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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r 28. 2021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5편

5편 - 논리 사슬의 원리와 역기능적 논리 사슬 다루기

이 글은 4편에서 이어지는 5편입니다.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4편 (brunch.co.kr)



사슬의 공존


자 이제 우리는 감정과 생각, 판단과 직관이 자극으로부터 적절한 유기체의 행동을 촉발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동등한 '논리적 사슬' (또는 '행동적 사슬')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 그 논리적 사슬은 당연히 일부는 선천적인 것이고 대다수는 학습되는 것이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비교적 단순한 사슬이 있을 것이고, 여러 차례의 복잡하고 사회적인 형성과정을 거친 복합 사슬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예측은 그 사슬들이 서로 모순되더라도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인간은 믿을 만하다."

"인간은 믿을 수 없다."

이것은 방금 제 머릿속에 있는 두 개의 논리 사슬을 뽑아 온 것입니다. 주어+서술어+목적어라는 하나의 논리적 연쇄로 되어 있으니까 사슬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순적인 사슬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머릿속에 모순을 품고 사는 것은 마치 혼돈과 분열을 낳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상충되는 두 논리 사슬을 동시에 다루는 능력이야말로 정신건강의 핵심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실제로도 모순적'이기 때문입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아 보셨습니까? 예. 하지만 믿음에 보답하는 듬직한 사람도 보셨습니까? 예. 두 개의 모순은, 각자가 사실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 모순이 아닙니다.



“훌륭한 지성의 잣대는 대립되는 두 개념을 동시에 마음에 품으면서도 여전히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상황이 가망 없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알면서 동시에 어쨌든 상황을 바꾸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것”
"Test of a first-rate intelligence is the ability to hold two opposed ideas in the mind at the same time, and still retain the ability to function. One should, for example, be able to see that things are hopeless and yet be determined to make them otherwise. "

-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생각의 사슬들은 실제 삶의 경험들이 붙어서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 실제 삶은 인간은 믿을 만하다라는 논리 사슬과 인간은 믿을 수 없다는 논리 사슬을 동시에 뒷받침하는, 모호한 곳입니다. 우리 정신은 실제 세상을 시뮬레이션 하기 위해 실제 세상이 그대로 반영된 논리적 명제들을 생성하고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념 체계는, 그러한 개별 논리 사슬들이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힘을 가하는 거대한 트램펄린과 같습니다. 트램펄린에 가해지는 장력은 서로 다른 방향입니다. 만약 어느 한 스프링만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거나 아예 끊어져 버렸다면 우리는 그 위에서 '균형을 잃고' 넘어져버릴 것입니다.


조금 다른 비유를 들어 볼까요? 모든 투표권자는 저마다의 생각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각자의 논리가 있어요. 그 논리들이 평균적으로 수렴된 결과가 의회나 행정부의 결론입니다. 우리 머릿속도 그런 것과 같습니다. 단 하나의 문장도 그 문장이 형성되게 된 경험이 있고 그 문장이 되풀이하는 논리가 있습니다. 어떤 논리는 희망을 말하고, 어떤 논리는 절망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의 강도에 따라, 어떤 사슬은 해진 고무줄처럼 잘 끊어지는데 반해 어떤 사슬은 밧줄처럼 굳건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트램펄린의 예를 든 것 처럼, 우리에게 현실적이고 도움이 되는 판단을 이끌어 주는 여러 논리 사슬간의 밸런스가 무너져버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여기서 심리학이 여러분에게 건네는 희망의 소식이 시작됩니다. 인류는 아직 초보적이긴 합니다만 생각을 상당 부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 수행자들이 직관적으로 창조하고 심리학이 과학적으로 완성한, 위빠사나(마음챙김) 명상와 같은 여러가지 정신 제어 방법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혹은 체계적 둔감화 기법과 같은 행동치료 기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슬 다발에 대한 분해 · 조절 · 삽입


