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민주정의 조건:
호모-테크노쿠스와 테크노-데모스

민주주의의 필연적 변동성을 응용하여 공동체의 행복을 이끌어내기

by 나루

우파의 불가능한 사랑


우파의 국가 숭배 현상은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파는 힘에 대한 복종을 좋아하고 개인으로 존재할 때 심한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거대하고 집단적인 것에 대한 의존을 하다 보면 우파적 생각을 갖게 되곤 한다. 그런데 우파가 꼭 단지 단순한 국민국가(nation-state) 집합으로서의 국가만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은 공통적으로 그리고 주로 국가 자체에 대한 숭배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민족에 대한 숭배, 민족-종교에 대한 숭배, 인종(모든 인간은 단일종으로써, 아종을 포함한 어떤 복수의 인종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숭배로까지도 나타난다.


그런데 나는 재미있게도, 한국에서 우파의 국가 숭배 현상은 유독 민주주의에 대한 찬양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우파들은 '자유-민주주의'가 한국의 아주 소중한 가치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의 자유주의는 경제체제로서의 시장자유주의이다. 그리고 여기서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정체제제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선호는 충분히 정당한 의사표현이며 누구에게도 선택됨직하다. 왜냐하면 이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적어도 겉보기 수준에서 시장의 자유를 택하지 않은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는, 나는 조금 이채롭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우파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이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좌파적인 발상이며, 좌파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좌파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 함의를 가진다. 1. 좌파는 기득권에 대하여 저항적이고 개혁적이다. 2. 그러한 기득권에 대한 저항은 법률에 완전히는 구애받지 않고 근본적으로 다수라는 정당성 아래에서 다수의 힘에 의하여 추진된다. 3. 좌파는 질서를 포기하고 약간의 변동성과 혼란을 취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사회를 재조직한다. 즉, 개혁성 선호 · 다수결 선호 · 모험 선호가 좌파의 가장 핵심적인 정책적 결정이며, 좌파가 사회에 기여하는 주요 기전이고, 또한 좌파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주된 심리적 태도인 것이다.


반대로 우파는, 단지 뒤집은 동어 반복이지만, 개혁보다는 질서를 선호하고 · 다수결보다는 가치가 검증된 원칙을 선호하며 · 모험보다는 정치적 안정과 재산의 안전한 축적을 선호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우파적 가치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정치체제는 오히려 민주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히려 왕정이다. 모든 원칙과 법률이 고정되어 있고, 오직 소수의 사람들이 일관된 방식으로 통치한다. 반대로 민주정은 권력이 시민에게 있고 결정의 근거가 아무런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 다수성 그 자체에 있기 때문에, 시대와 여론에 따라 변동성이 심하고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하기를 기대하기도 힘들며 질서는 아예 새롭게 만들어진다.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논의가 시끄럽게 이어지고 변화할 수밖에 없는 체제이고, 이것은 안정을 지향하는 우파들이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구조이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좌파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헌법 1조로부터 시작하는 한국 정부와 등록 시민들의 조합은 그 자체로 좌파적이라는 것인가? 그렇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가치로 간주되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은, 오히려 놀랍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진보적이다. 노동3권은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가진 이 세 가지 헌법적 권리 중의 하나라도 완전하게 인정하는 한국인이 도대체 몇이나 될 것인가? 노동자가 자의에 따라 결속하는 단결의 행위와 노동조합 결성의 행위 그리고 파업 등 단체행동에 나서는 행위는, 많은 보수-우파들이 노동조합을 '자유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좌파 빨갱이 세력'이라고 선동하는 영겁의 세월 동안에도 거짓말처럼 한국 헌법 제33조에 규정되어 있었던 헌법적 권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태극기부대의 레퍼토리처럼 '자유-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태극기부대 그 자신이다. 헌법을 부정하는 자가 어떻게 애국을 한다는 말인가? 그들이 저주해 마지않는 노동자의 노동3권이 사실은 헌법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우스운 아이러니가 보여주는 것처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정치 결합체(나는 국가라는 표현이 너무 신화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우파적 뉘앙스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주로 이렇게 표현한다) 혹은 민주주의 정치 결합체라는 레짐(regime) 그 자체는, 민주주의라는 그 엄청난 혁신적인 레짐 때문에 적어도 이론상 반드시 좌파적인 성향을 띄게 된다.


