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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r 28. 2021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6편

6편 - 사슬 끊기

이 글은 5편에서 이어지는 6편입니다.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5편 (brunch.co.kr)




작고 긍정적인 반대 경험


이중구속을 안고 자기고립으로 달리는 신념을 일차적으로 내버려 두었다면, 두 번째 조건과 순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작고 긍정적인 반대 경험'들과 '신비로운 행복 소문'들을 건네는 것입니다. 작고 긍정적인 반대 경험이란, 별 것이 아닙니다. 철수성 강박을 가진 상대방이 위와 같은 상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대해 결코 직접 언급하거나 신경쓰지 않으면서, 그 불안과 정 반대되는 새로운 경험들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신뢰를 말하지 않고도 실질적으로 신뢰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하고, 우정을 말하지 않으면서 실질적으로 우정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그런 체험을 제공해 주든, 타인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든 간에요.

 

역기능적 생각의 당사자는, 자신이 채택한 논리적 프레임이 세상을 설명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에게 손해만 준다는 판단이 들어야만 그 프레임(논리 사슬)을 폐기할 것입니다. 그 프레임에 반대 되는 증거들이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논박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 논리적 프레임을 깨부수기 위한 의도가 뻔히 보인다면, 라포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타인에게 그런 의도를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새로운 사례가 되어 주면 됩니다. 새로운 믿음과 신뢰와 긍정적인 재경험의 원천이 되어 주면 됩니다. 


인간은 논리적 모순을 감수할지라도 달콤함을 버리지 않습니다. 육류의 생산이 생태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아주 큰 잘못이 있음을 모르는 사람 없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냥 고기를 먹죠. 맛있으니까요. 설탕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단 음식을 아예 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뇨가 와야 끊든지 하죠. 결국엔 직접적인 달콤함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인간은 배신의 동물이고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에게 좋은 친구는 계속 곁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좋으니까요. 


첫 번째 예외가 되어 주세요. 혹은 스스로의 첫 번째 예외적 경험을 만드세요. 역기능적 믿음을 해결하겠다고 나서지 않으면서도 역기능적 믿음이 쓸모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작고 긍정적인 반대 경험'이 되어주거나 그런 사람이 되어 준다면, 역기능적 논리 사슬에 응축된, 반대 방향으로의 통찰의 힘은 깨어날 것입니다. 그 통찰의 힘이 언젠가는 첫 번째 예를 지목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야, 이게 더 좋아." 


그런데 당신이 만약에 누군가에게 그런 깨달음의 선물을 주는 사람이라면 제가 한 가지 일러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가 당신이 직접 생각을 바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설득당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선택했다고 믿더라도 개의치 말기를 바랍니다. 치유의 목표는 인정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한 조력과 기여가 전부 다 인정받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온 김에 여러분께 꼭 일러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도울 때도, 한편으로는 조심해야 합니다. 때론 욕 먹으면서도 치유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치유 과정에서 내가 누명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력자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할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하고, 그런 억울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많은 라포가 쌓일수록 많은 전이가 일어나고, 인격이 잘 발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이감정을 잘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비로운 행복 소문


이중구속의 고통을 일으키는 역기능적 신념 사슬을 끊어주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원리는, 제가 '신비로운 행복 소문' 이라고 이름붙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행동을 지속했을 때 미래에 주어질지도 모르는 좋은 보상의 여러 사례들을 소개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다루었던 '작고 긍정적인 반대 경험'이 지금 여기의 확실한 보상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미래의 보상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누군가는 이걸 하고 나서 이렇게 되었대!", "나는 이걸 해 보니까 나중에 이렇게 되어서 너무 좋았어. 너도 해 봐!"라고 촉진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은 반두라(A. Bandura)의 사회학습 원리가 적용되어 있기도 합니다. 타인의 삶에서 이미 검증된, 미래에 얻을 수 있는 결실을 상기시키며 새로운 건설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사용할 수도 있고, 타인에게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서 변동비율강화계획에 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변동비율강화계획이 이렇게 큰 위력을 갖는 까닭은 보상이 언제 주어질지 알 수 없지만, 계속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보상받는다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동물이 어떤 진화 경로를 통해서 미래의 랜덤 보상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지는, 그저 한 세대를 살아갈 뿐인 우리로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추론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각적인 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보상을 크게 느끼는 것이, 한 동물이 지금 여기서 포기하고 주저앉지 않게 하는 유용한 기전이 되어 온 것이겠지요.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신비로운 행복 소문'은, 이처럼 미래의 보상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킴으로써 역기능적 신념 사슬의 자학적이거나 파괴적인 효과를 경감합니다. 신념 사슬은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사슬의 본체를 이루는, 경험 그리고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된 믿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믿음이 결과적으로 촉발하는 행동입니다. 조금 더 다르게 살아본다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신비로운 행복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이 두 부분에 모두 작용할 수 있습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행운에 대비하기 위하여서는 더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행운에 다가가기 위하여 실질적으로 필요한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역기능적인 신념 사슬은 그 주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고통스러운 긴장을 느끼게 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떄, 미래에 대한 희망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절망의 논리 사슬을 자기 주인의 손으로 직접 폐기하도록 이끄는 효과적인 약속인 것입니다.



