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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13. 2021

여생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남은 인생'은 없다. 나의 모든 것이 남김없이 인생이다.

나는 여생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여생은 남을 여(餘)에 삶 생(生)자이다. 주로 노인이나 은퇴자의 앞으로의 삶을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라는 취지로 표현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잔돈 할때의 남을 잔(殘)자를 써서 잔년(殘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남은 삶이라는 거다. 나는 인간에게 그리고 어른들에게 이만큼 모욕적인 표현이 표준어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언제나 조용히 경악한다. 인생이 무슨 휘발유 통에 남은 기름인가?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남은 인생' 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한국인 같은 정주민족들이 개발해온 유교문화의 핵심은, 타인의 가치를 존중하고 연장자들은 단지 뒷방 늙은이가 아니라 수십년간 데이터를 축적해서 지혜로 통합해낸 전문가이자 우리세대가 그간 신세져 온 양육자세대 중 하나임을 잊지 않는 것이고 그러므로 존경하고 우대한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여생이라는 말은 삼십 년, 육십 년, 구십 년 전부터 진행되어 온 그들의 삶을 갑자기 한 순간에 죽음을 기다리는 남은 시간으로 꺾어 버린다. 이것은 어른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표현이 아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노인이라는 말도 싫어한다. 노인은 늙을 노(老)에 사람 인(人)이다. 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어떤 측면이, 늙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관점에서, 얼마만큼 늙었다는 것인가? 늙었다는 표현은 어느 모로 보나 전혀 좋지 않다. 그것은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이라, 마치 일종의 욕설처럼 들리기도 한다. 늙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아프기 쉽다는 것? 지혜가 많다는 것? 생각이 완고하다는 것? 보수적이라는 것? 이런 말들이 늙음에 단지 통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관검색어 같은 것이지만, 그래서 정말로 누군가를 늙었다고 지칭할 때 그 사람에게서 이 속성을 일관되게 찾아낼 수는 없다. 그렇게 포괄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는 인간을 지칭할 때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죽고 나면 더 이상 죽음과 삶이라는 인간의 규준 자체가 쓸모없어지는데도 그렇다. 그리고 죽음을 지나치게 정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안 그래도 열받는 죽음이라는 상태 때문에 기껏 살고 있는 인생까지 허무한 것, 숙명적인 것으로 폄훼한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존재이고, 더 나아가 인생의 끝이 정해진 존재이고, 삶의 일정 분량을 지나면 나머지는 그냥 남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장엄한 인생을 죽음이나 기다리는 신세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인생을 여행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표현에는 언제나 죽음이 종착역이라는 클리셰가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착할 곳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살아가는 것인가? 그런 비유를 통한 묘사 습관은, 인간을 직선적인 철도 노선이나 정해진 여행코스라는 비유의 환각과 기호적 감옥에 가둬버린다.


인간은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도 아니고, 단순히 불쌍하게 늙어가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그냥 본인 인생을 사는 존재다. 그 인생에는 끝없는 탐구와 추진력과 야망과 탁월성과 추구가 있다. 죽음은 그것을 가로막는 일종의 질병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은 산화스트레스를 완벽히 복구하지 못하는 유전병을 타고났을 뿐이다. 우리는 각자의 계획을 이루다가 산화스트레스라는 피치못할 자연재해로 인하여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관리하고 투병하다 사망하는 것이지, 결코 '남은 인생'이나 보내다가 늙어죽는 존재가 아니다. 생태학적 접근의 창시자인 심리학자 프론펜브레너(U. Bronfenbrenner)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을 정말로 그렇게 만드는 것은 미시체계(Micro-system)상에서는 산화스트레스와 음주 등 약물문제이고, 인간의 외체계(Exo-system)상에서는 실버세대를 현역으로 대우하고 그들을 위한 무대를 보장하는 데 소홀한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지만, 인간의 거시체계(Macro-system) 단계에서는 인간의 삶을 그렇게 단정적이고 숙명론적으로 규정하는 언어와 문화이다.