달리 말해, 민주주의 체제는 민주주의가 가진 '시민의 자기결정권' 그 자체 때문에 이론적으로 나라 전체가 좌파화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시민의 자기결정' 이라는 발상은 어마어마한 혁명적인 발상이다. 시민의 삶을 시민 자신이 결정하게 한다면, 원칙적으로 부당한 지배는 차단된다.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결정을 할 사람은 많지 않다. 만약 민주주의가 제대로만 작동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통제할 권리가 '실질적으로' 제어된다면 옛날 좌파들이 주장하던 것처럼 혁명 같은 것은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투표에 의해서 모든 권리가 획득되리라.



실질-민주주의라는 문제


그런데 한국은 왜 이렇게 보수적인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의 권리와 임금문제에 대하여 사장들보다 더 사장처럼 주장한다. 임금 격차에 대하여 고소득 전문직보다 더 고소득 전문직처럼 주장한다. 모병제와 병영문화의 개혁에 대하여 중대장보다 더 중대장처럼 주장한다. 부동산 문제에 대하여 건물주보다 더 건물주처럼 주장한다.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하여 백인보다 더 백인처럼 주장한다. 그렇게 차별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가장 손해보는 것이 누구겠는가. 정작 본인이 노동자이고 저임금 노동자이고 사병이며 월셋살이 · 전셋살이이고 눈 찢어진 아시안 옐로우 몽키에 불과한데…. 사람들에게서 왜 이런 자멸적 현상이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러나 나는 이것을 민주주의에 관련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다루었듯이 한국이 실질적으로 엄청나게 우파적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민주주의를 적극 반영한 결과로 우파적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민주주의 정치체제이기 때문에 우파적 결정이 시민의 결정이라는 것은 주요 착각이다. 그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뿐이다. 민주주의의 참된 시행은 이론적으로 모든 결정에 대한 모든 당사자의 참여에 있다.


예컨대 내가 직장의 구성원이라면 나는 노동조합이나 혹은 노사공동결정제도 안에서 직장에 대한 민주적 주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 그런 것은 없다. 내가 군대의 구성원이라면 군사행동에 대한 참여와 각 직급자에 대한 임용과 해임에 대하여 민주적 주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 그런 것은 없다. 내가 임금 노동자라면 임금에 대해서 결정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바람대로 임금이 결정된 적은 없었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폐업하여야 할 한계기업의 사장보다 최저임금에 생계가 결정되는 한계임금의 임노동자가 숫적으로 훨씬 더 많을 것인데도.



개돼지론은 왜 말이 안 되는가

왜 '말'이 안 되냐면 개랑 돼지니까…?


많은 진보 정치 평론가들은, 정부의 주요 방침이 시민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시민에게 해가 되는 결정을 하는 까닭을 소위 말하는 '개돼지 국민론'에서 찾는다. 물론 후술할 만큼의 수준에서 이 사회의 거의 모든 시민들이 굉장히 역기능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소수자 · 좌파 단체 · 인권 단체 · 노조 · 외국인과 외국인 노동자에 관하여 극렬한 감정적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사주 팔자와 기독교와 같은 미신을 믿으며,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을 할 때 그러한 미신으로부터 비롯된 객관적이지 않은 판단기준을 사용한다. 이러한 정신적 토양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포용적인 시민적 의사 결정, 시민의 집단행동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쉽게 회자되는 '시민 개돼지론'이, 정말로 정당하고 정직한 기준에서 설정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상술한 것처럼 정말로 한국사회에서 공식적이고 구속력 있게 결정되는 많은 사항들이 정말 하나하나가 모두 민주적인 절차와 다수의 뜻 그 자체에 따라 획정되고 승인된 것인지 묻는다면, 대선이나 총선이나 지자체 대표자 선출과 같은 선거장면을 제외하면 거의 실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임금 - 특히 최저임금 - 을 정한 적이 없다. 한국은 이론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최저임금은 단 한 번도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 책정된 바가 없다. 최저임금은 민주적으로 다수결에 따라 책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행정부인 고용노동부 산하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책정된다. 정부가 30명도 되지 않는 최저임금위원회에 전 노동자에게 빠짐없이 적용되는 최저임금에 대한 결정을 맡기지 않고, 오히려 모든 한국 시민권자에게 투표를 요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한국의 산업 지형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5천만명에게 적용되는 최저임금을 30명도 되지 않는 정부기구의 위원회가 책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의 사례는, 단지 이론적이고 법적으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지라도 사실상 생활영역과 산업영역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결정들에 실제 시민들이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소수의 국가장치에의 접근성을 가진 기업 · 정치가 · 관료 등이 그것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자 존재 이유인 '자유와 권리를 가진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신이 결정할 권리'가 전혀 실현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도 우리 월급이 평균 200만원 수준이라는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부와 기업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았는가?



