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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Apr 14. 2021

제도에는 실증적 근거가 필요하다

흉악범을 살려두고 싶지 않은 것은 누구나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이 글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로 유죄 판결이 확정된 자에 대하여는 여성가족부장관이 당해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는 ‘신상공개제도’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하라" 라는 글쓰기 과제의 일환으로 기술된 글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문화를 돌아보면, 특히 성범죄는 폭력 · 절도 · 횡령 · 사기 등과 같은 일반 범죄에 비해 보다 인격적인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아동 성범죄는 더더욱 그러하다. 다른 범죄가 인간 사회에서 비교적 이해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비교적 보편적인 악덕인 탐욕이나 공격성에 기인한다면, 성범죄는 무언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정한 욕망과 뒤틀린 음침함과 같은 특별히 더 역겨운 인격적 결함에서 기인한다고 이해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 내부 요인뿐만 아니라 범죄의 파급력도 성범죄를 특별히 더 문제적인 악행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인간의 성적 자아개념은 자아정체성, 자존감, 자기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또한 성범죄 피해자가 입는 막대한 정신적 피해에 대하면 부차적이지만, 성범죄 과정에서의 신체적 피해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성범죄 때문에 성적 자아개념에 중대한 부상을 입게 되는 고통은 어마어마하다. 성범죄 피해는 단지 스트레스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성적 관계의 도식에 상당한 변형을 일으킬 여지가 있으며, 상처를 복구하는 데에 상당한 양의 자원과 시간이 소모된다.


