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루 Mar 15. 2021

제한-타협 이론과 함께
제한을 넘어서며

나루의 직업상담 칼럼 005 - 힘든 청소년 선생님들을 위하여

여러 진로상담 이론 가운데에서 현실에 대한 설명력이 가장 강력한 이론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이론은 바로 갓프레드슨(또는 '고트프레드슨', L. S. Gottfredson)의 제한-타협 이론일 것이다. 갓프레드슨 이론은 직업포부발달단계 이론과 진로선택 · 진로상담과정이론으로 나뉘어져 있다. 


직업포부발달단계 이론은 아동기 발달이론의 직업적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직업포부발달은 총 4단계로 구성된다 ; 크기와 힘 지향(3~5세), 성역할 지향(6~8세), 사회적 가치 지향(9~13세), 내적이고 고유한 자아 지향(14세~).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지향의 각 과정들은 아동들이 자신의 직업 포부를 무에서 유로 형성해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아동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의 상태에서 시작하지만, 자신에게 적절하지 않은 범주에 해당하는 직업을 단념하면서(제한) 남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타협)해나가는 것이라고 갓프레드슨은 판단하고 있다. 물론 개개인마다 그리고 문화권마다 발달 단계의 급간(interval)과 구체적인 나이와 내용 등이 다르기 때문에 해당 단계를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성장과정에서 어떻게 기초적인 직업 범주를 습득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지를 단계적으로 분류한 그의 발달단계론은 내담자 사정에 있어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그는 진로선택 · 진로상담과정이론에 있어서는 보다 전생애에 걸쳐 폭넓은 적용이 가능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론들을 제시하였다. 직업포부발달단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의 핵심 개념 역시 ‘타협’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타협하는가? 갓프레드슨은 직업적 타협을 위해 사람들은 세 가지 측면을 포기하는데, 가장 먼저 포기하는 요소가 흥미이고, 둘째로 사회적 지위이며, 가장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성역할(gender-role)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의 디테일 자체는 비록 반박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 직업 세계에 있어서 어떻든 타협과 포기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수용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작업이다. 왜냐하면 날이 갈수록 노동시장(고용시장)은 1차노동시장-2차노동시장의 구조로 양극화되고 있으며, 대학 졸업자들에게는 졸업증이 쓸모없어지는 동시에 대학 비진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과 삶의 여건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 시장이라는 현실. 그것은 계속해서 입직자들을 경제적으로 · 직업적으로 · 정신적으로 옥죄고 있다. 그러한 악화가 현대 산업사회의 발달에 따른 필연적이고 막을 수 없는 결과이든, 아니면 특정한 계급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형성된 임금노예 수준의 사다리-걷어차인 노동시장이든, 정치철학적인 판단은 역사에 맡길지라도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방황하는 내담자들을 조력해야 한다. TV와 유튜브에서는 하루종일 특정한 직업들만이 미래가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학력과 직업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모욕하고 웃음거리로 만들며, 많은 가정폭력이 자식들의 진학 · 진로와 관련되어 휘둘러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리 겉으로 차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돈이 차별하고 원청회사가 차별한다. 한여름의 불볕더위와 한겨울의 혹한이 차별하며 노동조건과 산업재해 사망율이 차별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장미경, 2018) 과정을 조력하는 갓프레드슨의 제한-타협 이론은 너무나 중요한 현대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타협과 타협의 불가피성에 대한 수용은 상대적 박탈감을 극복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적응의 무엇보다도 강력한 순기능은, 보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타협을 조망하게 돕는 것이다. 타협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희망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중요하다. 타협할지라도, 나는 패배자가 아니라 우연히 태어난 가정형편과 지역적 · 문화적 자원으로부터의 제한을 받았을 뿐이며, 진로 목표의 달성은 포기할 필요가 전혀 없고 언제나 달성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은 사람이 자기 인생에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한다. 


결국 이러한 희망이 개인에게 평생교육(Lifelong Education)의 효용과 가치에 대한 믿음을 주고, 그러한 평생교육 속에서만이 누구나 꿈꾸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제한-타협 이론은 이처럼 내담자의 타협 행동을 명료화하고 구조화하며,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하여 현실적인 여건과 대안들을 분석하고, 타협의 긍정적인 면을 재조명해주며 다시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마치 글래서(W. Glasser)의 현실치료(Reality Theraphy)를 떠올리게 하는 갓프레드슨의 제한-타협 접근은, 이처럼 한계와 사투를 벌이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내담자가 다시 시작할 희망과 용기를 찾을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나 역시도 청소년상담 장면에서 언제나 먼저 돌이켜보게 되는 것이 바로 제한-타협 이론이다. 주로 중산층에서 자라 번듯한 대학을 나온 내담자보다는, 빈민 · 탈학교 · 탈가정과 같은 여러 겹의 사회적 비극에 직면한 내담자들을 중산층으로 일으켜 세우는 커리어 컨설턴트로서의 목표를 가진 나로서는 제한받고 타협받는 이들에게 유효한 이 접근방식이 굉장히 소중하다. 특히 청소년은 자립이 거의 불가능한 위치에 있다. 경제적 능력이 충분하고 정성껏 보살피는 양육자가 충분히 뒷바라지를 해 준다면야 청소년 시기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중학교 · 고등학교의 나이에 집을 나가서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가해진 제한은 셀 수 없다. 너무 많은 것을 제약당하는 사람들은 때론 세상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있고, 무엇을 타협당하는지도 모를 때가 많다.


그러한 청소년 내담자에게 나는 제한-타협 이론의 프레임을 응용함으로써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겪는 삶의 한 부분을 상대화시킬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예를 들면 많은 탈학교 또는 탈가정 청소년들이 전문직보다는 일용직 · 비숙련직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단기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그 정도로 배웠으니까 그 정도 일을 하면 돼’ 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비록 학력과 경력이 단절되고 약간의 정신과적 어려움이 있는 내담자라고 할지라도, 상담학에서 ‘기적 질문’이라는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그의 삶에 아무런 제약 없는 상태를 가정하고 커리어컨설팅에 임해야 한다. 그의 잠재능이 완전히 발휘되면 어떤 일이든 모두 할 수 있다고 서로가 굳게 믿고, 마치 대졸자의 진로설계를 할 때처럼 직업세계에 대한 완전한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100%의 정보와 100%의 능력에의 믿음이 전제된 다음에야, 위기 청소년 분들의 꿈과 비전이 복구될 수 있다. 그리고 꿈과 비전이 복구되어야지만, 자신의 잠재능이 모두 발휘되는 행복한 일자리를 찾아 가기 위한 나머지 계획들이 수립될 수 있다. 즉, 최대화된 꿈이라는 올바른 기준점을 설명하고 나서야 진정한 지능적 · 금전적 · 시간적 제한들을 재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제한과 타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순간이며, 제한-타협 이론의 타협과정 핸들링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취약계층 청소년 또는 취약계층 내담자를 조력하기 위하여 접근하는 기본 가정 가운데 하나이다. 판단과 계획은 현실적으로 할 것. 그러나 꿈은 결코 현실에 묶이지 아니할 것. 언제나 커리어와 창출 · 창조 가치의 최대화를 기대하고 또한 요구할 것. 이러한 현실적 이상주의가 사람들의 굳어져버린 운명을 다시 흐르게 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꾸자.
-     체 게바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3-15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Anthony Aird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진로상담과 '나루의 3가지 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