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루 Apr 17. 2021

인권이라는 하나의 정치철학

공공복지와 인권은 보험이고, 철학이며, 생존수단이다

스스로 영웅이 되지 않으려 한 자


“오바마 케어”, “문재인 케어”, “박근혜 케어”…. 오늘날 수많은 사회정책 가운데에서도 보건복지 정책은 특히 이렇게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에서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은 선출된 대표자(실질적으로 대표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이고, 여러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인 법률 패키지를 편의상 입법을 가장 열심히 추진한 대표자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를 들어 민주당 의원 박용진의 ‘박용진 3법’은 구체적으로는 『유아교육법』 · 『사립학교법』 · 『학교급식법』 개정안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저 세 가지를 다 외운 사람은 없다. 前대법관이자 現교수인 김영란이 국민권익위원장 시절 제안하여 유명해진 ‘김영란법’의 풀네임은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교수님에게 뭘 사다 드릴 때 ‘이거 부정청탁금지법 위반은 아닐까?’ 라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교수님 이거 김영란법 위반은 아니겠죠?’라고 하지. 하지만 정작 김영란법의 당사자인 김영란 전 위원장은 2015년 기자회견에서 ‘김영란법’이라는 명칭보다는 법의 내용이 드러나는 ‘부패 방지법’ 정도로 줄여서 써 달라는 뜻을 밝힌 적이 있다. (한국경제, 김봉구 기자, 2015.03.10) 


법을 발의한 스타 한 사람의 인격을 부각시키기보다는, 법이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드러난 이름을 부름으로써 법의 내용을 부각시켜달라는 김영란 전 위원장의 요청은 굉장히 선진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이것은 깊은 정치철학적 숙고에서 나온 결정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현대사회가 중세사회와 어떤 부분에서 다릅니까? 라는 질문에 ‘탈주술화’(Dis-enchantment) 라는 개념으로 답한다. 탈주술화는 ‘문화의 합리화 과정, 삶의 영역의 기술화, 초자연의 주변화’라고 요약될 수 있는데(김진혁, 2015), 이것을 나의 방식으로 압축하자면 ‘인과관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효과를 구성하는 요인의 효과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가짜 영웅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 세계라는 실재


우리 사회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양자역학의 수준까지 들여다보지 않는 한, 우리는 뉴턴역학의 원리로 돌아가는 행성 위에서 밥을 먹고 산다. 이것은 우리가 물리적 세계에 제약받고 있으며 오직 물리적인 세계에 대하여서만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리적 세계에는 영혼이 없다. 토르나 제우스,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들도 없다. 만약 이 세상에 실제로 헤라클레스가 있었다면 그는 네메아의 사자에게 1분 13초만에 잡아먹히고 천 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 양반이 백미러 쳐다보고 돌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세계가 객관적이라고 해서 모든 인간이 다 그 객관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담론(언어, 이데올로기, 에피스테메, 스키마)의 색안경이 있기 때문이다. 주술적(=종교적) 담론은, 객관적 현실과 상관없는 주술적 사고 속에서 영웅을 만든다. C.E. 30년에 심정맥혈전증(추정)으로 사망한 예수가… 누군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살아있듯이.


예를 들면 박정희는 한국의 보수주의 세력에게 일종의 경제개발의 신 정도로 간주된다. 박정희의 이름 아래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의 경제개발에 실제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어떤 구체적인 요인이었는지는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신화적인 영웅 한 사람이, 다른 모든 구체적인 요소들의 순효과를 자신의 업적으로 ‘담론적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흡수하고 나면? 프레임 장악 끝이다. 저임금-고강도 노동, 베이비부머 인구의 노동력, 노동운동이 탄압되는 병영문화국가, 애치슨라인의 최전선에 대한 미국의 대량 원조, ‘어떻게 했는진 모르지만 아무튼 해낸’ 대단한 기술진들과 노동자들, 중화학공업의 경제적 이점, 고부가가치제품 제조 수출국으로서의 포지셔닝, 삼저(三低) 호황과 같은 20세기 후반 ‘한강의 기적’을 도와주었던 기적 아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맥락들은 모두 반인반신 박정희의 공적 하나로 흡수되고 논의가 끝나 버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웅을 소환하는 사고방식은 막대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진리 여부의 지평에서는, 무엇보다 사실에 맞지 않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 가장 문제이다. 하지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다고 해서, 혹은 예수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믿는다고 해서 꼭 인성이 못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사고의 단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이긴 해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다. 치명적인 문제는 정치적 판단의 지평에서 발생한다. 정치적 판단은 우리 실제 생활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영웅을 소환한다면, 영웅이 존재하는 곳에는 그 영웅이 구해주고 보살펴주어야 할 백성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를 실제 세계에서 백성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을 채워줬다고 간주되는 자는 숭배받으리라