성범죄가 인간의 자기개념을 내면 깊숙히 침해하고, 매우 안 좋은 기억으로 남으며, 막대한 정신적 부상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관리되고 감시되어야 하는 범죄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다시 언급하지만 아동 성범죄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심지어 성인들조차 피해자들의 일부는 성범죄 피해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데, 자아개념이 대단히 희박하여서 자신의 정신을 침해하는 타인의 영향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아동들이 입는 피해는 구체적인 연구 결과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늠이 가능하다 - 그것을 차마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성범죄자의 재판과 처우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범죄 처벌의 형량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성범죄자의 신상 공개 문제이다. 성범죄 처벌의 형량 문제는 언제나 같은 레퍼토리로 반복되었다. 그것은 살인 형량과의 비교이다. 하지만 살인 형량은 기본적으로 10년 이상의 징역으로 판결이 나고 있어서 성범죄와의 직접 비교는 어렵다. (현직 검사에게 사실확인한 건) 양형요인에 따라서 ± 5년이 책정된다고 할 때(법무부 살인범죄 양형기준 참조), 가끔 뉴스기사로 올라오는 엽기적으로 적은 형량의 문제적인 판결을 제외하면 성범죄 형량이 살인과 아예 비등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들이(혹은 시민들이) 살인보다 더 큰 형량을 설정하면서까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범죄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십여년 전 원자력발전소 납품비리 범죄자에게 15년 형이 책정되는 사례가 있었고, 주가조작 · 내부자거래 등 증권범죄 역시 징역 13년까지 선고된다. 이것은 겉으로는 누구의 목숨도 해치지 않았으나, 실질적인 파급력에 있어서 살인보다 더 큰 문제의 소지가 있는 행위로 인정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인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중한 범죄이고 범죄 경중의 기준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주가조작으로 인해서 수천명의 생존 기반인 재산을 날리는 것이나 심지어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생각해본다면 '어떤 범죄는 살인보다 더 심하다' 라는 생각도 아예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례를 볼때 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형량의 책정은, 단지 살인죄를 기준으로 놓고 본 경쟁이라기보다는 범죄가 다루어지는 사회의 맥락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성범죄는 살인죄보다 더 강력한 보복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글에서 조금 낯선 표현들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법적 처벌이 보복이라는 명제이다. 나는 언제나 이것이 사실임을 강조한다. 현대사회에서조차 형벌을 코팅하고 있는 여러 달콤하고 허위적인 미사여구는 많다.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반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벌을 내리기 위해…. 법에 대한 그런 표현들은, 마치 범죄자 위에 군림하는 질서수호자로서 국가가 있고, 그 국가가 권위를 이용해 징벌한다는 신화적인 사고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착각이다. 착각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거짓말이거나. 징벌의 주체로서 국가의 실체는 없다. 국가가 조직되는 원리는 근본적으로 인간들의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에 기초한다. 그것은 단지 관공서와 법리, 연결된 서류 몇 장, 그리고 사법부의 권총과 수갑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그런 기호적 점들을 이어주어서 하나의 작동하는 힘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모든 종사자들이 '이 시스템은 작동하리라, 그리고 내가 규칙에 따라주는 것이 모두에게 득이 되리라는 믿음과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지속시키는 것은, 그 행동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적인 만족감이다. 그러므로 법이 범죄자에게 철퇴를 내리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선(善)의 대리자로서 국가-정신이 집행하는 권선징악 따위가 아니라, 집단의 행동이며, 집단의 행동을 허용하는 우리의 복수심이다. 나쁜 짓을 한 반사회적인 놈들에게 보복하는 것, 그것이 법과 형벌의 핵심이다. 나머지는 그 과정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사법이 교정의 역할을 한다는 것, 나아가 '회복적 사법', '회복적 정의'라는 굉장히 진보한 논의까지 발전하게 된 것도 굉장히 최근의 일이다. 원래의 사법은 그런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철퇴'였지. 그런 법을 형성하게 된 시민적인 콘센서스도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법의 원본이다. 성범죄자 신상공개 청원에 가보면 언제나 댓글은 분노와 복수심, 보복에 대한 열망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비난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일차적으로 정당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 역시 범죄자에게 시민들이 보복하려는 마음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단지, 그러한 복수의 열망이 벌거벗은 열망 그 자체가 아니라 허위적이고 가식적인 국가-신화의 옷을 입지 않게 하고 싶을 뿐이다. 법의 근본이 복수심에 있다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게 하고 싶을 뿐이고, 언제나 신성하고 완전무결한것처럼 보이는 정부와 사법의 존재도 사실은 반사회적 존재에 대한 복수심과 보복의 통쾌함이라는 원초적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시민과 국가의 연결고리를 의식할 수 있게 된다. 내가 키워내고 있는 야수이자 경비견의 두 머리를 가진 사냥개(국가)가, 도대체 누가 준 먹이로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복수심을 성찰하면서 동시에 국가란 무엇인가를 성찰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면서 국가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의 내면은 내면대로 작동하고 국가는 국가 자신의 독자적 논리대로 작동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시민(=나)의 책임을 삭제해버리고, 국가를 괴물화하고, 국가를 신화화한다. 그것은 이름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달리 말하면, 국가가 일종의 '더러운 욕망 처리반' 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공권력을 휘둘러서 노점상을 쓸어버리거나, 성소수자들이 거리에 나와서 설쳐대지 못하게 하거나, 시민단체 지원금을 삭감하거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시민권을 얻지 못하게 하거나, 빈민들의 기초수급비를 잘라 버리게 만드는 일이 사실은 내심 아주 만족스러울지라도, 그것은 보수적인 국가가 하는 일이기에 나와는 상관없다고 간주하고 나만의 '중산층적 상징마을'에서 익숙한 사람들끼리 하하호호 재미있게 사는 생활이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아렌트적 의미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어나가는 '악의 국민성'이라고 부른다.


범죄자의 처우 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한 원리를 적용된다. 우리는 '시민의 가면'을 쓰고는 이렇게 말한다. "회복적 사법이 필요합니다. 범죄자에게도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사회의 책임도 맞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모든 사람들에게는 인권이 있기 때문에 범죄자를 교정하고 재활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의 그림자 아래 숨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 X끼 저거 결국 잡혔네. 저 X끼 그냥 다 X됐으면 좋겠어."


우리는 정말 '시민의 가면'을 쓰고 하는 말들을, 국가주의 · 관료주의 · 엄벌주의라는 한계를 가진 검찰과 재판부 앞에서도 그대로 주장할 수 있는가? 가령, 성범죄자에 대하여 신상공개명령을 하는 것이, 어떤 실증적인 효과를 거두었느냐고 질문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의 법리적인 정당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기존의 표준화된 보복 단위로서 징역형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형태의 보복인 것인데, 그렇게 하는 근거가 충분한지 의구심을 표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범죄자가 사회로 다시는 기어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기쁜가?


