 


미국에서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유도 이와 같다. 금의 총량이 = 화폐의 총량이며, 즉 총 화폐량이 총 금 량과 대칭을 이루는 상태에서 실물경제의 거래에 사용되는 것이 금본위제다. 그렇다면 평형이 깨어지지 않은 이상적인 시장 상태가 되려면 금 총량 = 화폐 총량 = 실물경제 총량이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간이 창조한 경제적 가치는 이미 20세기부터 채굴된 금의 총량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실물경제의 총 가치가 금의 총 가치보다 거대해졌기 때문에, 통화량 자체가 부족해졌고 디플레이션 위험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금과 화폐의 연동을 끊어버리고, 금과 실물경제를 직접 연결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누구나 자기 나라 화폐를 그렇게 함으로써 '기축 통화'의 반열에 오르고 싶었겠지만 아무래도 1,600발의 발사 준비된 핵미사일과 2,050발의 예비 핵미사일을 갖고 있는 미국이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리고 이러한 거시 수준에서 보았을 때, 또한 우리가 앞서 짚었던 여러 포인트; 


1) 현금의 가치는 자산의 반영에 불과하므로 자산 그 자체보다 훨씬 불안정하다는 점, 

2) 자산조차 소비자에게 채택될 때에만 가치를 갖는다는 점, 

3) 현금은 성장하는 경제 · 금융과 대칭상태에 있으므로 근본적으로 반드시 희석된다는 점, 

4) 20세기에 금에 연동되어 있던 화폐가 풀려났을 뿐만 아니라, 

5) 21세기에도 미 · 일 · 중 · 유럽중앙은행 등 주요국이 양적완화를 단행하므로 화폐는 훨씬 고속으로 희석된다는 점, 

6) COVID-19 사태 이후로 각국 중앙정부가 눈 딱 감고 미친듯이 돈을 찍어내기 때문에 코로나가 끝나면 남아도는 화폐는 더욱 가치가 폭락할지도 모른다는 점 (그런 점에서 내가 보기에 한국 정부의 코로나19 통화정책은 극히 안정추구적으로 보인다)


등을 확인해볼 수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는가? 금 연동에서 풀려난 화폐가 시장 그 자체에 연동되었고 계속 희석되고 있다는 것은, 고정 월급을 받거나 저축하는 식의 부 축적 방식이 더욱 더 불리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는 하지만, 금리 0.4% 따위 입출금 구좌에라도 저축하는 게 술집 가서 술값에 돈 태우는 것보다는 천억배 천억만 배는 더 낫다) 현금 자산은 고속으로 희석될 뿐더러, 시장 가치의 원본이 이제 금에서 아예 소비자의 선택 그 자체로 넘어왔기 때문에, 이제 부의 축적을 위해서는 아예 자산(자본 · 사업 · 부동산 · 주식) 그 자체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부의 비밀, 그리고 빈부 격차의 비밀이 있다. '화폐'가 아니라 자산을 가지는 것. 그것 자체가 부의 첫 번째 비밀이다. 자산을 가지면, 돈을 고정값이 아니라 비율값으로 벌 수 있고, 그것이 고속 인플레이션에 대항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고, 앞서 고려대학교 의학대학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이, 100년을 넘어서 가치를 보존하고 증폭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비율급 전성시대 : 점점 녹아버리는 현금,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아마 여러분을 포함해서, COVID-19사태 이후 경제 기사를 팔로업하고 있는 똑똑한 현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대부분 2020년 중순부터는 테슬라나 삼성전자와 같은 주식을 사모으고 계셨을 것으로 짐작한다. 주식은 수십만 명의 주주들이 집단적으로 우석 김종익 선생처럼 백 년 가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내가 오늘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주식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살 것이냐'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다. (주식 이야기는 예전에 테슬라 글에서 읽으실 수 있다.)


