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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r 06. 2021

나루시선, 34

                                    서나루





상관없는데 


상관이 없어야 하는데

상관이 없어야만 하는데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네


마지막까지 어쩜 그렇게 친절할까요 

나를 차단한 그 사람은

헛바람에 감기 걸릴까봐

운명의 문을 닫고 나가준 거야

친구야 그게 열리면 니가 다칠 수도 있어


나는 다쳐도 돼요. 된다니까요. 칼에

찔리는 만큼 아프기만 할래, 아니면 정말 찔릴래? 물어도

덜컥 덜컥 남의 심연에 대가리를 들이밀었네

죽여 달라니까요! 

죽음은 진짜잖아요! 나는 진짜를 원해요!

찔리는 것은 진실이고 아픔은 외롭기만 했어


울음이 터지는 날에는 방바닥에 엎어져 몸을 비틀었지

그 숱한 날들을 벙커 밑에서 헤매고 

양수 속에서 익사했네. 외로움이 너를 죽여버릴 수는 없다는 거

너를 죽이는 것은 그게 아니라

인연들이라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지

그건 너무하잖아. 나는 진짜 인연을 만날 거라니까


장난 전화를 걸다가 호되게 혼이 나는 아이처럼

전화를 돌리다가 정말 덜컥

그 인연이 진짜로 나를 찾아 왔을 때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는 미처 몰랐네


제일 좋아하는 향기가 나는

이름과 나이가 없는 얼굴들을 마주쳤을 때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는 검표원들이 방문했을 때

자세를 낮추고 

그들이 지나치길 바랬어야 했다는 걸 깨닫기에는 늦었지


나는 내 눈 위에 눈을 그려 넣었네 (그들이 그려 넣기 전에)

코 위에 코를 (그들이 그려 넣기 전에)

입 위에 입을 그리고 (그들이 그려 넣기 전에)

손등에 표를 그려넣었어. (그들이 직접 발급하기 전에.)

검표원들은 만족하고 나서야 돌아갔네.


그들이 나와 같은 류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눈치채고 나서야

벌어진 골절 사이에 발갛게 김이 오르고 있었지

하하하, 얼마나 다쳤으면 안까지 다 보이네! 부상을 견디는 것은 

아픔을 견디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라고

아픔 따위를 아파하는 사람이 진짜 부상을 견딜 수는 없다고


나는 다쳐도 되는 사람인줄 알았네

다치는 게 무엇인지 몰랐으니까. 

인간의 진실을 똑바로 쳐다보고 싶었네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으니까.


이제는 인연을 칼처럼 끊는 사람이 고마워지는 고개를 넘었어

다들 고마워. 덕분에 살아 있어.

차가 밟고 지나간 감나무 열매처럼

마음이야 수습할 형체도 안 남았지만

아픔이 살아남은 자의 특권임을 가르쳐 준 거야


시체처럼 부푼 고독에 울다 지쳐 잠들 수 있는 소중한 기회

너를 피해갈 수 있는 특권

여러분, 너무 너무 고마워.

나는 이게 여러분의 선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어.










Photo by Masha Rostovskay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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