나는 사회학과 학부를 다니면서 많은 학우들과 비판사회학에 관해 배우고 이야기했다. 그 중에 가장 화두가 된 사회학자(혹은 철학자)는 단연 푸코였다. 푸코의 업적에 관해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돌이켜 보건대, 나와 학우들은 수많은 시간동안 푸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우리들 가운데 단 한 명 · 단 한 번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규정된 성범죄자에 대한 신상공개가 일종의 판옵티콘이라거나 일종의 낙인이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해 보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보통 푸코에 관심이 많은 사람 중에, 국가권력을 최대화해가지곤 인간쓰레기들은 싸그리 사형시켜버리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푸코에 동감한다면 대부분 권력과 권위를 의심하는 성향을 타고난, 나와 같은 좌익이고 또한 페미니스트이다. 그러나 그러한 학생들 중에서도, 성범죄자의 신상공개명령이 어떤 판옵티콘과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거나 낙인이라거나 생명정치라고 문제제기 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에 내심 만족스러워 했지.


이것은 신상공개를 하자거나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의 도덕성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질문하는 시민인 나와 우리 모두에 대한 반성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날카롭고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비판사회학을… 우리 자신의 사회에는 적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국민'을 권위와 권력에 순종하는 숙명론으로, '시민'을 권위와 권력을 의심하고 견제하고 저항하고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멤버쉽으로 간주할 때,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국민이 아니라 시민으로 포지셔닝할 때, 우리는 정말 권력에 대하여 그렇게 하는가? 아니면 판사님이 우리의 등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세월호 선장과 n번방 조주빈에게 최대형량의 '사이다 판결'을 내릴 때 흐뭇해하는가?


도덕 감정의 측면에서 보자면, 나 역시도 성범죄자들을 당장 분쇄기에 넣어서 닭 모이로나 주고 싶은 사람에 포함된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목숨이 그다지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소중한 인간이 소중하지. 벌써 70억명이나 있는데, 왜 범죄자까지 살려두어야 하나? 내게 성범죄자 신상공개명령에 관한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굉장히 문제점이 많지만 아무튼 그 새끼들이 그렇게라도 돼서 기쁘다"라고 답할 것이다. 사형제에 관해 묻는다면. "사형은 안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죽이고 싶다" 평생 가부장제와 여성혐오, 성차별과 디지털 성폭력과 싸워 온 누구에게나 성범죄에 대한 복수심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안타깝게도, 이런 도덕 감정을 국가 형성의 공론장에 도저히 데려갈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답답함과 짜증에 이가 갈리는 선택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사법에 대하여 원하는 것이 정말 복수가 맞는가?

우리는 복수심이라는 도덕-감정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법을 원하고, 사법에는 분명히 그런 요소가 있다. 사법은 의외로 포퓰리즘적이다. 사법도 정부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는 시민의 눈치를 본다. 주로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눈치만 봐서 문제지만…, 아무튼 보기는 보는 것이다. 애초에 흉악범의 얼굴을 까발리라는 대중적인 요구가 없었으면, 그러한 조치가 왜 시행되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정말 복수만을 원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단지 도덕-감정을 지닌 분노한 영장류로서 요구할 뿐인가? 아니면 타자에 대한 직관적인 역겨움에 저항하는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범죄자를 교화하고 교정하며 다시 고립된 상태에서 사고치지 못하도록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요구하는가? 나아가 인권과 시민권이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믿고 범죄자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어서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기까지 하는가?


