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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08. 2021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망자이다

후기청소년기 및 초기성인기 우울증의 보존적 치료를 위하여

청소년기를 지나 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뒤돌아보면 우리 모두가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까마득하고 아찔한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기는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찬란한 시절이지만, 청소년이 노출된 사회적 · 가정적 · 발달적 · 정책적 조건들을 생각해본다면 솔직히 말하건대 ‘위험천만한’ 구간이다.


보통 우리가 청소년이 노출되어 있는 위험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주로 악한 어른들의 각종 청소년 대상 범죄 · 청소년 성매매의 유혹 · 가정파탄이나 양육자체계(부모) 붕괴에 따른 유기 · 가정에서의 학대 · 학교폭력 피해 · 성폭력과 디지털성폭력 피해와 같은 외적인 충격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발달심리학의 관점에서 청소년기를 바라보았을 때, 청소년을 노리는 범죄만큼이나 청소년기 통과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청소년 내부의 불안정한 정신적 구조이다.


2005년에 서울시 소아청소년 정신보건센터에서 시행한 역학 조사에 따르면, 부모를 통해 진단한 아동 · 청소년기의 우울증은 0.86%였으나, 아동 · 청소년이 스스로 보고한 우울증은 7.37%였다.(서울아산병원, 링크) 이것은 부모가 아동 · 청소년의 우울증을 거의 감지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부모의 무관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청소년기 우울증의 특징적인 증상 때문이다. 청소년기 우울증은 성인 우울증과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인 우울증의 일반적인 특징이 무기력과 우울감이라면, 청소년기 우울증의 특징은 짜증과 공격성이다. 김도연 외 6인이 한국청소년상담원에서 발간한 『우울청소년을 위한 First Aid : 청소년지도자 개입 지침서1』(2011, 링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울증의 전형 적인 증상은 우울한 기분, 죄책감, 무기력감, 자신감의 상실, 흥미나 즐거움 및 활동 수준 저하, 주의집중 곤란, 피로감, 식욕 감소, 자살 생각, 수면 장애 등이지만, 청소년들은 성인들과는 달리 우울한 경우에 여러 가지 문제 행동을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즉, 우울하고 슬픈 정서보다는 짜증을 많이 내고 부모에 대한 반항, 공격적인 행동, 무단결석, 가출, 도벽, 성적 저하, 주의집중 곤란 등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전에는 비교적 모범적이었던 학생이 상실, 좌절들을 경험한 뒤 비행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내면의 우울 증상이 문제 행동으로 외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인에 비해 액티브하고 네거티브한 형태로 표출되기에 단순한 반항이나 품행 문제로 오판될 수 있는 청소년기 우울증 증상은, 우울증 진단을 너무 늦추거나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고 따라서 예후를 불량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삼성서울병원 우울증센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특히 소아들은 "자존감", "죄책감" 그리고 "집중력" 등에 대한 개념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소아의 경우 이런 느낌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업 수행 저하,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꼼지락거리거나, 왔다갔다 하는 행동, 또는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머리, 피부, 옷 등을 계속 잡아당기거나 문지르는 행동, 반대로 느린 행동이나 단조로운 목소리 또는 말을 잘 하지 않으려는 행동, 고함, 이유 없는 짜증, 울음, 반사회적 행동, 술 · 약물남용,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체 통증 호소”(삼성서울병원, 링크)


이렇게 감지하기가 힘든 청소년 우울증이 예측하기 어려운 자살로 이어지는 점에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0세 이전의 아동에게서는 죽음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고일 가능성이 높으며, 12세 이하의 경우에는 자살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성공하는 경우가 적다. 그러나 아동기를 벗어나 13세 이상 청소년기에 들어서면 자살은 청소년기의 여러 심리적 조건과 맞물려서 급증한다. 


그 심리적 조건의 대표적인 귀결은 충동성이다. 청소년기는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급속히 발달하지만, 그것을 억제하고 제어해 줄 전두엽은 그보다 늦게 발달하여서 청소년기 충동성이라는 특징을 형성한다. 이것은 당연히 충동적 자살 · 충동적 자해와도 이어진다. 청소년 자살은 분명한 동기가 없더라도 주변인과의 갈등이나 분노에 의해서 충동적으로 시행될 수 있으며, 고층아파트에서의 투신과 같은 치명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또한 아직 지성이 발달단계에 있어서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비교적 어렵기 때문에 사후세계나 신비주의적인 관념을 믿고 쉽게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친구나 유명인을 따라 죽는 모방자살 역시 청소년기에 흔하므로 주변에서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조선대학교병원, 링크)


하지만 나는 이러한 청소년우울증 · 청소년자살에 대한 교과서적 이해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후기청소년기(=초기성인기) 자살의 양상에 관하여서도 우리가 많은 관심과 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후기청소년기에서 초기성인기 이행기에 있던 여성 연예인 및 여성 성폭력피해자의 자살을 굉장히 많이 목도하였다. 각각의 사건은 지나치게 참혹하기 때문에 양심상 사례를 들 수 없으나, 많은 자살사례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 여성, 16세에서 29세, 인격에 관련한 범죄 또는 성범죄 피해, 경찰 등 구조적 지지체계로부터 거부당하였거나 구조체계 접근불가, 우울증 징후에 비해 비교적 갑작스럽게 자살 실행. 