우리가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비율로 사지는 않는다. 이 자동차는 당신 기업 가치의 0.0000000125%이군요. 그러면 제가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결제를 하는 게 아니다. 이천만원이면 이천만원, 오천만원이면 오천만원이다. 소매시장에서, 상품에는 정해진 금액이 있고 엔드 유저는 그 금액을 주고 물건을 사오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의 경영에 있어서, 그러한 고정 금액은 근본적으로 중요한 숫자가 아니다. 기업은 고정금액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오직 초기 매출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스타트업만이 "우리가 시리즈A 투자에서 십몇 억을 받았다"라고 절댓값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부분 기업은 벤처기업에서 안정화를 거치면서 절대액수를 말하지 않게 된다. 예컨대 벤처기업이 스케일업(Scale-up)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은 통상적으로 3년간 연평균 매출 증가율이 20% 이상 이루어진, 혹은 매 분기 고객 풀이 30% 이상 성장한 고성장 기업을 일컫는다. 더 이상 '저희가 몇억원 흑자를 남겼어요'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중견기업 이상에서 단위가 '몇 원'이 아닌 '몇 퍼센트'로 변화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동시에 바람직한 이유는, 경제는 기본적으로 규모가 크기 때문에 액수를 따지는 게 어렵다는 이유도 있지만, 거대한 자본이 투입되고 거대한 매출을 벌어들이는 회사의 경우에는 단지 흑자를 내는 게 아니라 투자금의 '비율에 맞춰서' 흑자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1억원을 투자해서 1000만원의 이익을 내도 흑자이고, 1천억원을 투자해서 1000만원의 이익을 내도 흑자이다. 그러나 전자의 수익률은 10%인 반면 후자의 수익률은 0.01%에 불과하다. 후자는 실패한 비즈니스다. 그 돈은 다른 데에 투자해서 훨씬 더 큰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기업은 반드시 비율적 성장을 목표로 사업을 확장한다. 


앞서 금융인들의 세계에 '고정급'이라는 카드가 흔하지 않은 이유도 그와 같다. 고정급은 보상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근본적으로 기대되는 생산성의 총량도 이미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월급이 300만원이라면, 노동자가 생산하는 이익금을 얼마로 간주하고 얼마 정도와 회사와 셰어할지는 훨씬 더 개별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어찌되었든 일(생산성)의 기준이 300만원 선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고정급이 일반적으로 최저생활수준을 보장하고 심리적 안전망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생산성 향상의 심리적 보상물이 될 수 있고, 불안한 경쟁이 노동자를 과로와 정신질환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에 고정급이 보편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업계에 따라 입장은 다를 수도 있다. 기업은 본질적으로 직전에 논한 바와 같이 비율로 돈을 벌고, 기업의 움직임을 추종하는 금융계 역시 이익을 절댓값이 아닌 비율로 나누는 것으로 보인다.


금융업 종사자가 비교적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도 이러한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인간이 요구하는, 혹은, 한 달에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절대적인 돈의 총량은 일정한 금액에 고정되어 있는데, 비율이라는 독자적인 논리로 이루어지는 금융거래를 중개함으로써 마찬가지로 비율로 떨어지는 막대한 양의 셰어를 받음으로써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이다. 부동산, 건설, 연금, 보험, 주식, PB… 대부분 금융계가 그러한 기회에 노출되어 있다. 금융계 종사자들이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정말로 행복한지는 별개의 질문이지만, 숫자로 확인되는 한 금융업계의 평균 연봉은 다른 업계보다 대략 1,000만원 정도는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



고정급 지급 : 근본적인 생산성의 이전이 일어나는 순간 


하지만 나는 '돈 벌고 싶으면 금융계로 가라'는 말을 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현재 경제 시스템에서 무엇이 돈을 버는 주요 원리인지 논하고, 빈부격차의 이유를 논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개선 방안을 찾고자 이 글을 썼다. 비율 성장을 추구하는 비율급형 직장인들이 자신의 일에 보여주는 GRIT은 정말로 존경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본급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열정을 불태워서 비율급의 고수익에 도전하는 기업가정신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실상 거의 삶 전체를 일에 쏟아붓는 비율급형 직장인들과 기업가들을 삶의 태도에 있어서 전혀 구분할 수 없게 만들어 주는 접합 지점이기도 하다. 비율급의 허슬러들과 기업가들 사이에는 물려받은 자산의 유무에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최고의 수익을 만들려 하는 앙트레프레너쉽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기서 내가 논의하고 싶었던 것은,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비율급의 초과 수익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시장경쟁 속에서 계속해서 가격의 하방압력에 노출된 기업은 어떻게 이익을 거두는가? 초과 이익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비율급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가 투자된 모든 금액을 상회하는 초과 이윤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익은 그냥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기업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과의 가격 협의와 투자 이익 상환의 약속을 통해서 비로소 도출될 수 있다. 기업이 이상적인 이익을 거두기 위해서는 소비자에게는 가장 비싸게 팔고 · 노동자는 최소한의 돈을 주고 · 세금은 거의 안 내고 · 특허료 등 기술이나 전문직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써야 한다. 이 넷을 다 하면 좋겠지만, 그러다가는 즉시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기 때문에 순서대로 포기한다. 대부분 기업은 가격을 먼저 낮추고, 조세에도 굴복하며, (LG나 삼성처럼 뇌물을 먹여 놓은 검찰들을 믿고 중소기업들 기술 강탈하는 따위의 만행을 저지를 수 없다면) 일정한 기술료도 납부하고 법무법인에 요금도 내지만, 가장 마지막까지 아낄 수 있는 것은 임금이다.