이런 모든 생각들은 노화가 하나의 필연이고 코스라는 신화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원래 모든 인간은 인간의 생로병사와 같은, 현상학적으로(=대충 보기에) 엇비슷한 패턴을 가진 자연현상을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신화화하기 마련이다. 신화적 사고가 아예 존재하지 않을수는 없다. 최소한 언어나 문자 같은 상징물이 없으면 인간이 어떻게 대상을 간편하게 다루겠는가? 나아가 삶과 죽음이라는 너무나 복잡한 데다가 감정적으로 깊게 연루되어 있는 주제에 대하여서는 더욱 신화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지금 나는 모든 인간을 영원한 전문가성을 추구하는 영웅적인 존재로 신화화하는 것을 통하여, 모든 인간을 죽음이나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하는 파괴적 신화화를 대체하려 하고 있다.


모든 신화화에도 나름의 근거와 설득력이 있다. 모든 인간을 학교마치고 취직하고 돈벌고 애낳고 은퇴하면 죽음이나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하는 신화화가 인간의 죽음이라는 필연성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면, 모든 인간은 영원히 자신의 전문성과 자아실현을 위해 장엄한 모험을 떠나 어쩔 수 없는 산화스트레스에 장렬히 전사할 때까지 최고의 성취를 추구한다고 묘사하는 내 버전의 신화화는 나이라는 것이 단지 임의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필연성 때문에 설득력을 가진다. 어떤가? 어차피 신화는 임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임의적 선택이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인류 전체의 운명을 바꾼다. 당신이라면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노인이란 단지 관습적인 명명법에 불과하다. 30살이 젊음과 동치되고 90살이 늙음과 동치되는 것은 단지, 단지 관습적인 것이다. 몸이 약해진 사람에게 그에게 맞는 강화장치나 보조장구나 일감과 동기부여를 제공하지 않고 그저 늙고 은퇴했다고 치부하는 사회의 암묵적 약속이 그들을 늙은사람처럼, 은퇴한사람처럼 만들어놓은 것이다. 아니, 그렇게 취급당한 사람의 상태를 후험적으로 늙은사람이다, 은퇴한사람이다 라고 정의할 뿐이다. 사람을 얽매어 놓고 그것을 정의한 다음, 다시 사람이 거기에 얽매인 것이다. 누가 늙고 은퇴한 사람의 전형에 얽매이고 싶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취급하니까 얽매이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에 나이를 매길 수 있는 수단은 없고, 인간의 장기기억력이 사실상 무한하며, 나이를 먹는 것에 따른 인지능력의 저하가 사실상 거의 의미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은 노화와 인지기능의 관련성을 찾은 연구에서 꾸준히 밝혀졌다. 기능적인 기억력저하보다는 '내가 늙었다' 라는 자기효능감 하락이 수행능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가 존재하며,(전해숙, 2013, 출처) 시냅스의 연결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길고 복잡해지기 때문에 순간 순발력이 좀 늦어지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젊은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는 연구 등 기존의 노화와 인지에 대한 상식을 깨는 수많은 연구가 존재한다.(현재 기억나는 출처들만 표기함 : 연합뉴스, 출처 ; 이슬기, 출처 ; 한희준, 출처)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지식이 일종의 노이즈가 되어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젊은 이들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연구결과인데, 우리가 분업과 상호의존을 통해 서로의 지식에 얼마나 의지하는지 생각해본다면 노인들이 왜 새로운 걸 배우는데 굼뜨냐고 질타하는 것은 얼마나 배은망덕한 짓인가? 한 평생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먹여살려 온 사람들의 축적된 지식이 신세대의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느리게 한다면, 그것에 감사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한편 기존에 존재하는 지식을 새로운 시대상황과 정렬시켜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유교의 미덕이다. 나이랑 성별 갖고 군기잡고 계급놀이 하는 것은 유교문화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고, 공자(孔子)께서 그러라고 『논어』를 집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 자체에 나이를 매길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 자체에 아무런 이유없이 숫자를 부여함으로써 괜히 위화감을 조성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100살의 나이를 가진 사람이 100살의 정신을 가졌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왜 하필 그 100살의 정신이란 늙고 오락가락하는 것으로 묘사되는가? 신체 나이는 매길 수 있다. 그것은 출생증명서에도 나와 있고 지구가 인간의 관점에서 거의 일정한 속도로 태양을 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나이매기겠는가? 정신에 매길 수 있는 나이는 없다. 애초에 나이라는 개념이 신체적인 나이 자체가 태어난 후로 지구가 태양을 몇 번 돌았는지에 관한 임의적인 것이다. 마치 유튜버 선바가 유행시킨 밈인 "우린 이것을 얼음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게 사회적 약속이라가지고." 와 같은 약속에 불과하다. (선바, 출처)