주체성과 자기결정권이 품은 딜레마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의 결정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학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에 너무 높은 임금률을 책정함으로써 나라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또다시 반복되는 '시민 개돼지론'인데,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최대 행복을 결정할 의사결정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수의 관료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생각들도 우리는 언제가 심각하게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정적으로 거부감이 들 수는 있고 직관적으로 '안돼' 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을 때도 있지만, 이러한 생각은 물론 표면적으로 일리가 있다.


나 역시도, 심리학도로써 인간이 주체적이고 현명하다는 사실을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근시안적인 선택을 한다. 예컨대 나는 흡연자가 흡연의 당사자라고 해서, 흡연에 관한 법을 제정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는 코카인 중독자에게 코카인에 관한 법을 제정하라고 해야 할 테니까. 성매매관련 법안을 오직 당사자라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성판매자들에게 맡기지도 않을 것이다. 의사결정능력이 손상된 상태가 먼저 회복되지 않는다면 자멸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성폭력의 처벌에 관한 법률을 결코 남성들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다. 적지 않은 수의 남성이 심플한 수준의 성희롱이나 성추행 정도는 해도 괜찮도록 법을 구성할 것이다. 대형 성범죄가 아닐지라도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 피해자의 심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하면 그런 결정은 불가하다. 이처럼 어떠한 분야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 대하여 그런가? 감옥 수용자에 관한 처우를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만 결정하게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시민은 범죄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들이 여름엔 열사병으로 죽고 겨울엔 저체온증으로 죽게 만드는 수준의 처우를 가할 것이다. (물론 범죄의 내용을 보면 나 역시도 그들이 얼어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얼어죽어 마땅한 것과, 정부가 그들에게 얼어죽이는 처벌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범죄자가 죽일 놈이라고 해서 정부가 그들을 죽일 수 있도록 허여하여서는 안된다)


혹은 인문학이나 순수과학의 연구개발 자금에 관한 규정을 단지 모든 사람이 결정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인문학도들은 사회에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밥이나 축내고 알아듣지도 못할 논문을 써낸다고 우울증이 걸릴 때까지 조롱당할 것이다. (물론 이미 우울증에 걸려 있겠지만) 소수의 종사자만이 이해할 순수과학에 대한 투자는 좌절될 것이다. 그래 놓고 언론에서는 왜 한국인들이 노벨상 못 받느냐고 열등감을 분사하겠지만. 혹은 핵발전소의 건설에 대한 결정을 모든 시민이 결정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심지어 아예 의미가 없기까지 할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기술적으로 너무나 정교하고 구체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심지어 원전회사에서 제출한 자료와 환경단체에서 제출한 자료가 불일치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에 전문가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선택의 의미가 퇴색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중의 곤란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만 결정하고 혹은 집단이 집단에 대해서만 결정한다면, 근시안적인 사람들은 장기적으로 자멸적인 선택을 할 것이고 교활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남에게 해가 되는 선택을 할 것이다. 반대로 남에 대해서만 결정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대하지만 실제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회에서 추방될 것이다. 예컨대 단지 민주적으로 결정한다면 퀴어 퍼레이드는 금지되고 때로는 학교에서 진화론과 우주론을 못 가르치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사례는 기독교국가인 미국에서 일어난 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반과학적인 종교들을 단호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다음 차례는 모든 기득권이 순복음교회에서 교차하는 한국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곤란 : 최선이라는 도덕법칙과 테크노크라시의 유혹