기업이 아낄 수 있는 임금의 하한은, 법정 최저시급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보다 높은 금액을 임금으로 지불할지라도, 여전히 노동자로부터 제공된 노동이라는 총 계정으로부터 기업 총 가치라는 계정으로 가치를 이체하고 성장할 수 있다. 왜 그게 가능할까? 그리고 왜 다른 주체들(투자은행 · 라이선스와 외부 전문직 비용 · 소비자가격)으로부터는 그보다는 큰 총가치를 이전해 오지는 못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보자. 기업은 투자은행에 돈을 빌리고 그 돈에 이자를 쳐서 갚는다. 이자는 당연히 '비율급'으로 지불된다. 또한 타 회사에서 기술을 도입할 때도 비율급으로 로열티를 지불한다. 예컨대, 블랙박스를 제조할 경우 한국기술거래소의 산업업종별 로열티율 '전자부품, 영상, 음향 및 통신장비 제조업' 중앙값인 3%를 적용한다. 비싸게 팔수록, 내야 할 돈도 커진다. (출처) 세금도 당연히 비율급으로 지불한다. 이러한 비율급의 지불 항목들은 회사가 성장하고 생산량이 아무리 커지더라도, 마치 풍선에 마커를 칠한 다음 풍선을 불면 마커 자국이 풍선을 따라서 커지듯이, 계속 이윤율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회사가 자신의 성장율에 거머리처럼 연동해서 커지는 비율급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 택해야 하는 방법은 유일하다. 고정급 지출.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끌어다 쓴 힘과 기술의 대가를, 내 성장의 비율과 상관이 없는 고정급으로 지불하는 것이다. 그게 뭐지? 




바로 고정된 월급이다. 


월급이 고정급으로 지불되기 때문에, 노동자가 기업에 기여한 분량의 생산성이 기업을 비율적으로 성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약정된 금액만이 보수로 지불되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근본적인 생산성의 이전' 이라고 부른다. 기업이 노동자에게 기업의 성장분만큼 다 지급했다면, 가령, 모든 종업원의 공헌도가 동일한 10인 기업을 가정할 때, (창업자가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프리미엄을 잠시 제쳐 놓고) 기업이 1억의 수익을 거두었을 때 1천만원에 대한 권리를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다면,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성을 그대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비율급제의 이상(理想)이다. 그런데 고정급을 받게 되면, 회사가 적자가 나도 내 월급은 나온다는 유일한 장점을 제외하면, 얼마의 수익을 거두든지 나의 이익은 약정된 금액을 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기업 성장에 대한 개인의 기여분이 개인으로부터 기업으로 빼앗기는 순간이다.


기업은 비율적으로 성장하고, 노동자는 고정급을 받는다는 것. 근본적 생산성의 이전. 이것이 현대 기업의 가장 기초적인 레짐(Regime)이다. 이 레짐의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기업이 기업 자산의 집행권을 가진 중앙통제적 리더쉽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이유라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생산성을 이전당했기 때문에 자신의 기여분을 요구하거나 인출할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협동조합 기업의 경우 조합원이 탈퇴를 원할 때는 그 사람의 지분을 내어주어야만 하지만, 회사는 아무리 일 잘 해서 회사에 막대한 돈을 벌어다 준 종업원을 해고해도 그가 벌어다준 이익을 환급해줄 이유가 없다. 이것은 개인이 회사의 인프라 위에서 일했다고 할지라도 인프라가 일한 게 아니라 내가 일한 것이기 때문에 약탈로 취급되기 충분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강력한 중앙 리더쉽의 집행과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전이다. 