만약에 우리가 사법에 대하여 원하는 것이 정말 단지 속시원한 복수가 아니라 범죄자의 교화와 사회로의 재통합이라면, 성범죄자 신상 공개 제도는 우리에게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제도 연구자들과 법학자들의 보고들은, 성범죄자 신상 공개가 그 범죄 예방 효과 자체에 있어서 별로 소득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헌법학적인 문제, 즉, 과잉금지 · 이중처벌금지 · 적법절차원칙 등에 저촉되는 문제 등은 아예 논외로 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실제 인간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거나 실제 인간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헌법적인 문제는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으며 때로는 양립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용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동산투자는 헌법이 허용하기보다 금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지대추구는 소유권의 남용에 의한 주거권의 침해를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법은 실제 인간들의 수익추구 앞에 효력을 잃는다. 한편 혁명과 같은 행위도 헌법이 당연히 금지하지만 사람들에 의해 그 헌법 자체가 수정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법은 인간의 이익에 후행하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성범죄자신상공개제도는 정말 재범 방지의 효과가 있는지 논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까닭이 징벌과 속시원한 보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 교정학적인 효과 그리고 재발 방지에 대한 기대에 있다고 주장하기 위하여서는, 이 제도가 정말로 범죄를 예방해줄 뿐만 아니라 헌법과 인권을 비례성을 넘어서서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범죄의 억제라는 실질적인 효과만 있다면 위헌이나 인권제한과 같은 것의 정당화는 금새 뒤따를 수 있음을 보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이익에 대한 거래(trade-off)로서의 인권/헌법권의 희생이 전제된 것이다. 마치 소시지 보존료로 아질산나트륨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포르말린은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이, 희생이 이익을 과도하게 초과하게 된다면, 즉, 범죄억지력이 별로 없거나 실효성보다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우리는 이 법으로부터 역겨운 성범죄자에 대한 복수의 의미밖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법은 다른 여러 악법들과 마찬가지로 쓸모있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은 잘못된 입법례로 분류되게 될 것이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정말로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오는가? 정말로 역효과보다 순효과가 많은가? 이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수의 연구가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중형주의 형사제재의 실효성 평가연구(Ⅰ) : 신상정보등록 및 공개제도의 실효성 평가연구』(김지선 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t al., 2020 ; 박솔잎, 2021에서 재인용)는 당해 제도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가장 방대하고 총체적인 연구보고서이므로, 이를 먼저 살펴보자. 우선 재범억제가 관건일 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신상정보 공개제도의 재범 억제 효과는 미미하다.


김지선 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성범죄자의 재범률은 다른 강력범죄 재범률보다 상대적으로 낮"지만 " 신상정보 등록 및 공개제도가 성폭력범죄의 재범비율 감소에 영향을 미쳤는지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ibid.) 이러한 분석은 통계에서 뒷받침된다. 성범죄자 인터넷 신상공개시스템인 <성범죄자알림e> 도입 이후에도 성범죄 재범률은 등락을 반복했을 뿐, 감소하지 않았다. 성범죄 재범률의 추이에 있어서 <성범죄자알림e> 도입과 무관하게 단지 2000년부터 2018년부터의 시계열만 놓고 보았을 때, 59.7%에서 43.1%로 16.6퍼센트포인트 줄어든 것과 비교하면, 성범죄 재범률을 억제하는 데에 공개제도 자체의 통계적 효과량이 유의미했다고 주장할 근거가 부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상 공개 여부가 재범률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분석 결과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시사한다. 성범죄자 명단의 단순 등록대상자보다 공개대상자의 재범 위험성이 더 높게 나타난 것이다. 보고서 작성팀은 이것이 "신상정보 공개제도가 성범죄자의 재범을 억제하는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이 중대한 성범죄자일수록 신상정보공개명령을 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나타난 단순상관인지 아니면 낙인효과 · 갱생 의지의 좌절 · 사회통합 실패로 인한 좌절 등으로 나타난 탈억제와 좌절공격 행동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심리학적 관점에서도 후자의 가능성 또는 후자의 설명량이 압도적이라고 생각한다. 종신형을 받아서 평생 감옥에서 살다 죽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다시 사회로 돌아올 사람이라면, 범죄자에게 낙인과 고통 주기는 일반 시민에게도 전혀 이로운 일이 아니다.


만약에 성범죄를 신상공개로 방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어떤 성범죄가 신상공개되느냐는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성범죄의 공개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굉장히 제한되어 있다. "2018년에는 발생한 성범죄사건의 2.1%, 기소된 성범죄자의 4.7%만 신상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기소[되었다] (…) 공개된 성범죄자가 전체 성범죄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극히 일부분이어서 신상정보 공개제도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이나 지역주민이 공개된 성범죄자가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잘못된 안전감'(false sense of security)의 우려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지선 et al., 2020; 481)


또한 성범죄자를 미리 지역사회에 고지함으로써 선제 대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효과만을 놓고 본다면, 이미 성범죄자 거주지역 부근에 대한 우편고지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지역사회에 대한 고지가 집행된 상태에서 인터넷을 통해 이중으로 신상공개를 하는 것이 어떤 초과이익을 거둘 수 있느냐는 지적도 유효하다. 연구보고서에서 김지선 등은 ? 주거·직장·대인관계에서 겪는 어려움 ? 심리적 스트레스 ? 자경주의(지역사회에 신상정보가 공개된 성범죄자를 대상으로 이뤄지는 주민들의 직접적 공격과 혐오 표출)로 인한 피해 등의 부작용은 대상자의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재범억제 효과를 상쇄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idid.)