20세기말 한국 정치-경제 장면에서 영웅이 박정희였다면, 21세기초 한국 정치-경제 장면에서의 영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삼성전자의 영웅 이재용이다. 오늘날 많은 주식투자자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추천하는 종목은 삼성전자인데, 주식 입문자들이 ‘삼성이 망하면 어떡하냐’라고 물으면 투자자들은 – 필자를 포함해서 – 십중팔구 이렇게 대답한다. “걱정하지마. 삼성이 망하면 한국도 망해.” 삼성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국제적 시장경쟁력과 아직 공개하지 않은 기술력을 감안하면 그것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국 국적 기업으로서 삼성의 힘이 실재한다고 해서, 삼성이 한국을 완전히 먹여살려주고 있으며 그 대표자인 이재용이 자본주의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고 간주해버리는 오늘날의 담론은 이 사회가 주술적-정치적 사고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이것을 단지 ‘주술적 사고’라고 표현하지 않고 주술적-정치적 사고라고 일컫는 까닭은, 주술이 근본적으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힘에 대한 조작(operation)이지만, 주술은 힘에 대한 비합리적 믿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비합리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힘이다. 합리적인 힘이든 비합리적인 힘이든 상관없이, 인간은 ‘힘 같은 것’이라고 인지된 존재 앞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사실관계를 검증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살기 위해 생각하고 살기 위해 상징물을 다룬다. 사람들이 특정한 대상을 숭배하는 것이 쉽고 · 집단 구성원과의 통합에 유리하고 · 또한 그렇게 배웠으며 ·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냥 숭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가 실증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담론에 의해 판단되기 쉬운 까닭인 것이다. 



주술적 영웅의 탄생


숭배하는 자가 있다면, 숭배받는 자가 있다. 불특정다수에게 생각과 상징이라는 화폐가 있다면, 그 화폐를 빨아들이는 자가 바로 이들이다. 왜 빨아들이는가?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 것이 자신이라고 믿게 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종교 지도자도, 휘하 신앙인들을 진실로 만족시켜주지 않고서 – 그리고 그들을 만족시켜준 것이 바로 나라고 철석같이 믿게 하지 못하고서 성공한 사례는 없다. 개신교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그 공동체에 대한 내부 보고를 들어보면, 내가 다 들어가 살고 싶을 정도로 행복해 보인다. 신자들이 서로를 그렇게 끔찍하게 아껴주고 보살펴주는 공동체는 사실상 한국의 그 어떤 기존 공동체도 구현하지 못한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은 종교적 강박과 집단압력의 결과로 형성된 결과이겠지만,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고 근본적으로 다르겠는가? 중요한 것은 주관적으로 지각하는 행복이 일차적으로 존재하고, 그리고 그 행복의 귀인을 집단의 영웅에게 돌리는 이차적인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의 허기를 채워 주는 만족감을 생산하는 시스템이 구축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공로로 만들어진 것이든 아무튼 내 덕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주술적 사고를 전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술적 영웅들이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광고하는 기술이다. 신앙인들을 착취함으로써 압도적인 정서적 만족감을 제공하는 힘을 통해서 이만희라는 종교적 신이 되든지, 아니면, 노동자-시민들을 착취함으로써 압도적인 경제적 만족감을 제공하는 힘을 통해서 박정희라는 정치-경제적 신이 되든지, 신화화되는 기제는 동일하다. 


