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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y 03. 2021

계단

나루시선, 35

계단


                                서나루





친구가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계단을 보이콧하는 실천가였다

동물을 괴롭히는 육식을 거부하듯이

장애인이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계단을 거부하는 것이다


어디 먼 데를 쳐다보듯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말했다

그래. 그게 옳은 거지

그러고 돌아오는 길에 계단을 세 칸씩 올랐다

허벅지가 튼튼해야 오래 사니까.


오래 살려고 마음먹은 후로 오래 살려는 친구들만 곁에 남았다

필라테스를 삼일씩이나 다녀서 허벅지가 돌처럼 단단한 

운동권 출신들. 이제는 옳고 그름을 알고 

장딴지를 주무르면서 

언제라도 옳고 그름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동지들은

주식이 폭락할 시즌마다 전화를 건다


선배, 우리라고 가난하게 살아야 될 필요가 어디에 있어 그래 

우리도 자본을 갖자고 말이야.

옳은 게 무엇인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알지

하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야, 이게 세상의 

객관적인 구조잖아 그렇지? 신방과 나와서 뭐 할건데 너

조선일보에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감사한 일 아니야

그 자리에 우리가 올라가지 않으면

우리보다 더 나쁜 새끼들이 올라가게 될 거니까


스쿼트를 한 허벅지들로

객관적인 구조들을 세 칸씩 네 칸씩 뛰어 올라가며, 

전투경찰들을 향해 악을 쓰던 열성적인 정강이들을 부러뜨린

지뢰 같은 광기들을 피해 가며 우리는 

그새 이만큼이나 거시경제학원론을 배웠다


대형참사의 날짜를 팔뚝 안쪽에 문신한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올바른가

참배할 것도 우러를 것도 없고 

옳고 틀린 것들이 내려다보이는 피라미드


학문은 언제나 공짜지. 죽은 사람들이 요금을 냈으니까

천 명당 한 명이 반드시 죽지 않으면 어떻게 천인률이 나오는데?

피눈물과 뼛가루의 안개 속에서도 정확하게 중간값을 찾아내는 

중심극한정리처럼, 우리는 이제 모든 희생들의 평균을 구해내고

왜냐하면 어느 억울함이든 어떤 집합의 원소이니까


그래서 이제 나는 숭고를 숭고라고 부를 줄도 알고

숭고에 인생 조진 동지들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진실로 그것이 올바른 주장임을 인정하고

대체 무엇이 어떻게 옳은지까지 알아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왜 현충원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공통된 견해에 도달했다

그곳은 일종의 대형마트인 것이다

정강이가 부러져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지어진

아아, 애국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할인받은 요금이 아닌가?

무료 입장 할인 용사여!

최저가로 죽어준 영령들이어!

체험판 민주 열사여!

보라 우리는 이만큼이나 경영학원론을 배웠다


결혼도 남자도 필요없는 좌파들은 어쩜 만날 때마다 건강해진다

이제 여드름 흉터도 다 나아서 맨들맨들한 

천재과로 태어난 옛 동지들의 귓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파피루스 같은 성병검사지를 들여다볼 것이다


지구는 가열되고 

모두가 카오스 이론 속에 녹아드는데

공무원도 공기업도 대기업노조도 공익변호사도 못 된 

무슨 처음 들어보는 비밀 신문을 찍어내는 활동가들과

북으로 북으로 진격하자고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용사들이

개인적으로 얘기해 보면 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하나의 차원에서 만난다


저들처럼 그들이 존재하고, 그들처럼 저들도 존재하리라

그러나 내가 저놈들의 대칭은 죽어도 되지 않으리라

계단 한 칸을 오르면 4초의 수명이 늘어난다는 대수의 법칙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건강하게 계단을 오르고


중심극한정리가 분포 그 자신 때문에 반드시 중앙값을 찾아내듯이

수열의 끝도 우리 그 자신 안에서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달려라

권위를 개처럼 비웃었다면 왜 집합론은 개처럼 비웃지 않는가?

비웃음은 우리의 핵융합 반응로

혼자 삼일만 내버려두면 예외 없이 자위를 시작하는

미친듯이 웃긴 사피엔스라는 이산수학

자 달리자


집합의 바깥으로 달리는 것이 가능하리라

달리자

생식기 덜렁거리는 뻔한 사피엔스들을 개처럼 멸시하는 것이 혁명인데 

가해자를 존중한 놈들은 다 자살했다

살고 살아나서 죽이고 싶은가

수열의 끝은 종말이지만 수열의 처음이 무엇인지 아는가

우스움

수열의 처음도 우리 그 자신 안에서 생겨날 것이다








Photo by Hossam M. Oma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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