이러한 기술들은 바로 인간 지능을 역이용한 '의도적' 사슬 통제 시스템입니다. 아주 똑똑하죠. 우리는 이제 자신의 마음에 걸리는 사슬의 장력(張力)을 인지적으로 조절하고 오히려 다른 방향의 힘을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LHPA Axis로 대표되는, 혹은 열정 · 격정 · 격노 · 번뇌라고도 할 수 있는 행동 추진의 사슬들이 나를 강하게 잡아당길 때, 우리는 그것과의 정신적 융합을 거절하거나 재평가하는 등의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원치 않는 장력을 상쇄하는 새로운 힘을 언제든지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단순히 우울한 사람에게 우울한 생각만 나오고 기쁜 사람에게 기쁜 생각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정신 안에는 여러 학습과 생물학적 셋팅의 결과 작동하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의 장력이 걸려 있는 논리 사슬들 밀고 당기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이유이며, 더불어, 그 우울한 신념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자극-반응 사슬들에 우리는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완전히 망가진 뇌는 없습니다. 희망 없는 생각도 없습니다. 망친 인생, 망한 인생도 없습니다. 절망은 거짓말입니다. 레밍(Lemming)들이 낭떠러지로 달려가고 있을 때, 선두 레밍의 머리를 돌려 주거나 모든 레밍들을 집어서 다른 곳으로 던져 줄 손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레밍 전체에 대해서 저주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과학의 빛 아래에서 결코 집단이나 집합에 겁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에 너무 겁 먹고 압도되면 정치적으로는 쉽게 전체주의자가 되고, 개인적으로는 쉽게 신비주의자 · 종교주의자가 됩니다. 집단이 마치 신적인 주체저럼 느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찬양과 수용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착각이에요. 세상에 개입할 수 없는 힘은 없습니다. 부분의 합을 하나하나 건드림으로써 우리는 집단 전체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과학의 제1속성은 바로 '쪼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울이나 절망감도, 특정한 불합리한 논리 사슬이 다른 모든 사슬들을 압도하고 있을 뿐이며, 인지적 기술을 통해 그 당김힘을 빗나가게 하거나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모든 개별 감정들을 설득한다면 누구나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이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수성 강박이 두려워하는 것은 상처의 재경험


그러면 다시 철수성 강박의 예로 돌아가 봅시다. 철수성 강박의 소유자들이 주변을 짜증나게 하고 실망시키면서까지 되풀이하는, 상처의 경험으로부터 온 실망의 사슬들을 다시 봅시다. "이 사람은 결국엔 나를 떠날 거고 영원한 인연은 아무것도 없어", "어차피 인생 혼자 사는 거야", "나를 이해해 주는 진정한 친구는 절대 만날 수 없어", "나는 혼자 살다 죽을 거야. 인생은 혼자니까", "보증 서 줄 것도 아닌데 가족같은 친구가 어딨어"…. 이런 말들을 우리는 우선 반사적으로 반박하려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의 그런 생각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싸우지 마십시오. 그 논리 사슬이 나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경험과 체험이 만들어 낸, 어느정도 자체적인 생명력을 지닌 논리의 사슬이라고 존중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철수성 강박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논리 다발의 생성 원리에는, 타인의 배신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상처 · 충격들에 다시 고통받지 않으려 하는 방어 기제가 숨어 있습니다. 접근이 기대를 · 기대가 실망을 · 실망이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재경험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개인공간으로 말 그대로 철수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서는 의도적인 인지적 주의집중을 통해여 그 논리의 사슬을 강하게 움켜쥐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런 사슬을 꽉 쥐고 있을 때에도, 단순히 그 사슬을 비난하거나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줄게'라고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정말로 부처와 같은 성품을 가지고 헌신적인 간호사와 같은 행동을 해 줄 수 있다고 해도, 그러므로 개벽 같은 경험의 질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양적인 문제가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함께하는 시간이, 누군가 평생동안 수많은 사람을 경험한 시간을 넘어서기는 어렵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여러 수많은 인간관계를 전부 다 재경험시켜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더 위험한 것은, 만약 그렇게 약속하다가 실패하면 이제 '예외적인 경험을 약속하는 사람' 자체에 대한 거부라는 새로운 논리 사슬이 생성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그런 사슬을 꽉 쥐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슬은 상처입니다. 상처 자체를 의식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이러한 교착 속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저는 심리학 칼럼을 쓰면서 단 한번도 절망을 말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희망의 원천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우리의 지능입니다. 상황을 분석적으로 본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이 사례의 경우, 교착을 풀어주기 위한 희망은, 바로 교착 그 자체가 생성하는 고통의 존재입니다. 