무엇이 나의 밥을 먹여 주는가? 오, 파란색 버튼이 나의 밥을 먹여 주는구나! 그러나 ‘스키너의 심리상자’ 안에서 실험용 생쥐에게 사료를 급여하는 것은 파란색 버튼이 아니라 심리학자 스키너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오, 박정희가 나의 밥을 먹여 주는구나! 배가 터질 때까지 코카인 설탕물을 누르는 생쥐와 인간은 행동의 근본에 있어서 전혀 다르지 않다. 아무리 광신도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사실 신경과학적인 층위에서는 아주 합리적이고 냉정한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한정된 세계관 안에서. 신천지 신도들이 나의 아픔을 메워 주는 가족이 되어 주거나, 박정희가 사람들을 아파트에 살 수 있게 해 주거나, 아니면 오늘날 이재용이 한국을 먹여살려 주거나,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이 주술적 현실으로 한 집단의 머리 안에 셋팅되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영웅이 가진 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술적 영웅주의의 탄생이다.



영웅주의 정치철학이 있는 곳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정치철학은 없다.


이러한 주술적 영웅주의 세계관 안에서, 한 사람의 영웅을 세우고 우리가 그 영웅의 수혜자들이 된다면, 그것은 상술하였듯 일단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를 신민(臣民)이자 백성으로 전락시킨다. 신민과 백성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권과 헌법적 권리이다. 인권과 헌법적 권리에 대한 인지가 희미해졌을 때 어떤 대형 참극이 벌어지는지는 바로 한국의 역사에 잘 드러난다. 평등의 정치철학이 뼛속 깊이 각인되는 시민혁명의 역사를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한국사람들은 예부터 정치적 우두머리를 영웅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우익들이 해방되기도 전부터 이승만을 영웅시하는 것도 그러했지만, 좌익들이라고 다른가? 좌익도 좌익대로 남북한 전역에서 김일성과 스탈린을 영웅시했다. 그 영웅들이 민초들에게 (민트초코 아님) 가져다준 것이 인권과 사회권이었는가? 전쟁과 학살과 분단이었다. 그들이 영웅시했던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 그리고 이승만이 일으킨 학살으로 남한에서만 민간인 25만 명 · 군인 14만 명이 사망했으며, 전투와 폭격 피해를 제외하고 민간인 100만 명이 학살당했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위원회, 2005 ; VOA, 2011.6.24).


한국전쟁은 이제 너무 먼 이야기라고 느껴지는가? 그럴 수 있고 또 그러기를 바란다. 육지와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은 충격적으로 잔인하고 필요 이상의 감정적 부담을 초래하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의 극히 고통스러운 죽음이 추모를 위한 고통의 포르노로 배포되거나 개혁을 부르짖는 스펙타클에 동원되는 것도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경제적 영웅주의의 믿기 힘든 결과일지라도 단지 통계적으로만 기억되고 차라리 잊혀지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래, 끔찍한 이차외상스트레스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민간인 학살은 잊어버려라. 나는 공감피로(Compassion Fatigue)와 대리외상(Vicarious Trauma)으로 천천히 무너져가는 운동권 동료들을 보고 심리학의 길을 걷게 된 사람으로서, 역사는 중요하니까 꾸역꾸역 기억해야만 한다고 종용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당신과 나, 우리의 세계는 우리가 어떻든 감당해야 할 것이다. 지금-이곳의 문제들은 죽은 조상들의 소유가 아니라 당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감사하고 끝나서는 안 된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평화가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당신을 포함한 현대인들의 삶은 사실상 돈 걱정, 노후걱정, 아플 걱정 가득한 전쟁 같은 일상에 노출되어 있다. 비록 현대 사회가 제도적인 평등을 성취했으며 겉보기에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질적이고 체험적인 측면에서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산업적으로 평등하게 대우받는가? 직장에서 평등한 산업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가? 당신이 참여한 산업에 대해서 마땅한 몫을 요구할 수 있는가? 