단, 성범죄자를 고지하는 것 자체가 갖는 순효과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성범죄자 우편고지 이후 뚜렷하게 증가한 것은 지역주민들의 안전 예방 행동과 자신감이었다. 86.8%의 주민들이 "성범죄자 거주 사실 인지 이후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예방 행동을 취"했으며, 평균 3.89개의 구체적인 예방행동을 실행했다.(ibid., 451) 또한 주민의 55.9%가 한편 자신의 동네에 성범죄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 성범죄피해 상황에서 이전보다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52.3%의 사람들은 자신이 성범죄 피해를 당할까봐 이전보다 더 두려워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ibid., 442) 즉, 두려움과 안전감 그리고 예방행동을 동시에 상승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기능들은 우편고지에 대한 것이지 성범죄자의 일반적인 정보공시에 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여러 학자들도 이러한 순기능을 선택적으로 취할 수 있도록 단계적이고 세부적으로 성범죄자 정보의 고지를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범죄자 신상공개 그 자체에 대한 순효과도 어떤 부분에서는 존재한다. 재범억제 효과에 대한 범죄자 본인의 주관적 인식은 효과적이었다. "60[%]~80%의 대상자가 신상정보등록 및 공개제도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데 도움이 되며,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더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응답하였고, 모두 다 나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나 혼자 변하기 위해 노력해봐야 별 소용없다고 느낀다는 것에 대해 80%이상의 대상자가 반대의견을 제시" 했다고 보고한다. (ibid., 501) 또한 "공개대상자의 80%이상이 의심 행동을 줄이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웃 아동과의 접촉 기회는 차이가 없었다. (ibid., 502)


그러나 이 법에 대한 다른 일반적인 우려도 현실화되었다. 가족과의 단절, 지인들의 회피 등 인간관계의 부정적 경험, 구직난과 직장에서의 승진 불이익, 따돌림 등과 같은 부정적 경험, 집주인이나 동네사람의 요구로 이사를 한 주거 관련 부정적 경험, 이웃 주민으로부터의 자신과 가족의 괴롭힘 피해 경험은 공개대상자의 재범억제 효과에 대한 인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경험이 있는 공개대상자는 신상정보 공개제도가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평가하였다."(ibid.) 또한, 이 제도 자체가 불공평하다고 인식하는 범죄자들에게는 이 제도의 주관적인 재범억제 효과가 전혀 발휘되지 않았다. (ibid., 503)


즉, 성범죄자신상공개제도는 성범죄자의 자살 시도율을 17.4%까지 끌어올리고(ibid., 500) 29.1%를 실직시키며 32%를 이혼이나 별거하게 하였고 20%가까이가 집주인의 이사 요구로 이사하게 되는 등, 성범죄자를 확실히 괴롭게 만든다. 하지만 범죄자를 괴롭게 만드는 것 자체가 범죄를 막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괴로움은 (괴로움 자체가 통쾌하긴 한데 형사법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성범죄자의 사회통합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상술하였듯이, 성범죄자가 사회통합이 안 되면 그것 자체가 재범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정말로 성범죄의 재범을 막아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몇 가지 재미있는 것들이 있다. 첫째. '징역' 이다. 벌금형보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범죄자의 재범 위험성이 더 높았던 것이다. 즉, 징역을 살고 나온 성범죄자는 벌금형보다 오히려 성범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도 통계적 착시가 숨어있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징역형이 나올 확률은 성추행보다 성폭행이 더 높은데, 실제로 저지르기도 성추행보다 성폭행이 더 어렵기 때문에, 징역형의 행동심리학적 처벌효과가 아니라 성폭행의 행동적 곤란함이 재범률을 낮춘 것일 가능성도 있기에 언급해 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벌금형에 비한 (그리고 당연히 집행유예에 비한) 징역형 자체의 '참교육' 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상식적으로, 징역형과 벌금형 모두 가능한 특정 범죄에 대해 서로 다른 형이 선고되었을 때, 벌금을 당한 사람과 징역을 당한 사람 중 누가 더 확실히 학습효과를 얻을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껏 계속되어온 한국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은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를 양산한 능력폭정이자 국가살인과도 같은 행위였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범죄의 재범을 방지하는 것으로 확인된 두 번째 수단은 바로 '전자발찌'다. 전자발찌 부착명령을 받았을 때 재범위험성은 유의미하게 감소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성폭력치료프로그램 수강'이다. 성폭력 치료프로그램을 수강하거나 이수하게 될 경우에도 재범 위험성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감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범죄자 신상공개 제도가 성범죄의 재범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없다는 것은 국내 연구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공개제도를 유지해 온 미국의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Zgoba, 2008 · 2010 · 2012 ; Tewkbury, 2012 ; 앞의 책에서 재인용) 연구자들은 "신상정보 공개제도의 존폐에 대한 심각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ibid., 504) 상술한 바들을 종합해볼 때, 성범죄자 신상공개 제도 자체의 효과는 성범죄의 재발률과 없거나 아니면 오히려 역효과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효과란 성범죄자의 재발률이라는 타겟 통계량 자체에 대한 효과를 말한다. 단지 재발률이 아니라 가해자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의 이차 피해 · 가해자의 재활과 갱생 억제 등 다른 '부작용'들을 언급한다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거의 다루지 않았지만, 헌법재판소에서 상당한 논란 끝에 겨우 합헌 결정을 유지했던 판례와 같이 법학적으로 매우 불량한 점도 심각한 문제의 소지가 있다.