그리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또 하나의 곤란에 처해 있다. 그것은 바로 테크노크라시(전문가지배주의)로의 이행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사회에 관여하는 복잡한 기술과 정책의 수가 늘어나면서, 필연적으로 현대사회는 그 복잡성과 정교성을 견딜 수 있는 전문가들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타인의 결정을 대행하게 된다. 이것은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결과다. 과거에는 단지 성실함이나 마음의 선함만이 윤리를 구성했다. 왜냐하면 기술력이 미천하여 인간이 다른 인간과 환경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가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피아제 발달심리학도, 하버-보슈법도 없던 시대에 인간은 타인에게도 자연에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식은 풀어놓으면 알아서 크는 존재였고, 농사도 열심히만 하면 되었고, 남을 욕하거나 때리지만 않으면 괜찮은 백성이 될 수 있었다. 나머지는? 『하스스톤』 게이머들처럼 전능하신 크툰께서 상대 명치에 30딜을 박아주시기를 기도나 하면 되었다. 즉, 전근대 시대에서는 타자에 대한 인간의 무능이 인간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었다. 윤리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것인 한, 인간이 타인에 대하여 '행위' 할 수 있는 게 진심밖에 없었기에, 윤리가 진심에서 우러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원시적인 윤리는 이처럼 타인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하는 행위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을 하거나-하지 않거나 또는 착한 마음을 먹거나-먹지 않는, 0과 1 사이의 수량(quantity)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과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개개인의 능력이 전근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증폭됨에 따라, 우리 행위의 질(quality) 혹은 폭(bandwith · elbowroom)이 과거에 비해 훨씬 확장되었다. 인간에게 타인을 위한 '최선의' 행동을 기대하는 인류의 도덕 감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 행동의 최대치가 늘어남에 따라, 예전에는 단지 착한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최대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한 그 능력이 완전히 다 발휘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탁월하게 선을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능력도 요구하고 있으며, 단지 의도뿐만이 아니라 앎과 능력도 윤리를 구성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는 자동차를 올바르고 탁월하게 운전할 의무가 있다. 아무리 다른 보행자와 운전자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운전 자체가 미숙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면 그것은 못된 행동이다. 사회와 사회의 제반 사항들을 운영하고 결정하는 일도 이와 같다. 이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오히려 전문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복잡성에 던져지게 되었다. 옛날 조선시대의 사대부 지배체제처럼, 문학책 많이 읽고 시 잘 쓰는 사람이 국가도 운영해보고 사람도 다스려보고 할 수 있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며, 끝장났다. 그런 인간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일본제국의 침략을 앞두고 환구단에 제사나 지내던 '엠페러 고종'의 말로를 걷게 된다.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니콜라이 바빌로프와 파블롭스크의 연구원들을 기억하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 사회를 테크노크라시(전문가지배주의)로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테크노크라시의 필연적인 경향은 우리에게 '선택과 결정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즉, 기술적으로 올바른 결정이 곧 도덕적 ·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정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그렇다면 세계에 대한 기술적인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결정할 수 없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소련의 식물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이야기가 이 질문에 대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i Ivanovich Vavilov, 1887~1943)는 만화책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전설적인 과학자였다. 5개 대륙으로 115번의 탐사를 다녔고, 탐사를 위해 15개 언어를 습득했다.