2020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논란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른바 ‘인국공 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시민으로서 당연한 사회보장서비스와 고용보장을 약속받는 것이 이제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경쟁자들을 걷어차버리고 쟁취해내야 하는 하나의 ‘대회 1등상’ 것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경쟁상품이 된 사회에서, 그것을 단지 노동자의 권리 · 시민의 권리로서 얻게 된 소수의 사람들은 지탄의 대상이 된다. 권리(Rights)라는 정치철학적 개념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누리는 복지가, 부당하게 쟁취한 특혜가 아니라 단지 비대칭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사회적 권리의 일부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는 시험 안 보고 쉽게 들어왔는데, 왜 나보다 빨리 안정적인 고용계약을 제안받을 수 있어?’, ‘왜 나는 고생했는데 너는 고생안해?’ 라는 울분과 공격성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유치하고 배타적인 공격성이, ‘정치-경제의 영웅에게 인정받아서 안정적인 삶을 하사받으면서 사는 삶’이라는 정신의 감옥 안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스스로의 위축된 꿈과 마음 그리고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버둥인 것이다.



누가 뭘 배우고 연구하든,
결국엔 경쟁에서 이기고
부자 되는 길만 좇을 수밖에 없는 사회라면
인공지능이 아니라 더 좋은 걸 개발해도
지옥문 앞을 장식할 거적때기밖에 안 되는 겁니다.

─ 이영준 · 임태훈 · 홍성욱,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中




영웅주의는 평등이라는 개념을 죽여야만 존재할 수 있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가? 영웅이 있는 곳에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자원을 정치-경제의 영웅들이 독식하고, 그들이 모든 자원의 창조자로 간주되고 있어서, 결국 당신이 누리는 약간의 보상과 권리도 그 영웅이 보잘것없는 나에게 시혜적으로 내려준 하사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권리(The Rights)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당신이 요구해야 마땅한 권리 · 당신이 누려야 마땅한 삶의 질 · 그리고 당신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에 대한 보상은 당신에게 거의 지급되지 않는다. 극히 불합리하게 책정된 임금체계와(여기서 임금은 노동을 통해 버는 시장임금만을 말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지급되는 각종 수당, 보조금, 무료급식과 무료교육, EITC, 할인제도와 같은 사회임금도 포괄한다) 인정되지 않는 인권 · 사회권 때문이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홀몸으로 벌어서 써야 한다. 나이가 많이 들어 노쇠하거나 사고를 당해서 장애를 가진다면? 끝장인 것이다.


권리의 부정과 임금의 삭감. 그것이 사회적 비극의 구체적인 원인이고, 그 원인들을 가리는 섬광탄이 바로 상징적 영웅주의를 통해 숭배받는 정치-경제적 영웅들의 후광이다. 회사의 회장과 사장, 스티브잡스나 일런 머스크 같은 창업가들이 바로 그 우상이다. 실질적으로 사회 발전의 공로와 인정이 돌아가야 할 대상에게 마땅히 돌아가지 않고, 단지 사회와 산업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들이 혼자서 그 공로의 주인인 것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전쟁영웅들이 분단된 나라의 동족을 학살하고도 떠받들어지는 것과 같이, 오늘날은 수많은 경제 범죄와 노동 범죄 그리고 때로는 가습기살균제참사와도 같이 대량 살상을 벌이고도 여전히 경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거짓 영웅을 만들어서 그에게 모든 공을 돌리지 않으려면, 그래서 그 영웅이 사람을 죽이든 약탈한 임금으로 떼부자가 되든 내버려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결국 진짜 우리 세계의 공헌도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누가 사회를 먹여살려 주는가?’ 라는 오래된 논쟁거리에 답해야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논쟁에 대해서는, 오히려 답하기를 거부하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이다. 이것은 답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랫동안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답이 없는 유치한 질문이기 때문에 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각자도생 무한경쟁의 논리와 맞서는 권리라는 정치철학


