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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15. 2021

숭배와 심리학 :
예수님 컴퓨터 고치기

신비주의가 사라진 자리에 과학이, 과학이 도래한 자리에 민주주의가.

심리학을 배우면서 굉장히 좋았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숭배에 면역이 된다는 것이다. 이 숭배란 무엇인고 하니 별다른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간 또는 어떤 초자연적인 상상에 대한 숭배와 같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숭배의 예시는 북한 주류문화의(그리고 놀랍게도 소수 남한 사람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과 같은 인물에 대한 숭배일 것이다. 사실 북한사람 욕할 것도 없는 것이, 김일성 등 극좌민족주의 숭배의 거울쌍처럼, 이미 엄청나게 많은 수의 남한사람이 이승만-백선엽-박정희 등 극우민족주의 인물을 숭배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냉전의 종식과정에서 사그라들어가고 있는 그런 극단적인 숭배가 아니라도 이미 많은 사람들은 알게모르게 실존인물 혹은 가상적 인격을 숭배한다. 


가볍게는 이건희와 같은 기업 경영자를 숭배하기도 하고, 푸틴이나 시진핑 같은 현대 독재자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으며, 이만희 같은 신흥종교 사제를 숭배하기도 하고, 니체 같은 철학자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아직까지도 '하나님' 같은 가상 인격을 숭배한다. 또한 작금의 정치적인 이행기 풍경을 살펴볼 때, 전격적인 숭배라고 보기에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민주화운동기에 민주화운동을 하여서 한국인 모두가 민주주의 형성에 빚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숭배에 가까운 무조건적인 비호를 받고 신화적인 지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누군가'를 숭배한다는 것은 주로 그 인간의 정신을 숭배하는 것이다. 즉, 숭배받는 자의 물리적 위대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머리 안에 숨겨져 있어서 알 수 없는 아주 깊고 위대한 정신 · 능력 · 의지와 같은 신비로운 정신적 위대함 때문에 숭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의 평범한 정신으로는 차마 그 위대한 정신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아주 복잡한 컴퓨터를 PC케이스에 넣어서 하나의 단품으로 취급하거나 길다란 계산명령어를 시그마(Σ) 같은 하나의 문자로 표현하듯이, 그 사람이나 가상 인격의 이름을 기호로 사용하여 그 이름이 지칭하는 대상을 포괄적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와 같은 표현처럼, 어떤 정신 안에 일반적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아우라와 권능이 숨겨져 있다고 상상하여 간주하는 것이다. 


인간이 각자의 두개골 안에 자리잡은 탓에 타인의 정신에 접속할 수 없는 본질적인 유폐 상태에 있고, 우리가 티타늄이나 소듐 같은 물질적 대상의 성질을 측량을 통해 직접적으로 알 수 있고 그러므로 불변의 사실(fact)을 취득할 수 있음에 비하여 타인의 정신에 대하여서는 단지 사실로서 알 수는 없고 말이나 행위 같은 행동적 증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 방향성을 간주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타인의 진심이라든가 진정한 가치나 능력 같은 것의 실체를 손에 거머쥘 수가 없으며 단지 그동안의 정황에 미루어 추론가능할 뿐이라는, 어느정도는 슬프고 또 어느정도는 다행스러운 현실의 조건을 헤아려보았을 때, 타인의 정신에 뭔가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숭배와 같은 행위들은 충분히 일어남직한 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에 예수 본인이 마침 한국에 재림했다고 생각해보자. (유의하라 - 한국인 재림예수가 아니라 '그 예수' 본인이 재림을 했다는 설정이다 -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삼위일체론을 존중한다) 예수도 한국에서 금융거래를 하려면 공인인증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전자상가에 가서 컴퓨터를 맞춘다. 예수는 그 컴퓨터를 몇 년 쓰다가 고장이 나버려서, 컴퓨터 수리기사를 부르게 된다. 교회에 다니는 그 컴퓨터 기사님은 예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니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그 분은 예수님의 신적이고 초월적인 내면을 상상하며 엄청난 경외심을 갖는다. 하지만 일단 컴퓨터를 고치러 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컴퓨터를 수리하기 시작한다. 한국정보통신자격협회(ICQA) PC정비사1급 자격을 보유한 기사님은, 예수의 내면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의 컴퓨터는 10분도 되지 않아서 수리를 완료한다. 왜냐하면 컴퓨터의 구조야말로 오랜 PC 정비업무로 눈 감고도 손바닥처럼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기사님은 예수는 경외하지만, 예수의 소유물인 컴퓨터에 대해서는 경외하지 않는다. 이미 구조가 밝혀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사님은 컴퓨터의 작동 원리와 고장의 패턴, 수리하는 방법과 유지보수하는 방법까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기사님은 예수를 숭배할지라도 예수의 컴퓨터는 숭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기사님에게 직무의 대상에 불과하다.