1926년-1927년에 걸쳐 지중해연안 그리고 아프리카 아비시니아 고원 지역을, 1929년에는 중국·일본·한국을, 1930년에는 미국, 멕시코, 과테말라, 온두라스를, 1932년-1933년에 걸쳐 캐나다, 미국, 쿠바, 멕시코,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르과이 등을 탐험하였다.
바빌로프는 세계 각지의 재배식물 및 근연 야생종을 수집, 연구하여 “하나의 종에서 관찰된 특성은 다른 종에서도 비슷한 특성을 보이며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 속 일수록 그 유전적 변이의 유사도가 크다”라는 『유전변이의 상동계열의 법칙』(1920)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재배식물은 커다란 분류군에서 순차적으로 작은 군으로 다시 유전적 변이의 구성별로 세분하고 그 결과에서 재배식물의 변이형의 분포지도를 작성하는 “식물지리적 미분법”을 확립하였다. 또한 다양한 변이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을 종과 변종의 기원중심지로 하여 “중심지에는 우성형질을 가진 기원식물이, 그로부터 떨어진 원격지에는 열성형질을 가진 변이계통 식물이 많다”라는 『재배식물의 기원중심지』(1926)를 발표 재배식물의 발상지를 7대 중심지(1940)로 나누었다.
- 위키백과, 니콜라이 바빌로프


바빌로프는 이처럼 현대 식물 육종학의 교과서 첫 장에서부터 등장하는 선구자였을뿐만 아니라, 종자 다양성의 중요성을 가장 빨리 파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6년 세계 최초의 종자 은행인 파블롭스크 실험국을 건립하여 표본 25만 종(모든 식물이 장기보존 가능한 종자를 남기지는 않기 때문에 대부분은 재배되는 상태로 보존된다.), 종자 6만 종을 보존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큰 규모일 뿐만 아니라, 이 연구소의 보유 종자 중 90%는 다른 종자 은행에는 없는 종류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연구소의 종자들은 2체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에 보내져 대기근으로부터 엄청난 인구를 구하게 된다.


이렇게 전설적인 과학자였던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정작 소련 내의 정치적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바블로프를 정치적으로 저격하고 나선 사람은 트로핌 리센코(Trofim Denisovich Lysenko, 1898~1876)였다. 리센코는 작물의 춘화처리(Vernalization, 저온처리)에 대한 연구로 유명해진 과학자였다. 물론 춘화처리는 지금도 농업에서 필수적으로 활용되는 중요한 기술이지만, 문제는 리센코가 춘화처리를 용불용설의 일종으로 이해하고 한 번 춘화처리된 작물은 다음 세대에 춘화처리 효과가 유전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중학교 때 배워서 누구나 알겠지만, 라마르크가 주창한 용불용설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유사과학이다.


그러나 리센코는 정치인으로서 소련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강했고, 과학자로서 바빌로프의 선진화된 유전학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끔찍한 혼종으로서 정신나간 발상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상과 과학을 하나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리센코를 비롯한 공산당 정치인들은,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에서 비롯되었기도 하거니와 인간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유전자가 형질을 결정한다고 설명하는 유전학 그 자체를 반-마르크스적이라고 비난했다. 그 대신 후천적으로 습득된 형질이 유전됨으로써 언제든 새로운 형질로 개조해낼 수 있는 용불용설이야말로 맑스의 변증법적 세계관에 더욱 적합하다고 간주하고 유전학을 '부르주아 유사과학'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기 시작한다.


리센코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1930년대부터 소련에 대기근이 닥치기 시작하자, 리센코와 소련 공산당은 1940년 8월, "소련 인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세계 유람이나 다닌 부르주아 반동, 소련의 농업을 고의로 망쳐먹은 간첩 혐의"로 바빌로프를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탄원 덕분에 1942년 20년형으로 감형되지만, 다음해 감옥에서 굶어죽는다. 그가 남긴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동료 과학자들은 1941년 여름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시작된 후, 독일군의 도시 포위공격과 시민들의 약탈로부터 남은 종자들을 지키다가 쌀 · 감자 · 옥수수 품종이 담겨 있는 주머니 앞에서 굶어죽는다. 종교를 위해 죽은 사람은 순교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과학을 위해 죽은 사람을 부르는 말은 없다. 자식을 먼저 잃은 부모를 일컫는 말이 없는 것처럼, 이 지구상에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될 단어여서가 아닐까.