나는 이것을 ‘내 덕분이지 논쟁’이라고 부른다. “나라의 발전은 지도자의 공로인가 아니면 인민의 공로인가?”, “회사의 발전은 임원진의 공로인가 직원의 공로인가?” 그리고 모두가 말한다. “그건 다 내 덕분이지!” 마치 미숙한 인간들이 유치하게 싸우는 것처럼, 롤에서 미드 차이인지 정글 차이인지 싸우는 것처럼(물론 이것은 정글 차이가 맞다), 하나의 집단적인 생산-유지 활동에서 누구의 공로가 제일 크고 누가 제일 많은 셰어를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다 노동자 덕분이지’라는 명제에 모든 것을 걸었던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몰락하자, 이제 ‘다 기업가 덕분이지’라는 명제에 전 세계가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리고 이제 중산층들은 모든 것이 기업가 덕분이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자신도 그 기업가의 일부이며 헐값으로 하급 노동자들의 노동을 뽑아먹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자본가 계급(사실상 이는 기술자 계층을 포함한다)과 노동자 계급 둘 중 한 집단을 생산성의 근본 원인으로 추대하고, 다른 집단을 기생충 취급하는 우파의 주장과 극좌파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유치찬란한 영웅주의이며, 결국 모든 사람 각자의 기여와 권리를 인정하기보다는 어느 한 쪽에서 새로운 주술적 영웅을 옹립하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답은 영웅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산업내 밸류체인과 산업간 분업체계 안에서 모두가 서로에게 의존함으로써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많이 버는 자도 적게 버는 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반드시 누려야 할 기본권과 사회권을 가지고 있으며, 삶의 필수적인 기본재들은 어느 영웅이 사회에 기여했기 때문에 그에게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받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평등하게 지급해야 하는 것이고, 모든 인간은 타인의 기본권과 사회권에 드는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다. 


인권에는 돈이 든다. 그래서 인권을 옹호한다는 것은 돈을 쓴다는 의미이다.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에게 내 주머니 털어서 돈을 쓴다는 의미이다. 그에게 인권이 있기 때문에, 그사람 인권을 지켜주는 데 필요한 돈을 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내가 그 돈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혹은 일터에 안전장비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개의치 않고 공공의 돈을 받고 공공의 비용으로 안전장비를 설치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권이고 사회권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런 말들이 ‘급진’, ‘좌파’, ‘혁명’과 같은 아주 불온하고 불편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사교 모임에 나가 보면, 정치 이야기는 아예 그 자체로 죄악시된다. 정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가령 민주당이나 정의당을 뽑아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매년 피고 지는 꽃에 집착하지 않듯이 매번 이합집산하는 당에 집착하지 않는다. 정치는 수단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공동의 목적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동료인간의 슬픔에 함께하고 불의에 분노하는 인간으로서 인권을 지켜주는 사회에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공통적인 하나의 혜택인 ‘권리’라는 것을 누리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이 세계에는 인류가 공동으로 누릴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담론이 사라진 상태에 있다. 즉, 공공(The Public) · 인권(Human Rights) · 시민권(Civic Rights) · 사회권(Social Rights)이라는 하나의 정신적 공유 지평이 사라진 것이다. 상술한 사상들은 모두가 빨갱이 사상으로 사냥당해 거의 사라졌다. 특히,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20대 청년들에게 그 자리는 이제 거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제 단지 돈을 버는 방법들과 권리를 ‘구매’하는 방법들만이 남게 된 결과이다. 소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소설 『황혼의 반란』(2002)에서, 늙어서 쓸모없게 된 노인들을 죽이려는 젊은이의 눈을 쳐다보며 한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너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게다.”



돈이라는 유일한 구원, 돈벌이를 해치는 존재로서 저주받는 사회복지


이러한 정치경제적 담론 위에서, 삶의 충족과 위기로부터의 구원은 오직 돈의 형태로만 찾아온다. 돈은 사회의 구좌가 아니라 개개인의 구좌에 축적될 뿐이며, 그 계정에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가만이 삶의 가치를 증명해 준다는 신앙의 시대가 찾아왔다. 돈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믿음, 그렇기에 구원이 돈 이외의 방향에서 진입할 수 없다는 불안은, 돈을 가장 잘 버는 사람이 우리 모두를 먹여살린다는 환상을 갖게 한다. 그렇게 기업과 기업의 회장님들은 영웅시되고 신화화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옳고 바람직한 지도자라서 추대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불안감과 박탈감을 채워주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왜 신적인 기업가이자 경영인으로 찬양받는가? 그의 비전과 경영 실력에는 정말로 놀라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실제 투자자들 사이에서 머스크가 엄청난 개인 팬덤을 보유하고, 혁신의 아이콘으로 숭배받는 가장 큰 이유는, 단지 테슬라가 우리를 화성에 보내주고 전기차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테슬라의 승승장구하는 경영실적이 먼 훗날 자신의 주식가치를 증대시킴으로써 노인 빈곤으로부터 먹고살 길을 만들어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테슬라의 주주들은 모빌리티 기업으로서의 테슬라, 에너지 기업으로서의 테슬라만을 구매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연금으로서의 테슬라’를 구매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연금’은 어디로 갔는가? 진짜 공공노령연금, 진짜 공공의료보험, 진짜 공공주택, 진짜 공공사회부조서비스는 어디로 가고, 씨드머니가 있는 소수들만이 살아남기 위해 테슬라 주식을 사모으는가? 이 사람들이 주택을 받을 ‘권리’, 일자리를 받을 ‘권리’, 생활비를 받을 ‘권리’는 어디로 갔는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되는 권리가 있고, 그 권리를 구현하기 위해 돈이 많이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세금을 내야 하고, 돈이 적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내고 받기만 하더라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무도 누군가가 얼마나 돈 버는데 기여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얼마만큼 자원을 필요로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많이 돈을 벌었느냐고만 묻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 중에서 일단 나눠써 보자고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중산층이 되려고만 하고, 모두가 부유층이 되려고만 한다. 