우선, 성범죄자 신상공개가 성범죄자의 가족에게 끼치는 문제에 대한 보고들을 짚어 보자. 성범죄자 신상공개제도 도입 직후부터, 이미 여러 선행연구에서 이러한 우려는 반복되었다. 이병희는 자신의 저서 『프라이버시의 보호와 범죄자 신상공개』에서 이러한 가족에 대한 인권 침해의 문제점을 언급한 바 있다. (이병희, 2001, Page. 123 ; 윤지영, 2004에서 재인용) 또한 성범죄자의 가족이 괴롭힘과 폭행 피해를 입은 사례가 보고되었다.(김지선 et al., 2020, Page. 501)


이경재는 "신상공개로 초래되는 당해 범죄자 및 그 가족 등에게 가해지는 현실적인 위협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신상공개로 초래된 범죄자 및 그 가족, 심지어는 주변인물 등에게 수없이 많은 신체적 · 정신적 위협이 가해진다고 보고되고 있으며, 당해 범죄자와 그 가족이 동네에서 추방당하는 예도 있다. 나아가 우리 나라 사람들처럼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자칫 신상공개로 인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택할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신상공개의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는 사태들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이경재, 2002) 라고 질문하였으며,


정신교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혈연중심주의적 사회라는 점에서 신상공개는 단순히 공개되는 자 혼자만의 수치심 유발과 인격권 침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가족 전부의 수치심과 사회적 모멸감을 수반할 수 있다." 고 지적하였다. (정신교, 2010) 비록 법적인 단계에서 성범죄자 정보공개제도가 단지 린치 행위로 전락하지 않게 하기 위한 시도는 있었기는 하다. 현행 아청법의 모체인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2005)에서는, 제20조 「범죄방지 계도」에서 "공개대상자 및 그 가족 등에 대한 부당한 인권침해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현행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2021)에서는 제55조 「공개정보의 악용금지」에서 성범죄 공개정보를 성범죄로부터 보호할 목적 외에 고용, 주택 또는 사회복지시설의 이용, 교육 및 직업훈련 등에 사용함으로써 공개대상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예 모르지 않는 한, 이 글을 쓰는 나부터도 내 주변에서 성범죄자를 배제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극심한 헌법학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우리가 헌법학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당연히 불법성의 정도 측면이다. 앞에서 어떤 종류의 범죄는 살인보다 더 강력한 법적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합의가 물론 가능하다고 다루었지만, 그럼에도 법적인 비례성과 형평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상당히 불편하고 조심스러운 제기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개인에게 입히는 피해의 심각성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범죄도 살인보다는 낫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범죄가 신상공개제도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과 동등하거나 훨씬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살인 · 중상해 · 방화 등은 어떠해야 하는가?