그렇게 트로핌 리센코와 그와 결합한 무지한 정치인들은, 이렇게 당대 최고의 육종학자를 죽이고 소련과 소련 영향을 받은 인접 국가의 농업에 추산 불가능한 불이익을 주었고 소련을 기아에 빠트렸다. 뿐만 아니라 유전학에 대한 탄압은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도 리센코가 동료 과학자들의 거센 항의로 사임하기 직전 해인 1964년까지 지속되었다. 과학을 우주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의 탐구로 다루지 않고 정치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 그리고 과학을 정치적인 이유로 뒤엎어버리는 행위. 오늘날 이것은 리센코주의(Лысенковщина)라고 불린다.



리센코주의의 그림자


리센코주의는 테크노크라시에 대하여 우리에게 아주 기묘하고 고통스러운 선례를 남겨 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통속적이고 상투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테크노크라시는 나빠! 오직 사람들의 뜻에 따라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해!" 라고 주장할 때, 우리가 오히려 엄청난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말이다. 의사결정에서 과학자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배제하고 정말로 민주정이라는 정치 원리를 통해서만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하는 순간, 오히려 우리는 과학기술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술에서 벗어나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 없는 인간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종종 인간의 얇고 매끈한 피부를 바라보면서, 겨울에 집 밖에 한 발자국만 나가도 얼어죽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드는 추위를 느끼면서, 도대체 인간의 육체는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이 소유한 (기술)문화와 공진화를 거듭했는지를 되짚어 본다. 인간은 더 이상 맨몸으로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추위를 막아줄 수 있는 털은 정수리 근처에만 나있고, 심지어 정수리에도 없는 안타까운 경우마저 있다. 집과 옷이라는 인류학적인 공진화물이 아니라면 인간은 올해 겨울에 바로 멸종할 것이다.


인류는 언제나 추위와 싸워 왔다. 인류가 가장 최근까지 싸운 추위는 약 30,000년 전, 플라이스토세 말 간빙기와 빙하기가 엎치락뒤치락 하던 시대였다. 그때 네안데르탈인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멸종했다. 인류는 멸종하는 대신 바늘이라는 것을 발명했다. 네안데르탈인처럼 가죽을 끈으로 둘둘 말아 입는 것이 아니라, 몸에 딱 맞는 진짜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인류는 바느질해서 만든 옷을 입고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를 견뎌냈다. 그로부터 다시 3만 년이 지났고, 이제 우리는 사피엔스가 바늘과 돌도끼에 의존하던 것만큼이나 현대의 기술에 의존한다. 단지 육체적인 추위와 더위를 나는 것, 방에 전등을 켜고 난방을 넣는 것, 수태를 조절하는 것, 사소한 질병과 무거운 질병을 극복하는 것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분쟁을 조절하고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 서류의 진위를 보증하는 것, 물류 운송을 최적화하는 것, 예술표현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것… 이제 인간의 모든 삶은 곧 기술적인 삶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하나의 정치적인 레짐의 지평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정치의 지평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고 하여서, 과학이라는 어떠한 객관의 지평과 전혀 층위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 인간의 삶에 대한 것인 한, 인간의 삶의 존재 조건인 기술에 대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즉, 정치는 그것 자체로는 하나의 특허받은 과학기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언제나 과학기술에 대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인간의 사회적 역동인 것이다.



K-리센코이즘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결국 어떤 종류의 기술이든 반드시 요구하며, 기술을 '민주적으로' 선택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대중의 요구와 정치적 광기에 영합하는 사이비 과학은 반드시 등장한다. 정치는 입장을 다루는 기술이므로 상대적일 수도 있지만 과학은 정해진 우주의 진리를 다루는 기술이므로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과학과 과학자 그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런 대중과 정치에 영합하는 미치광이 과학자들을 식별할 수도 축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수의사 황우석 박사가 검증되지 않은 줄기세포를 척수마비 환자에게 이식하려고 했을 때, 연구원으로부터 비윤리적이고 또한 불법적으로 난자를 채취했을 때, 심지어 줄기세포 논문을 통째로 조작했을 때조차, 많은 한국인들은 황우석 박사를 비호하고 음모의 희생양으로 추켜세웠다. 이것이 바로 2006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사이언스』지 줄기세포 논문 조작 사건이다. 정말 조작이 맞다는 수사 결과가 나온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조작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조작이라고 몰아세우기 바빴다.