예수의 컴퓨터와 PC수리기사님 간의 관계가, 인간과 심리학의 관계와 같다. 예수님을 믿는 PC기사님이 예수의 컴퓨터까지 경외하지는 않은 것처럼, 심리학은 인간을 존중하지만 인간의 정신을 신비로운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서 굳이 경외까지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심리학은 신비롭다고 간주되는 인간의 내면이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 있고 비슷비슷한 패턴을 가진 하나의 반복되는 구조라는 것을 밝혀온 학문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자신의 컴퓨터를 소유하였듯이, 인간도 자신의 정신을 소유한다. 그리고 컴퓨터공학에서 컴퓨터 구조가 잘 알려져 있듯이, 오늘날 심리학에서 정신의 구조는 상당 부분 알려져 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속담처럼, 인류의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날씨를 알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면 농사를 망치듯, 인간의 마음과 행동도 알 수 없다고 해서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환경과 대상을 통제하려는 생물의 (그리고 인간의) 행동경향성은 역술이나 주역이나 사주명리와 같은 비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사람의 마음을 예측하려 애썼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은 과학적 방법을 거듭함으로써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으나, 비과학적 방법은 비과학적 방법을 거듭할수록 더 많은 쓰레기 정보를 발생시킬 뿐이기 때문에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주술은 실패하였고 관습적인 차별과 고정관념이 색다른 표현으로 되풀이되게 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그리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개인 안에 존재하는 어떤 신비로운 영성이나 초월적 능력 같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경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떤 것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주술로 만들고 어떤 것을 과학으로 만드는가?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을 바로 사물에 대한 객관적 구조를 과학적 방법으로 검측하고 그것을 검증하려는 노력에 달려 있다. 어떤 학문이든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구조를 탐색하는 행위라는 공통점이 있다. 요근래 문과-이과 농담에서 드러나듯이, 인문계나 사회계 이론들은 과학이 아니라는 다소 멸시적인 인식이 퍼져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에서 정말로 자유분방해 보이는 평론들이나 문학작품을 얼마나 철저하게 구조화하여 분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안다면, 농담으로라도 문과를 조롱하기는 힘들 것이다. 모든 학문은 대상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집요한 해부의 태도라는 점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그리고 구조란 뚜렷하건 흐릿하건 우주에서 예외 없이 반복되는 필연적인 패턴을 의미한다. 심리학의 특색은 그 패턴을 사람의 마음에서 찾아보려는 관심의 방향에 있을 뿐이다.


DNA 나선구조부터 보보인형 실험과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거쳐 공중보건 여론조사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은 인간이 상정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단위에 대하여 과학적이고 구조화된 관측을 시도하였으며, 때로는 정량적으로 때로는 정성적으로 관측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를 이론으로 정리하였고 그 가운데 우울증이나 조현증 등의 일부 현상은 상당한 수준에서 발생기전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또한 물리적으로 움켜쥘 수 없는 어떤 행동의 패턴이나 현상을 조작적으로 정의(Operational Definition)함으로써 추상적인 현상을 세분화하고 각 현상에 대해 수술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게끔 인간의 인간 정신에 대한 접근성을 마련했다. 심리학의 과학화된 탐구 기술은 그런 신비로운 영성이나 초월적 능력 같은 것이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존재할 수 있고 훈련될 수 있으며 때로는 전혀 초월적인 것이 아닌데도 초월적이라고 오인되는 관찰자의 오류 때문에 잘못 간주될 수 있음을 밝혔다. 