사슬 끊기


자, 지금까지 우리는 약간의 시간 동안 사람의 머릿속에는 단지 우울한 생각, 단순히 기쁜 생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형성된 생각하는 논리 사슬들이 존재하며, 그것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음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도무지 득이 될 것이 없는 해로운 생각의 사슬들이 이중 구속의 고통을 일으키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격려와 대화를 통해서 그 사슬들을 안에서부터 붕괴하게 할 수 있음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 사슬의 존재를 가장 뚜렷하게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강박의 유형은 철수성 강박이지만, 모든 각각의 사슬이 저마다 나름의 경험이자 논리라는 점에서 다른 강박의 유형에도 사슬들은 물론 존재합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사회적으로 그리고 관습적으로 전승되어온 관계유형으로 규정해야만 안심하는 규정성 강박, 모든 중요한 인물과 한없이 가까워지고 융합해야만 안심하는 접근성 강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가 방금 이 한 문단에서만 '모든'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쓴 것처럼, 이러한 강박들의 공통점은 바로 모든 것에 대하여 한 번에 하나의 원칙을 적용하고 통제가능하도록 움켜쥐고 장악하려고 하는, 실현될 수도 없고 실현되어서도 곤란한 마술적 당위성 위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관계에 대한 세 가지 흔한 유형의 강박을 볼 때 몇 가지 공통적이고 호환 가능한 통찰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연성입니다. 그리고 유연하게 예외를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하나의 법칙이나 결과물이 비슷한 인간관계들간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고 (수평적 예외) 어제의 법칙이나 결과물이 내일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시간적 예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공포와 실망감을 솔직하게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정직한 마음입니다 (삶이라는 예외). 


누군가 저에게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신앙심 깊은 사람인가요, 냉정한 사람인가요, 철두철미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생각없이 사는 사람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현실적인 인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현실적인 인간이란 이 세계를 파악하는 자신의 정신, 그리고 그 정신 안의 믿음과 기대와 스키마와 같은 세상의 복제본을, 실제 세상과 가장 가깝게 파악하고 머릿속에 움켜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너무 비현실적인 기대도 하지 않지만, 바로 그 자세 때문에, 너무 비현실적인 절망도 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사람에게는 삶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광신도 열광도 없습니다. 세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 사슬 다발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암세포처럼 과도하게 성장하는 비현실적인 믿음의 사슬을 잡초처럼 솎아내며 건전하고 유용한 경험 사슬들이 내 안에 머물도록 관리해 줍니다.


그러니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나를 떠나 간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정량화해서 판단한 내가 보잘것 없을 수도 있음을 압니다. 홀로될 수도 있어서 불안하고, 홀로되어서 아프고, 내가 사람들에게 간절히 걸었던 기대가 박탈되어서 실망스럽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희망의 출발점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도 희망적인 약속들과 소식들은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이 순간도 당신의 인생과 재능이라는 근본적인 희망의 공장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 균형잡힌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당신의 일을 계속하세요. 



이것이 제가 저 세 가지 강박을 뚫고 살아오면서 

오늘도 그것을 뚫어내고 계신 분들께 드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Joshua Eckstei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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