원본 리센코이즘이 사회주의 콤플렉스를 보상하는 맑시즘에 대한 광신이었다면, 황우석과 함께 등장한 K-리센코이즘은 후발주자 콤플렉스를 보상하는 애국주의에 대한 열광이었던 것이다. 그 광신이, 우리 사회가 의탁하고 있던 과학의 안전성과 정밀성을 오염시킨 것이다. 물론 황우석이 처음부터 사기꾼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2005년 세계 최초의 복제 개를 만들어낸 유능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단지 과학자로 칭송하는 것을 넘어, 늘 선진국에 끌려다니는 한국 기술력을 대표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연구윤리에 대한 심각한 위반을 눈감아주며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도 그러한 국가주의적 부름에 응답하듯 가슴이 웅장해지는 언론플레이를 즐겼고, 끝내 과학자로서 절대 어기지 않아야 할 원칙을 저버린 것이다.


항상 눌려 지낸 당신 나라니, 이젠 하늘에서도 한 번 기회를 줄테니 세계에서 어깨 좀 쭉 펴고 살아보라는 천운이 우리에게 주어졌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제가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열매를 맺게 한 국가와 국민에 대한 전 인류의 고마움을 우리 대한민국의 이름하에서 받게 하고 싶다는 것이 보안성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 황우석, 2005-06-07, 황우석 교수 초청 관훈클럽 토론회, 같은 날짜 SBS 뉴스



테크노-크라시를 극복하는 테크노-데모-크라시


나는 황우석 사태의 K-리센코이즘이 결코 한 스타 과학자에 대한 숭배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그러므로 과학기술을 정치와 분리해서 그 자체로 존중하는 현대사회의 룰을 뒤흔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반성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레짐 아래에서, 시민 공동체는 시민 공동체 그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소련 시대에는 권위주의의 폭정이 존재했기 때문에, 리센코주의 등에 관하여 소련 정치 리더쉽의 어처구니 없는 과학 문해력을 비난하고 소련 시민에 대해서는 면책을 주장해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누구 탓을 할 수 있는가?