월급 : 빈부격차의 최초 출처


반면, 이러한 체제의 부정적인 면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빈부격차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에 있다. 누군가가 고정급으로 돈을 벌 때, 누군가는 비율급으로 돈을 벌기 때문이다. 장사가 잘 안 되는 편의점에서는 법정 고정급이 정해져 있는 아르바이트가 사장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지만, 그 편의점이 거대기업집단이 되면 아르바이트는 실제 편의점 사업에 자신이 기여하는 부분보다 훨씬 적게 가져간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기업으로부터 받는 이익 쉐어에 하한선(최저시급)만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왜 하한선인가? 생존비보다 더 낮게 주지 않도록만 규제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실제 기업에서, 노동자가 불공정할 만큼 월급을 많이 가져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월급의 상한선은 기업가들이 원래부터 해당 급 노동의 시장가격에 따라 최소한만 줌으로써 사실상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느 정도 성장한 사업은 인건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 바로 이것이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근본 원리다. 자신이 기업을 설계하고 경영하였기 때문에, 타인의 노동에 단지 고정급만을 지급한다고 하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하나의 레짐. 이러한 경영방식이 작동하는 한, 노동자는 고정급으로 돈을 벌고, 그들이 참여해서 성장하는 기업의 소유권을 가진 기업가는 사업체가 커지는 만큼, 비율금으로 돈을 벌기 때문에 빈부격차는 반드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을 옹호하는 입장도 거절하기 힘든 일리가 있다. 시장에 진입하는 초기자금을 대고 투자를 결정한 리스크를 이끌어내려면, 또한 마땅히 그것을 보상하려면, 그 금전적 대가의 상한선 역시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업 아이디어와 혁신을 가져온 것은 사업가의 몫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가 모든 신체 중에서 머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듯이, 사업도 단순작업을 하는 직원보다는 핵심 기술진과 경영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단지 설계도면을 옮기는 사람과 설계도면을 직접 그리는 사람이 회사에 기여하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이것 역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철학적인 질문이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좌파


지금까지 좌파들은 기업가정신의 옹호자들이 던지는 이 핵심적인 질문을 회피해 왔다. 그 결과, 이 사회의 좌파와 우파들은 대화와 타협이 단절되어 왔다. 단지 가장 왼쪽에서는 혁명을 하자는 몽상만이 되풀이되었다. 몽상도 강민처럼 잘 하기나 하면 모를까. 가장 왼쪽은 아니지만 한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던 '구좌파'는, 여전히 맑시즘 하나만을 잡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 향상과 산업 재조정 그리고 동종업계에 대한 임금 셰어링이라는 사회적 대타협에 별로 참여하지 않은 채, '우리는 노동자니까 우리가 하면 다 맞다'는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노동자 정체성이 단일한 하나라는 전제가 입증되어야 성립할 수 있다. 모든 사회적 지지체계로부터 튕겨나와서 매일 항정신병제제 한 움큼씩 먹고 본인 재무설계 개념도 없고 부채의 범위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20대 성매매 피해자(동시에 '성노동자')와, 그들의 섹스 서비스를 사는(혹은 약탈하는) 30대 남성 대기업 노동자, 그리고 그들에게 보험을 판매하는 50대 경력단절 여성 우체국보험 RC가 모조리 같은-하나의-단일한-정체성의-노동자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많은 구좌파 운동권 동지들이 이 글을 보고 있겠지만 나는 좌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사회학도로서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모두 789대투쟁에 영원한 빚을 지고 있지만, 789대투쟁으로 시작되었던 중공업 주도 고성장 시대의 레짐은 끝났다. 이제 촘촘하게 늘어선 계층이 존재할 뿐,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로 딱 잘라 나뉘어지는 계급은 없다. 사실은 원래 없었다 그런 건.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못 봤을 뿐이지.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지. 어떤 노동자도 더 이상 - 아니 원래부터 - 단일 계급이었던 적이 없다. 그런 세상은 끝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던 적이 없다. 만약 그런 세상이 있었다면 1978년 동일방직 사건부터 시작해서, 노조 파업 때 수없이 많이 트레이드오프 당한 여성 노동자들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 말을 10년 뒤에 또 해줘야 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일군의 정치 밖 좌파들이 현실성 없는 주장을 하는 동안, 정치에 어떻게든 진입하려고 했던 현실 좌파에게 정치 지형은 여전히 가혹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동자경영권 도입도 버거운 영역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적당히 보수적인 태도로 주어진 대로 살았다. 어느정도 누릴 만큼 누리는 중산층 우파들은 자기보다 못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고, 완전히 우파들은 아예 자기들만의 스카이캐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좌파와 우파가 숫자 그 자체를 가지고, 철학과 보편의 영역에서, 노동자측과 기업가측의 적절한 이윤 쉐어링을 논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좌파가 맑스를 버리고 우파가 맨큐를 버리는 크리스마스 휴전 같은 미담도 아직 듣지 못했다. 