나는 이렇게 비명횡사한 무고한 초기성인기 사망자들이, 단순한 범죄피해의 상징으로 재현되고 소환되고 범죄 자체에 대한 분노와 자살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매스컴과 SNS의 군중들은 단지 이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에 관해서만 공감한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죄행위에 대하여서만 의논하고, 단지 그 범죄만이 피해자의 직접사인인것처럼 말한다. 아니다. 자살자의 사인은 범죄피해가 아니라 자살이다. 범죄도 막아야 하지만, 자살 그 자체도 막아야 우리는 피해자들을 살려낼 수 있다. 


범죄가 자살로 직결된다는 믿음은, 자살이라는 엄연한 중간 기전을 뭉개버린다. 그것은 사망자를 납작하게 보는, 또 하나의 대상화이다. 자살의 요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가 사망자가 되는 다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도 자살 자체를 요격하는 것에 있다. 물론 이들은 범죄가 주된 계기가 되어서 자살을 실행했다: 하지만 동일한 범죄를 당한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사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는 통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들이 당한 범죄피해가 모든 연령에 있어서 동일한 자살사망을 이끌어내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후기청소년기와 초기성인기의 범죄피해 자살자들이 근본적으로 성장기에 있던 인물들이라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즉, 나는 초기성인기 자살자들이 비록 법적으로는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청소년이 겪는 심리적 문제와 별로 다르지 않은 문제에 고통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자살행동에는 성장기 두뇌가 가지고 있는 행동적/정서적 취약성이 반영되었을 확률이 크다. 왜냐하면 24~25세, 기준에 따라 30세에 이르는 초기성인기 두뇌는 실제로 성장 중에 있기 때문이다. 40세 이상의 노련한 성인들과 똑 같은 사회에서 똑 같은 스트레스와 위험에 노출됨에도, 그들의 두뇌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중에는 아직 발달학적으로 성장기를 지나고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 결과, 후기청소년기와 초기성인기의 범죄피해자 등 위기를 겪는 사람들은 성인중기에 비해 대부분의 자원이 위태로운 수준에서 위험한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성인중기에 비해 낮은 가용자원 · 낮은 정서적 안정성 · 좁고 제한적인 세계관 · 짧은 식견 · 덜 발달된 두뇌 · 유사한 사례와 비교함으로써 나의 고통을 상대화하고 내 고난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만한 경험의 부재 · 유머 등 건강한 방어기제 노하우의 부재 등과 같은 여러가지 악재가 겹침으로 인해, 인생을 장기적으로 보고 정신적 고통을 상대화시키면서 버텨나가는 극복 방략을 스스로 구축하기 전에 치명적인 자해행위가 발생하는 것을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청소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개입을 준비해야 한다. 첫째, 청소년기의 기준을 단순히 나이가 아니라 난관에 대한 대처역량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특히 어른들의 범죄 시도가 집중되는 후기청소년 및 후기청소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으면서도 세상의 풍파에는 다 노출되게끔 되어 있는 초기성인기에 대하여 청소년과 동일한 수준의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 둘째, 심리학의 관점에서 청소년 자살사망자의 자살원인을 단순히 사회적 문제로만 돌리지 말고, 청소년 개인 심리의 역동에 관하여서도 관심갖고 사회적 재발방지 뿐만이 아니라 심층적인 심리부검을 실시하고 고위험군에 대하여 강력히 관리해야 한다. 


이들은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망자이다. 범죄 피해가 자살사망으로 이어지라는 법칙은 어디에도 없으며, 자살사망에는 독자적인 기전이 있고, 그 기전을 찾아 없애서,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발효될 때까지 일단 목숨을 붙여 놓아야 한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죽음을 틀어막아 놓는 것은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가해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만큼이나 주목받아야 하는 모든 인간의 의무이다. 기억하라. 자살은 자기 손으로 하기 때문에 자살이다. 그 손을 꽉 붙들어서 ‘시간이라는 만병통치약이 온 몸에 천천히 녹아 들 때까지’ 살려두어야 한다. 그건 법원이나 경찰에서 해줄 수 없는 굉장히 미시적인 일이다. 가족과 주변인이 정신보건 전문과들과 함께 맡아야 하는 일이다. 바로 우리의 일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6-08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William Bou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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