연구보고서를 소개한 기사에 한 네티즌은 '음주운전자알림e, 폭행자알림e도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살인이나 중상해를 입혀서 장애를 유발한 사람도 사회복귀가 가능한데, 성적인 수치심을 느끼게 하였다고 해서 사회복귀를 막아버리는 것은 이상하다' 라고 주장한다. 물론 성범죄가 해치는 주된 대상이 단지 성적인 수치심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피해자의 손상을 단순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범도 공개되지 않는데 성범죄자가 공개되는 제도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직관을 떨쳐내기 어려운 것이다. 정말 일관성 있게 모든 범죄자를 다 공개해야 하나? 그런 생각에 수긍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필 왜 성범죄만? 이러한 문제제기는 단지 세상을 단순하고 감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고, 단지 성범죄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 댓글을 다는 여성혐오자들만의 것도 아니다. 신상공개제도가 도입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4년 8월, 이화여자대학교 법학대학 석사논문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 셋째, 불법성의 정도 측면에서 볼 때, 신상공개의 대상이 되는 성범죄보다 더 큰 불법성을 가지고 있는 여러 범죄들, 예컨대 미성년자 살해행위, 미성년자 약취유인행위,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인질강도행위 등은 신상공개를 하지 않으면서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신상만을 공개하므로 형평의 원칙상 옳지 않다고 한다." (윤지영, 2004)


이렇게 살펴보았듯 성범죄자의 신상공개 제도, 특히 성범죄자의 전 시민에 대한 인터넷 신상공개 제도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효과가 없다는 것이 국내외 연구자들의 전반적인 결론이다. 만약 우리의 목표가 범죄자에 대한 고통스러운 보복이라면, 성범죄자 신상공개 제도는 매우 성공적인 제도일 것이다. 성범죄자가 사회에 발붙일 수 없게 하는 사실상의 명예형이자, 일자리와 주거에 지장을 주는 지위에 대한 제재로써 확실한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범죄자에 대한 복수만이 우리 사법의 목표인지, 그리고 복수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공짜 복수'가 맞는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또다른 범죄나 또다른 부작용, 그리고 또따른 인권 침해로 우리 공동체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오지는 않는지 심사숙고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사법의 다른 쟁점인 사형제도에 관하여서도 동일하게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이러한 심각한 고민은 단지 개인적 미덕의 차원에서 권장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정치적 공동체에 책임이 있는 시민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결정이 다른 불특정다수 국가의 선례가 되는 국제시민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이다. 성범죄자 신상공개 제도는 우리의 복수심을 충족시켜 주고 '공개되었으므로 안전하다' 라는 하나의 가상적인 자기효능감만을 갖게 할 뿐, 진짜 성범죄 재발의 방지와 관련 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처벌과 낙인보다는 교화와 사회 통합이 훨씬 더 싫지만, 그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생산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단서조항을 남겨두고 싶다. 이러한 모든 논의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모든 논의가 틀렸다는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성범죄자의 신상공개가… 옳았다면? 다른 통계적 착시에 의해 재발방지효과가 없어 보였을 뿐, 실제로… 압도적인 효력이 있다면? 중요한 것은 어떠한 법안에도 단지 단순히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검증하는 것이다. 검증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검증하다 죽는 것이다. 그것이 시민의 삶이다.





[출처 모음]
(1) 박솔잎, 「인터넷 성범죄자 신상공개… 재범방지 효과 ‘미미’」, 『법률신문』, 2021.02.04 : https://www.lawtimes.co.kr/Legal-News/Legal-News-View?serial=167759
(2) 김지선 et al., 『중형주의 형사제재의 실효성 평가연구(Ⅰ) : 신상정보등록 및 공개제도의 실효성 평가연구』, 2020 : https://www.kic.re.kr/upload/FILE_000000960060149//html/BBS_202103300347093260.htm
(3) 윤지영, 『성범죄자 신상공개제도에 관한 연구』, 2004 :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Article.do?cn=DIKO0009541425&dbt=DIKO
(4) 이경재, 「성범죄자 신상공개의 법적 문제점 고찰」, 『저스티스』, 2002.02, 5-23(19 pages)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948289
(5) 정신교, 「성범죄자 신상공개의 예방적 효과」, 『법학연구』 39호, 2010.8, 269-290(22 pages)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509113&language=ko_KR
(6) 이병희, 「프라이버시의 보호와 범죄자 신상공개」,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총서』 , 2001.12, 9-193(186 pages) :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157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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