그래서 사회복지에 대한 논의가 나오거나, 병사들 월급 주는 징병제에 대한 논의가 나오면 모두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는 그것을 하기에는 돈이 없어.” 그것은 마치 애초에 돈 돌려줄 마음이 없는 악성채무자의 돈없다는 소리와 같다. 얼마만큼 더 많이 벌면 지불하기 시작할 것인가? 한국이 일본만큼 부자가 되면? 미국만큼 부자가 되면? 그냥 지금-여기에서 돈을 나눠 쓰기 시작하자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는 인권이 있어서 보호받아야 하며, 사회권이 있어서 적절한 임금과 대우를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와 이웃의 사회권을 위해 지갑에서 단지 ‘남는 돈 얼마’가 아니라 ‘누구나 지금 있는 돈에서 몇 퍼센트의’ 돈을 꺼내야 한다고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왜 저 사람들한테 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인권과 사회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장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대다수 한국인에게 세금은 약탈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잔여주의와 제도주의


이러한 정치-경제적 마인드셋과 정치철학적 공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논쟁이 바로 잔여주의와 제도주의의 충돌이다. 아무리 타인에 대해 인간적인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정부가 가난한 시민에게 아무것도 조치하지 않는 자유경쟁시장이 어떤 빈민과 부랑인들을 발생시키는지 못 본 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잔여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빈곤과 기본재에 대한 비용(집, 쌀, 의료, 교육)을 부담하는 것이 결코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들 당근-채찍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채찍이 고통스럽지 않으면 왜 동기부여의 효과를 내겠는가? 아무리 들어도 소시오패스 같은 주장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 사회의 정신적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의 역할이 단지 경쟁에서 이길 재능이 없는 – 즉, 시장에서 실패한 극빈층의 빈민을 구제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잔여주의 사회복지이론은 모든 것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예컨대 앞서 연금형 테슬라투자자들의 사례처럼 노령연금조차 상품화된 사회에서, 그러한 상품을 구매하지 못한 시장경쟁의 잔여 인간들을 정부가 책임지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잔여주의 사회복지의 핵심 정신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도 노동을 통해 쟁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능력이 좋아서 큰 돈을 받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쟁취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권리는, 그것을 직접 쟁취할 여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주어진다는 점에서 권리라고 불리는 것이다. 노동과 시장경쟁을 통해서만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말은, 그냥 권리가 없다는 말과 같다. 잔여주의 사회복지론자의 관점에서 인간의 권리는 생명권 정도로 지극히 한정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앞에서 긴 시간 ‘영웅주의’에 대하여 다루었는데, 이러한 잔여주의 사회복지론은 결국 영웅주의 위에서 존재하며 영웅주의를 끝없이 소환한다. 왜냐하면 권리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회복지 급여의 지급 자체가 하나의 시혜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인류 공동체에게 당연히 받아내야 할 급여가 아니라, 자유경쟁시장에서 경쟁자를 다 몰락시키고 최강이 된 극소수의 기업가들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불쌍한 잔여 인간들에게 주는 시혜의 손길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 안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권리 같은 것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사람처럼 가장 불쌍해 보이는 사람에게 인간의 직관에 따라 자의적으로 책정된 급여가 지급될 뿐이다. 영웅과 거지의 전통적인 신화 구조가 21세기에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인권이라는 정치-철학 : 제도주의 사회복지론