지금껏 좌파의 담론이라고 해 봐야 최저임금 1만원 정도였다. 아니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약속된 기본소득 따위가 한계였다. 그걸 지키지 않으면 그냥 악마를 만드는 것이었다. 예컨대 그냥 덮어놓고 문재인은 배신자! 문재앙! 이라고 하는 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재인정권 전체에게 별 기대도 감정도 없다. 단지 사회학적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면 문재인 정권의 판단 중에 잘 된 것 만큼이나 잘 되지 않은 것도 많기는 하지만, 그런 원색적 욕설이 좌파가 할 말의 전부는 아니어야 한다. 좌파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공학계산기를 들고 분석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분석하는 좌파는 거의 없다. 운동권 선배들이 전해 준 문건만을 달달 외운다. 내가 아는 한, 기본소득당에서 기본소득의 경제적 현실성을 논하는 경제학자는 한 명도 없다. 핵발전소를 멈추자고 하는 녹색당, 책임 질 수 없는 주장 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의당은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의 위성정당 창당에 야합했다는 이유로 기본소득당과 용혜인을 비난했지만, 정작 자기들이 안쪽에서부터 붕괴하는 중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격언처럼, 도덕으로 흥했기에 도덕으로 망하는 것이다. 도덕 외에는 내세울 신규 컨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정의당 뉴스레터와 정세보고서를 받으면서 당의 판단력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도무지 판단과 새로운 레짐의 '형성' 이라는 것이 없다. 그저 이슈에 대한 반응, 그리고 끝없는 규탄 뿐이다. 무언가 새로운 설득력을 들고 나오지 않는다면, 현실의 힘을 가진 우파에게 계속 끌려다니게 될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 우파


분석은 우파가 분석한다. 문제는 본인들의 멋대로 분석한다는 것이다. 조작적 정의를 규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자신들이 있고, 또한 적절히 유리하게 정의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생산성의 정의, 기업에 대한 기여분의 정의, 적정 임금의 정의, 노동자와 회사 관계의 정의를 내리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모두 회사를 위해 설계되어 있다. 물론 그런 것들에 한 가지의 일관된 경제적 철학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누구나 회사 · 고객 · 성장을 위해 성장하면 그에 걸맞는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기업가 정신이다. 