멀쩡한 사람을 뒷방 늙은이 취급하고 노인이라 부르고 그 삶을 여생이라 부르는 커다란 모욕이 표준어처럼 사용된다면, 나이를 매길 근거가 전혀 없는 인간의 정신에도 나이가 매겨지는 참사가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남들이 나를 다 그렇게 취급하고 나의 지위와 권한을 옛날과는 달리 주니까, 전혀 녹슬지 않은 역량을 발휘하려고 해도 사회적 편견에 가로막히는 것이다. 노화 자체는 실재한다. 산소와 자외선에 의한 산화스트레스 등이 피부와 장기를 좀 더 주름지게 만들고 손상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주름과 퇴축도, 남들의 고정관념 가득한 숫자를 부여받고 육체의 산화손상 정도에 따라 저마다의 무대에서 쫓겨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인간이 환경스트레스에 따라 퇴행성 손상을 받는 것은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늙었다'고 표현하면서 꺼리기 시작한 것은 사회고, 늙었기 때문에 삶의 현장에서 배제하기 시작한 것도 사회다. 


그러므로 내가 마지막으로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은 '은퇴'라는 말이다. 그런 것은 없다. 인간은 자원하지 않는 한 은퇴시켜서는 안 된다. 자유가 아니면 인간은 무엇인가! 자아실현이 아니면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죽는 순간까지 원한다면 일할 수 있는 교수 · 의사 · 변호사 등 자율성 많은 전문직이 직업으로서 이상적인 모델인 까닭이 이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직업의 전문직화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직업이란 자아의 커다란 일부이고, 자아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많이 지닐수록 그리고 고유할수록 더 큰 긍지와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직업생활을 유지할 때, 사람은 계속해서 육체적으로도 왕성히 활동해서 더욱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고, 현실감각이 계속 날카롭게 벼려지며, 역량이 갱신되고, 언제나 진실로 존경받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 전문직에서 단지 나이 많다는 것을 이유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사람은 죽기 전까지는 현역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부름받은 소명의 길 위에 서서 죽을 권리가 있다. 


어떤 아주 나이 많은 전문가가 시대에 맞지 않는 판단을 하고, 동료를 괴롭게 하는 꼰대 짓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고 직무역량을 업데이트 안 하고 타인을 존중하지 않아서이지, 늙어서가 아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판단을 하고 타인을 엉망진창으로 대우하는 것이야 일부 나이 적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맞는 판단을 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나이 적은 사람이 있듯이, 시대에 맞는 판단을 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나이 많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차별 없는 사회를 원한다. 차별 철폐의 핵심 원리는 사람을 피부색이나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위에 의해서만 판단하며 업무에 있어서는 능력에 의해서만 판단하라는 것이다. 정말 행위와 능력에 의해서 판단한다면, 그 사람의 출생증명서상 나이가 무엇이 중요한가?