반대로, 제도주의 사회복지이론은 그 이름처럼 시장경쟁의 잔여에게 복지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전체에게 제도를 통해서 복지를 부여하는 접근을 말한다. 잔여주의자들이 모든 필수재/기본재의 공급을 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상품화, Commodification), 제도주의자들은 필수재/기본재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과 권리를 누리는 데 필요한 중요한 재화와 서비스, 주택과 의료는 상품이 되지 말아야 하고 공공 영역에서 공평하게 나누어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탈상품화, De-commodification). 왜냐하면 인권이라는 개념 위에서, 이것은 당연히 요구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왜?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에.’ 


사실은 이 부분이 ‘인권’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데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이것은 그냥 하나의 추상적인 약속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인권이라는 게 있다고 치자. 어떤 일이 있어도 인권을 지켜 주자.’ 너무 곱게 제한된 교육 속에서 자라면서 인간 이하의 취급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혹은, 너무 많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고 살아버려서 ‘부족한 인간들은 모두 이런 취급으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대의 피해자들은, 혹은, 그냥 소시오패스들은 이 개념을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한다. 


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일수록, 사실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상의 선구자들이 이 개념을 쉽게 풀어서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자신의 저서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1944)에서 허구적 상품(Fictitious Commidity) 개념을 통해, 결코 사고팔아서는 안 될 우리 사회의 공동 재산인 노동 · 토지 · 화폐금융 · 생산조직을 시장이 상품으로 사고팔기 시작하면서 시민들은 가난에 허덕이며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서 쓰는 시장형 인간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경고했다.(이병천, 2020-01-02) 일해서 먹고 살 기회조차 유료 직업코칭을 받고 성형수술을 받고 메이크업을 하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고, 인류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한 뼘의 토지조차 나도 한 번 살아보기 위해 월급의 절반을 집세로 내고 평생을 집 대출금을 갚으며 사는 우리의 꼴을 보라. 그뿐인가? 세상에는 여전히 실질적인 매매혼이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쉽게 결혼할 사람을 찾기 위해, 다른 한 쪽에서는 약간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개발도상국의 젊은 여성들이 국제결혼의 형식으로 사실상 매매된다. 성매매와 성착취는 언급할 만한 복잡성조차 없다. 어떤 것은 절대 거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인권의 핵심 개념이 탈-상품화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존 롤즈(John Rawls)는 인권으로서 이러한 탈상품화된 기본재 또는 사회적 급여의 일괄 공급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중요한 사례가 되어 준다. 롤즈는 『정의론』(1971)에서 우리가 서로를 규약하는 사회적 계약을 체결할 때, 우리 각자가 이기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하나의 합의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구에 태어나기 전의 영혼들이고 앞으로 어느 대륙의 누구 자식으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 뒤에서 지구의 룰을 정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유롭고 · 평등하고 · 개방되어 있으며 · 불평등조차 가장 약한 사람에게 가장 이익이 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원초적 입장(The Original Position)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보험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다. 인권은 보험이다. 


비록 우리는 이미 어느 집안의 누군가로 태어났기에 완전한 원초적 입장을 가지는 것은 어렵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래도 앞으로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왜 공공의료보험을 지켜야 하는가? 왜 장애인 편의 시설은 반드시 공급되어야 하는가? 왜 공적 연금을 보장해야 하는가? 우리 중에서 누가 언제 어떻게 아플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공적 보험으로써 인권이 존재한다. 인권 개념을 내팽개친다면, 오직 부자가 되어야지만 늙어서 편하게 살 수 있고 부자가 되어야지만 척수 손상을 입어도 아이언맨 슈트를 입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세상에서 부자들을 제외한 99%의 사람들, 아마 당신과 나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오직 인권 보장과 보편복지라는 레짐(regime) 안에서만, 당신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어떤 손상과 질병에도 동등한 의료서비스를 받으며 편하게 살아가게 된다.


