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루 Jun 12. 2021

신화학

나루시선, 38


신화학

                                        서나루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싸웠을 때

그것을 지켜보는 탄소의 신이 있었다


선한 신이 선량한 마음을 다루고

악한 신이 추악한 마음을 다뤘을 때

탄소의 신은 탄소화합물, 화약, 지식, 지렛대, 밧줄을 다스렸다


악한 신이 선한 신의 백성들을 잡아서

탄소강으로 된 칼로 찔러 죽였을 때

선한 신도 악한 신의 군대를 끝까지 쫓아가

탄소섬유 밧줄로 목매달아 죽였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몸은

탄소의 신이 만들었지만

신들조차도 탄소가 말하는 것은 듣지 못했다

탄소의 신은 단지 선한 백성과 악한 군대의 손에

폭탄이나 비료로 쥐어져 있었다


비료를 뿌려서 감자가 자라고

선한 신의 백성과 악한 신의 군대가 모두 배부르게 먹었다


악한 신이 스스로의 격노에 갇혀 이빨을 칼로 갈 때

선한 신도 스스로의 울분에 갇혀 집구석을 때려부수었다

모두 탄소로 된 것들이었고

사물은 아침처럼 정확하게 녹이 슬었다


인간들은 서로 탄소무기를 들이대고 와글대며 살아갔다

그리고 탄소의 들리지 않던 소리

그 신은 말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던 설화를 깨고

누군가 그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웅웅대는 소리가

그러나 규칙적으로

저 먼 곳에서 나는 듯했다

혼자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악한 신은 지배하기 위하여 매일 계획을 짰다

선한 신에게 삶을 바쳤던 자들이 터져서 죽어갈 때

누군가 선한 신의 명령을 뿌리치고

눈을 딱 감고 전쟁을 등지고

바다 밑으로 헤엄쳤다


소리 그것은 쇠지렛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탄소의 신이 남겨둔 소리굽쇠

작은 힘으로 큰 힘이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가 탄소의 신은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에 도달한 자들은 깜짝 놀랐다

신의 발음은 정보였다

정보대로 실재가 만들어져 있었고 실재를 읽으면 정보와 발음이 같았다

모든 것이 탄소의 신의 말이었다


모든 탄소화합물에 대한 설명공식

공식대로 물질이 이루어지고 물질대로 공식이 쓰여졌다

지렛대는 규칙적으로 삐걱이며 모든 것의 원리를 누설했지만

소리는 향기처럼 아무데나 퍼져가고 있었다


탄소의 신은

정보를 손에 넣는 것이 선의 자손인지 악의 자손인지 묻지 않았다

모두가 탄소의 한 형태였으므로 

탄소가 탄소로 순환하는 길에서 누구의 편을 들지도 않았다


인간이 세상의 비밀을 캐가도 상관하지 않았다

탄소의 신은 아무 의도가 없는 신이었다

그게 비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세상을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놓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중력의 지배를 받았다

가벼운 헬륨은 우주로 날아가고

어둡고 무거운 정보들만이 심해에 가라앉았을 뿐이다

지키는 개 한마리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찾는 이는 없었다

지렛대의 원리는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지배했지만

정말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전쟁에 열광하는 자들은

폭력과 공포가 아닌 힘의 원리를 상상도 하지 못했고

지상에는 희망이 없어서

그만 바다로 떠나야겠다는 절망도 가져본 적 없다


조국을 배신하고 전쟁을 뿌리치고 

차가운 바다 밑으로 헤엄치던 자들만이

탄소의 속삭임을 들었다


육지에는 희망이 없어 바다로 망명한 자만들이 

소리굽쇠에서 정보를 읽었고

탄소의 말을 이해하고

전쟁터가 된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동포들에게 신탁을 전했다 

그런 방식으로 말해야만 믿기 때문에

그것은 지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단지 탄소의 말을 읽어내려갔을 뿐인데


왜 세상은 악에도 멸망하지 않는가

왜 악은 죽어도 선을 이해할 수 없는가

왜 결국 선은 악을 이기는가


모두가 선의 신에 압도적인 권능이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타인의 고향을 빼앗은

악의 신 때문이었다

악이 선을 추방했을 때 그들이 갈 곳은 바다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은 눈물바다의 해저에서 탄소의 말을 듣다가 문득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것을 알았다.








Photo by Teo Duldulao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망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