나는 이러한 기업가정신을 정말로 사랑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수많은 타락한 기업가 정신을 보면 괘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저임금 노동자들이, 버는 돈이 적기 때문에 그들이 만드는 가치가 적다고 주장한다. 거꾸로 된 주장이다. 통계학에서도 우리가 관찰하기에는 너무 아득한 진리에 해당하는 '진점수'가 있고 표본에서 획득된 '관찰된 점수'가 있듯이, 노동자는 그저 회사에 의해서 결정된 고정급만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고정급이 '그가 생성한 실제 가치' 에 해당할 뿐이라고는, 정말 깊은 사례연구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의 봉급 따위로 노동의 가치를 평가하는 졸속의 태도가, 노동 생산성에 대한 진지한 현장 탐구 이후에 도출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가난한가? 가난한 사람들이 일을 안 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월급을 적게 받기 때문에 가난하다. 회사의 전체 이익에서 쉐어를 너무 적게 가져가기 때문이다. 물론, 한 가지 유형의 예외는 있다. 논의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잠시 '노동자가 자초한 저임금'에 관해서 짚고 넘어가자. 한 가지가 있다. 사양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직업상담사로서 오직 업종 변경을 통해서만 그것이 구제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가령 모든 것이 신재생에너지로 전환되는 이 시대에 석탄 광부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도저히 구해줄 수가 없다. 네일 아트를 하겠다거나 바리스타가 되겠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너무 어렵고, 회사에게 아무 요구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회사도 당신보다 더 일찍부터 망해 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 시장이 우리가 거슬러서는 안 되는 해류다. (반복한다. '파도'가 아니고 '해일'도 아니며, '해류'다.) 시장의 활동 결과 정부와 공공 영역에 자금이 공급되며, 생산력이 발생하며, 자원이 거래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와 전혀 관계 없는 말이고, 내가 자본주의 전반을 옹호하거나 월가가 사기쳐서 개미 삥뜯는 금융자본주의 따위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자본을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시장은 자본주의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화폐 때문에 존재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화폐로 자신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거래라는 것을 하는 인간-소비자 그 자체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회사는 시장의 요구를 블렌딩하는 푸드 프로세서에 불과하다. 곧 무너질 다리 아래에, 곧 터질 활화산 위에 서 있지 말라. 사양 산업에서 일하기를 고집하는 노동자는 반드시 굶게 되고, 그 사람 개인을 위해서도 모두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적절한 산업에서 적절히 일하는데도 가난한 것은 명백히 부당한 일이고, 회사의 이익 셰어가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이익 셰어의 합의를 향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노동 생산성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성과의 가시성만을 봤고, 가시적 숫자에 대해서만 보상했다. "어느 부서의 누가 우리 우리 회사에 얼마 어치를 벌어다 주었느냐"라는 물음으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그 말의 대답은 각 부서의 치프급들이 한 번씩 언급되다가, 결국 "우리 대표님이 사업을 잘 따 와서 벌게 된 거지." 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대신 보다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특정한 단위기간 동안 우리 회사가 존속하고 또한 생산활동을 지속하는 데에 각자가 어떤 필수적인 기여를 하였느냐" 라고 물어야 한다. 회사의 존속과 생산활동에 있어서 해당 멤버의 필수성. 이것이 해당 단위기간의 이익을 셰어하는 데 쓸 수 있는 제1의 잣대다. 나의 존재가 필수적이지 않은데 그 회사에 있을 이유가 없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노동자에게 가혹해 보이지만, 사실 기업 내의 모든 임직원들도 동일선상의 기여자로서 비교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자신의 진정한 기여분을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실 기업 활동의 필수성 기여에 대한 점검은 이익을 더 정의롭게 나눌 수 있는 대안적인 레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임금은 업무의 필수성과 유일성에 비례해서 책정되어야 한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웃소싱이다. 어느 하나의 기업에 참여해서 그 회사의 이익률과 동기화하여서 수령해야 할 임금이, 완전히 최저가로 정리된 시장거래에 풀려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제적 정의를 저해하는 매우 직접적인 이유다. 많은 노동자 단체 · 좌파 단체가 불법파견을 근절하고 직고용을 강제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이와 같다. 어떤 일이 시장에서는 대체될 수 있더라도, 대체될 수 있는 일을 한다 뿐이지, 그들이 없으면 기업이 멈추게 되는 것은 동일하다. 자동차의 전조등은 엔진에 비하면 비교적 부차적인 기능이다. 그런데, 전조등이 없는 차를 탈 수 있는가? 자동차의 가격에 있어서 전조등은 값싸지만, 자동차의 주행에 있어서 전조등은 엔진과 동일하게 독자적이고 유일하며 필수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업의 운영과 성장에 대한 노동자의 기여 역시 이와 같다. 단지 계단 청소라 할지라도, 해당 노동 행위가 기업 운영에 대체될 수 없는 한, 그에 대한 보상은 다른 필수적 기업의 부서들과 연동되어야 한다. 어디까지가 '적정 연동 비율'에 해당하느냐가 이제 우리가 앞으로 근본적인 단계에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바로 창업자 만능주의다. 현 시대에 왜 창업자가 창업 결과의 모든 열매를 떠안는가? 라는 자본주의에 몇 없는 철학적 질문에, 경영자들은 너무 쉽게 이렇게 답한다. "창업자는 리스크를 감당하기 때문에, 그 결과를 가져갈 권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성장한 회사로부터의 나오는 결실이 모두 창업자가 감당한 리스크에 대한 보상으로 과도하게 이해될 여지가 있다. 회사의 결실은 근본적으로 창업 그 자체가 아니라 창업의 결과 구성된 회사와 회사의 참여자로부터 나온 것이다. 부동산 청약권을 팔 때 먼저 계약한 것에 대한 프리미엄을 붙여서 팔듯이 창업자가 경영자로서 창업의 프리미엄을 가져가는 것과, 창업의 결과물 전체가 창업의 보상으로 간주되는 것 차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리스크를 감당하기 때문에 보상받는다는 관점은, 한편으로는 혁신과 도전을 촉발하는 좋은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창업자 개인이 짊어지는 불안과 과로 그리고 과도한 리스크를 너무 쉽게 허용하고 정당화하는 면이 있다. 노동이 사회적인 보조와 보호 안에서 이루어지듯이, 창업도 사회적인 보조와 보호 안에서 육성되어야 한다. 