또한 이런 인권의 영역은 인류 생활수준의 발전에 따라 점점 확장되는 경향을 가진다. 한때는 사치품이었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보급되고 평균적인 삶의 조건을 구성함으로써 점점 기본재가 되어가고 있는 영역에 대해서도, 제도주의자들은 공적 공급으로의 포섭을 확대하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은 20년 전만 하더라도 아주 값비싼 특수 기술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스마트폰 없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 가능한 사람은 없다. 그러한 바, 앞으로는 스마트폰과 고속데이터 요금제는 정부가 책임지고 공급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복지의 기본 정신에는 누구나 누리는 보편적인 삶의 양식을 자신의 돈으로 쟁취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마땅히 제공하여야 한다는 평등과 공공부조라는 정치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인권 선언, 당신도 할 수 있다. 아니, 당신이 해 줘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건대, 우리는 사회복지를 보다 제도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제도화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새로운 정치철학적 인정의 체계를 세워야 한다. 


첫째, 산업시민권 : 모두가 하나의 상호의존적인 사회적 생산 네트워크이자 생산 사슬의 일부로서, 각자가 저마다의 지울 수 없는 공헌과 공덕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받아야 한다. 따라서, 생산 사슬의 유지 자체에 대한 기여행위에 대하여 시장가격으로 책정되는 임금과는 또 별개로 보상받아야 한다. 사회임금의 공급, 공공서비스의 지급, 최저생활보장과 최저임금의 인상, 강력한 안전 규제, 높은 누진세와 부동산세는 안전한 산업시민권을 구현하기 위한 필수요소다. 나는 이것을 산업시민권이라고 부른다.


둘째, 정책시민권 : 우리는 민주정 위에서 시민으로서 권리인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론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실상 자신이 실제 정치에 참여하여서 이 사회를 통제하는 정책결정에 참여할 때만이 이 시민권은 발휘된다. 그런데 하루 14시간씩 알바를 하고 돌아오면 쓰러져 자는 쳇바퀴 도는 삶에서 도대체 어떻게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가? 정책시민권은 역설적으로 노동시간 단축과 평균 및 최저임금의 인상을 통해 혼자서 편하게 누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확보될 수 있다. 정치는 사실상 여가생활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가가 있다고 해서 학교에서 시민을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이며 소처럼 일만 하는 근로자라고 가르친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나라의 이상을 그리는 민주주의적 주체성은 발휘될 수 없다. 탈국가주의적이고 시민권과 인권을 육성하는 공교육에서의 시민교육까지 제공되어야 진정한 통치하는 민주시민이 자라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정책시민권이라고 부른다.


셋째, 인권 : 우리는 총체적이고 포괄적으로 인간으로서 분배받아야 할 정당한 몫이 있다고 선언하여야 한다. 다른 모든 권리의 기본 원칙 및 논리를 셋팅하는 인권이라는 하나의 포괄적인 정치철학이 널리 논의되어 있어야만, 미래사회에서 산업과 정치 영역 안팎에서 새로운 공적 보장과 공급에 대한 요구가 제기될 때 일관적인 태도로 그것이 어떠한 지점에서 어떠한 수준으로 공적으로 공급될 것인지 논의할 수 있다. 이미 미래는 오고 있다. 건강에 대한 권리와 기초생계급여에 대한 권리는 실질적인 부족함이 많을지라도 개념적으로는 이미 어느정도 자리잡은 바가 있다. 그처럼, 최근에 들어서는 토지와 주거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도 지공주의(地公主義, Geoism/Georgeism)와 같은 이론의 형태로 점차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결국 인권이라는 하나의 정치철학 위에서 작동한다.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어떤 공간과 자원도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눠 써야 할 것이라는 생각, 우리가 자신의 노동으로 만들어낸 결실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 인류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며 분업하고 있으며 각자에게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생각, 똑 같은 하나의 생로병사를 겪는 사람으로서 리스크와 비용을 공동이 함께 나눠서 짊어진다는 생각, 사람과 사람의 삶은 존엄하고 존중과 보호를 받아야 하며 옹호되고 지지받아야 한다는 생각…. 이러한 ‘인권의 정치-경제-철학’ 사상을 널리 퍼트리고 함께 의논하는 것만이 우리가 들어놓을 수 있는 궁극의 보험이요 진정한 안전보장인 것이다.





끝.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4-17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Tim Marshall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제도에는 실증적 근거가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