정년퇴임한 뒤에 명예교수가 되신 언어철학전공 노양진 교수의 6부작 체험주의철학 세미나가 지난 달에 열렸다. 그의 제자였던 나도 참여했다. 그는 재직 시절에도 학문적 권위를 무작정 찬양하지 않았고 기죽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이름 드높은 철학자들의 말을 비판 없이 추종하는 학부생들에게 참교육을 내리꽂는 교수로 유명했다. 한 학생이 "위대한 철학자 칸트에 따르면…" 으로 시작하는 질문을 했을 때, "칸트야말로 전형적으로 실패한 철학자야! 자신의 사변적 전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추가 설명을 덕지덕지 붙여야만 성립하는 애드혹(ad hoc) 이론이라고…!" 라고 일갈한 그의 서늘한 강의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는 투명하고 공적인 방식으로 이론을 세우고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패거리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들의 뚝배기를 깨버릴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가 은퇴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했다. 이번 세미나는 퇴임 후에 발매된 신간 출판 기념 기획이었고, 그의 강의는 내가 철학계를 떠나 심리학을 배우고 자격증을 취득하러 다닌 몇 년 사이에 더 강화되어 있었다. 물론 우리가 거시적인 경제규모상의 문제랄지 작금의 재정상황 때문에 일정기간 고용된 사람은 후배에게 고용기회를 물려줘야 한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은퇴의 이유는 단지 피치못할 경제공동체의 사정 때문이어야만 마땅하다. 정년퇴임을 바라보는 관습적인 관점이라는 것이,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나이먹음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라는 것이, 죽는 그 순간까지 세상에서 가장 서늘한 날카로움을 유지하는 위대한 전문가들을 나이 때문에 쫓아내는 엄청난 실책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노인이라는 신화는 인간의 생로병사라는 현상학적 관찰을, 인간의 전인적이고 복잡다단하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창조적인 삶에 덮어씌우는 전형적인 자연주의적 오류이다. 이제 노인이라고 하지 말자. 많은 연령만큼이나 많이 산화스트레스에 부상을 입었다는 의미에서 '고령자'나, 아니면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 혹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갖게 되는 멋있는 은발을 상징하는 그윽한 표현인 '실버 세대' 라고 표현하면 좋겠다. 표현에는 존경과 존중을 담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존경과 존중을 연상시키는 표현이 실제로 그런 마음가짐과 행동을 만든다. 


요즘 청년 세대, 청년 정치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나는 그럴수록 다시 나이 지긋한 모든 사람에게 단순히 안부 전화를 돌리는 것을 넘어 깊은 연결과 진정한 협동을 다시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인을 공경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사회의 짐짝 취급한 채 혈기왕성한 젊은 사람의 노동력과 생산력만을 숭배하여 출산율! 출산율! 출산율!만 외치는 것은 그 은근한 타겟인 젊은 세대도 모욕하는 것이고 멀쩡히 살아 있는 실버 세대도 무시하는 것이다. 젊은 인구를 생산력 보증수표처럼 취급하여 자식을 빨리 생산해 내라고 다그치면서도, 막상 멀쩡히 살아있는 노령 인구를 은퇴한 짐짝 취급하다니 반만 년 역사의 근본있는 유교문화에서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새파랗게 어린 나조차도 어깨너머로 배운 공자 정신을 들어 작금의 실버정책을 비판하는데, 실버 당사자들은 얼마나 비통하실 것인가? 심지어 지구 환경은 인구 과잉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데, 막상 살아있는 베테랑들은 늙어서 쓸모없다고 단정지은 채 더 많은 생산인구를 부르짖어서 인구 팽창을 종용하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비현실적인 언어도단한 실책이다.


시작하는 머리칼 색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 동등하게 실버가 되어간다. 실버는 모든 인간이 하나되는 색깔이다. 그리고 우리는 심리학자 카텔(R.B. Cattell)이 말한 바와 같이 삶과 함께 꾸준히 성장하는 지적 능력인 결정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을 계속 얻으며 판타지 소설의 세계수와 같은 깊고 넓은 존재가 되어간다. 어떻게 스스로의 미래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타인의 미래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모든 인류가 마침내 도달할 완숙의 시간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Thomas de LUZ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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