역기능적 사고는 바로 그 역기능 때문에 붕괴할 가능성을 지닌다


철수성 강박은 고통을 막기 위해 고통을 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강박은 고통을 야기합니다. 누군가를 원하는데 동시에 상처받기 싫어서 밀어내려고도 하는, 스스로에 대하여 이중구속(double bind)적 행동을 낳는 철수성 강박은 당연히 더 큰 고통을 야기합니다. 실제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없고 자기 자신에게 해만 되는 논리 사슬은, 그 무쓸모한 고통 자체 때문에, 사실은 겉으로는 아무리 강해 보여도 언제든 폐기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고무줄이 작은 칼집에도 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배신의 경험과 고통을 피하려는 욕구에 따라 형성된 철수적 행동경향이 힘의 특정한 방향이라면, 그 완고한 지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리고 의미없으면 의미없을수록 정반대의, 그 사슬 자신을 폐기하려는 통찰의 힘이 무의식 수준에서 반대 방향으로 응축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기능적인 논리 사슬이 통찰의 힘에 스스로 무너지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물론 상황마다 정말로 다르겠지요. 하지만 통찰의 힘을 증폭하는 방법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를 트라우마적 논리사슬 이외의 편안하고 즐거운 경험으로 초대해 줌으로써, 인간의 의식이 쾌적함 속에서 자유롭게 놀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로운 놀이의 시간 동안에만, 의식은 자신의 삶을 랜덤하게 되짚어보고 모든 논리들에 잠재된 통찰들을 한 번씩 점검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그 시간을 벌어다 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그 논리 사슬을 자꾸 상기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논리 사슬은 의식에게 검증의 대상인 동시에 애착의 대상이 됩니다. 세상에 자신의 소유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자신의 신념을 구성하는 논리 사슬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 어떤 사람도 '너를 뜯어 고쳐주겠다'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인이 본인 의지대로 본인을 고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음을 고치는 원리 역시 이런 욕구와 궤를 같이합니다. 어긋난 뼈는 누군가가 직접 맞춰 주어야 하지만 생각은 전적으로 자기 정신 안의 것이라서 결국에는 스스로의 힘과 통찰을 사용해서 개선하는 것입니다. 심리학계에서 근본적으로 전문 심리사를 수술대의 의사가 아니라 함께 가는 조력자로 포지셔닝하는 까닭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상대의 어떤 논리적 가정들과 신념 · 경험의 해석방식들 · 행동 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콕 집어서 옳다-그르다를 말하지 말고, 일단은 인정하고 새로운 경험이 그 사람의 마음 안에 녹아들기를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특정한 논리 사슬이 겉으로 얼마나 강해 보이든, 그 강한 장력조차 그것에 주의를 기울일 때만 그 주인을 지배하는 가상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나 자신이나 혹은 상대방의 마음을 고쳐버리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희망은, 인간의 주의력에 한계가 있음에서 옵니다. 사람은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호흡의 감각에 집중하는 동안은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되새길 수 없습니다. 그 단순한 원리를 응용한 것이 명상입니다. 해로우며 역기능적이고도 강력한 논리 사슬이라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건드리지 않는다면 무력화할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6편 (brunch.co.kr)

Photo by Štěpán Vraný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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