따라서 우리가 민주적 권리를 행사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학 문해력과 과학적 결정에 대하여서도 책임지는 것이며 책임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란, 단지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후드가 설치된 연구실에서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모든 분야가 과학기술에 연루되어 있고, 나아가 오늘날의 모든 삶이 기술로부터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회의 어떤 부분에 참여하느냐에 상관없이 모든 형태의 참여는 기술에 대한 질문과 주장 · 제기와 응답을 반복하는 행위에 종사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결국 우리는 기술이 정치이고 정치가 기술이며, 모든 민주주의 정치체의 참가자들은 기술문해력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테크노크라시는 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기술사회로의 이행을 마치 러다이트 운동처럼 거부하면 더 해로운 테크노크라트가 우리를 야만 상태로 몰고갈 것이다. 그렇다고 단지 손 놓고 찬양만 하고 있는다면 선출된 대표자나 우리 자신 대신, 극소수의 기술관료와 사업가들이 자신들의 편견과 편향에 기초하여 제멋대로 사회를 좌지우지할 것이다. 결국, 테크노크라시라는 위험한 이중구속 상황은, 모든 시민이 거의 모든 기술적 문제에 대하여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춘 상태인 테크노-데모-크라시로의 이행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근본문제와 트릴레마의 극복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테크노크라시의 위기 극복 과정을 앞에서 다루었던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 그리고 두 가지 딜레마와 통합하여 이해해 보기로 하자. 앞서 제기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란 바로 우리나라에서 자기결정권이 사실상 거의 작동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은 대의민주주의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제기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스스로를 해가 될 정도로 지나치게 간접적으로 통치하는가?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동시에 대의민주주의의 장점으로 꼽히기도 해 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정치에 소요되는 수많은 사회적 기술들과 법적 · 절차적 기술들을 대표자가 대신 해주도록 부탁함으로써 본인들의 시간을 절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의민주주의, 즉 위임의 정치는 그 자체로 내가 부담해야 하는 기술 이해의 노력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테크노크라시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대의민주주의는 정치기술을 소수에게 위임한 기술관료제에 다름아니므로 결국 우리 모두가 잘 배운 직접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공상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해를 하고 위임하는 것이다. 27명의 최저임금위원회가 5천만 명의 최저임금을 결정한다는 그 수량적인 격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저임금위원회가 아닌 5천만 시민 가운데 27명이라도 최저임금이 얼마로 결정되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지에 관하여 계량경제학과 민중의 삶을 통합하여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들이 책정한 최저임금 8천 몇백원이 나에게 많다 · 적다가 아니라, 그것이 수리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필연적이고 정당하며 정의로운 결정이었는지 분석적으로 따져물을 수 있는 기술적 시민이 출현할 수 있느냐가 대의민주주의의 근본적 한계를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앞서 자기-결정과 타인-결정이라는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딜레마도 다루었는데, 이 역시 우리가 테크노크라시에 관하여 대응했던 관점에서 극복될 수 있다. 그 두 딜레마는, 첫째로 내가 나를 통치할 때 발생하는 중독과 자멸의 위험이 있었고, 둘째로 내가 타인을 통치할 때 발생하는 몰이해와 잔인함의 위험이었다. 이것은 겉보기에 단지 도덕적인 문제로 보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특정한 인간이 어떤 상태이기를 요구하는 것이고, 그 요구에는 그 인간의 속성과 그에 걸맞는 특정 조치에 대한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술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가령 우리가 교도소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단순히 악마적 인성의 문제라고만 '파악'한다면, 당연히 그들이 죽임당하기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자의 탄생 배경에는 우리도 단지 운이 좋아서 면제받았을 뿐인 수많은 우연과 사회적인 가해가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면, 그들은 단순히 악마이며 죽어 마땅하다고 쉽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통치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약에 마약을 하면 몸이 어떻게 되는지, 혹은 성매매를 하면 멘탈이 어떻게 되는지 정확한 앎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내가 연루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가능성에 대하여 가장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세계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앎 위에서, 우리는 단지 '내가 주권자라서 옳고, 다수가 요구하기 때문에 옳은' 다수결 민주주의가 아니라 '시민이 시민을 위해 가장 좋은 길을 판단하고 함께 설계하는' 최적화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며


종합하자면, 우리는 글의 첫머리에서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원적 좌파성을 수용해야 함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실질적인 민주주의에 있어서 대의민주주의가 상당한 장애물이 됨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대의민주주의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단지 서로의 서로에 의한 지배나 자신의 자신에 대한 지배가 정답이 될 수도 없음을 다루었다. 그리고 우리가 민주적 결정 행위를 함에 있어서 과학기술이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도 바빌로프의 예를 들어보았고, 리센코주의에 관해 비평하면서 사실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은 세상만물에 대한 기술적인 이해를 갖추는 것을 요구받는다는 것도 알아보았다.


민주주의는 진리다. 민주주의라는 거부할 수 없는 유일한 정치체제를 채택한 한, 끊임없는 사회 변화와 변동성을 거부할 수는 없다. 민주적 의사결정제도가 제공하는 필연적 진보와 민중 중심 경향성 앞에 보수주의나 권위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절대 불가(不可)하며, 동시에 결코 불가능(不可能)하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변동성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번영과 안정이라는 구체적인 상태로의 변동성을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변화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도움이 되고 좋은 방향으로만 이끌어가야만 하는 끝없는 과제에 직면한 것이다.


영원한 변동성 위에서 좋은 방향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 이것은 결국 과학과 기술의 도움이 있어야만 성취할 수 있는 과업이다. 민주주의 자체가 하나의 기술이며, 정치는 모든 기술에 대한 판단이고, 우리 스스로와 우리의 이웃들은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에 대한 이해 자체가 하나의 기술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자로서 기술자'가 되어야 하고, '기술자로서 민주정에 참여' 해야 한다.



우리는
기술적 인간: 호모 테크니쿠스(homo-technicus)이자
기술적 민중: 테크노 데모스(techno-demos)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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