창업자들은 모두가 나노슈트를 입은 일론 머스크가 아니라 우리 평범한 이웃들이다. 하루에 3시간을 자고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들다가 누군가는 성공해서 유튜브에 나겠지만, 누군가는 쓰려져서 그대로 사망할 수 있다. 창업은 우리 모두가 충분히 택할 수 있는 훌륭한 선택지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개인의 혹사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개인의 혹사가 역경을 딛고 일어난 창업자 스토리로 우상화되는 것은 주술적인 행위이며, 성공한 창업자는 자신의 회사를 포함한 모든 권리를 얻을 수 있다는 문화는 사회를 일종의 창업 도박판으로 만들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누구 혼자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우고 실패와 성공 모두를 뒤집어씌우는 문화는 우리 사회를 새로운 위험으로 끌어들인다.



 마리 토끼 잡기 : 달과 화성에 사람을 보내는데이걸   리가 없잖은가?


우리는 완전한 시장주의를 거절해야 한다. 완전히 모든 것 - 노동의 질과 형태, 노동시간, 노동의 범위, 임금의 수준 모두를 그저 시장의 자유경쟁에 맡기면,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게임 <사이버펑크 2077>에서 묘사되었듯 극소수의 모든 것을 가진 창업가와 전문직들, 그리고 시장경쟁에 완전히 개방된 하청업체 또는 아웃소싱 노동자로 나뉘어진 모래시계형 계급 사회에 살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일부 모습을, 아직 선진적인 법제도와 문화가 확립되기 전에 자본시장이 먼저 진입한 개발도상국에서 보았다. 그것은 한국의 옛날 모습이기도 하고, 한국이 현재진행형으로 악화시키고 있는 현장이고, 또 아직까지 여전히 개척되지 않은 한구석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간헐적 아수라장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파의 주력 홍보 문구인 혁신과 보상, 그리고 좌파의 주력 홍보 문구인 보호와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 모두 잡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 모두의 참여와 합의다. 듣기 싫어도 반대파에게 마이크를 줘야 한다. 노동자도 참여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서 - 노동자가 있어야 기업이 있는데, 기업의 제반사항을 결정하는 데 노동자가 참여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노동 없이 어떻게 생산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노동이사제와 같은 노사공동결정제도, 연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 대안적 기업체제, 직장내 민주주의와 같은 경제체제의 민주화를 법제화하여야 한다. 여러분과 여러분이 가입한 정당이 그것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새롭게 등장한 많은 딜레마들을 안고 있다. 저금리 · 양적 완화 · 불평등의 가속 · 고용 유연화 · e스포츠-아이돌 직캠-유튜브라는 새 육체로 부활한 현대의 3S…. 사회와 사회의 문제가 너무나 빨리 변했기 때문에 20세기의 이론으로는 우리 시대의 문제를 15%도 설명할 수 없다. 돌과 유리로 봉해진 폐허 위에서 우리는 현대적 맨손으로 시작해야 한다. 롤즈는 물론이고 맑스도, 베버도, 그람시도, 폴라니도, 케인즈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동시대인 - 서로뿐이다.



우파적 파토스에 좌파적 에토스 그리고 기술자의 로고스로


막막하지만, 우리는 결코 환상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 환상은 바로 '원래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라는 환상이다. 원래부터 그런 것은 없다. 인간 사회의 조직들은 모두 인간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쩔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어쩔 수 있다. 두 마리 토끼는 반드시 잡을 수 있고, 반드시 잡아 내야만 한다. 못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왜 창업과 자기계발 유튜브에서 '너는 반드시 할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라고 하는 주장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이 세상에 정치경제적 혁신과 개혁을 제공하자는 말 뒤에 '너는 반드시 할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라고 덧붙이는 것은 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좌파는 썩어빠진 자본론 1권 뒤에, 우파는 자기 큰아버지 돈다발 뒤에, 중도라는 자들은 공기업 대비 NCS 문제집 뒤에 숨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열정에 기름을 붓자.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혁신과 보상, 보호와 분배.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 

우리는 반드시 할 수 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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