이와 같은 자연과학으로서의 심리학 · 응용통계학으로서의 심리학이라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속수무책의 카오스로 간주되고 주술의 대상이 되던 인간의 정신을 수술대 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으며, 모든 심리학자들을 훈련하는 데 사용되는 과학자-실천가 모델(Scientist-practitioner Model)이라는 과학철학과 그것에 입각해 양성된 심리학 전문가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모든 사례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내면은 어떤 영(靈)적인 것이나 신비나 초월이 아니다. 그냥 모두가 동일한 발생학적 구조와 아주 미세한 바리에이션을 가지고 가지고 있는 두뇌의 행동적 산물일 뿐이며, 더 나아가 그것은 유전자의 표현형이고, 더 나아가 유전자 역시 무수한 화학작용 가운데 일어난 우연한 화학작용들이 연쇄하는 한 과정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심리학은 혈액형 성격학이나 사주명리나 MBTI성격이론이 왜 그렇게 신비로운 검측력을 가진 것이라고 '잘못 간주되는지' 밝혔고, 신통방통하게 귀신을 보고 귀신의 소리를 듣는 무속인들도 사실은 비교적 적응적인 형태로 발병한 조현병 환자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렇다보니, 과학이론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주역(周易)』처럼 역사적 전통이 있는 서적에조차 의지하지 않고 더 개인적인 특별함에 기초한 어떤 개인에 대한 숭배는 더더욱 쉽게 기각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 컴퓨터도 컴퓨터인 한 메인보드가 없는 것이 아니며, 메인보드가 있는 한 메인보드의 작동원리에 국한되어서 작동한다. 그런 것처럼 어떤 영웅이나 숭배의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인 한 두뇌가 없는 것이 아니며, 두뇌가 있는 한 두뇌의 작동원리에 국한되어서 살아간다. 영웅이나 숭배의 대상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구성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생물학적 동등성이라는 지점에서 개인의 초월적이거나 초현실적인 능력에 대한 가정은 기각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독특한 업적을 설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대신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다른 요인'이 탐색되기 시작하는 것이며, 비로소 우리는 어떤 영웅의 업적을 개인적 신화가 아니라 사회과학적이고 행동과학적인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인류는, 특정 인간의 특별함을 설명하고 숭배의 근거를 찾기 위하여 가장 핑계대기 쉬운 인간의 정신 내적인 영역을 지목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이제 심리학이 손전등을 들고 두뇌의 구석구석을 비추어서 사실 영혼 같은 것도 다 오해와 착각이며, 모든 인간이 거의 똑같은 두뇌와 비슷비슷한 정신을 가지고 살 뿐, 차이가 있다면 약간의 유전적 변동과 커다란 환경의 변동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밝혀내버렸다. 이제 초월은 없다. 숭배도 없다. 그런 초현실적인 가정의 근거가 얼버무려질 수 있는 마지막 핑계거리인 인간 내면이 밝혀져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이 '변수의 소거법'이 등장하는 순간이, 모든 이유를 단순히 개인의 내면에서 찾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었던 심리학이 오히려 개인을 설명할 때 개인-내적인 변수에 주목하는 것을 제한하고 인간을 사회적이고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길로 이끄는 촉매였음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오늘날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의 뇌, 김정은 위원장의 뇌, 앙겔라 메르켈 연방총리의 뇌가 거의 별다른 차이 없으며 심리에 있어서도 거의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안다. 당연히 연역하면 이순신 통제사, 2천년 전 예수, 이만희 교주, 마하트마 간디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오직 다른 것은 각자가 자라고 살아온 환경과 신념과 그때그때 처한 상황뿐이다. 심리학이 방대한 연구를 통해 무엇이 변수이고 무엇이 상수인지 밝혀줌으로써, 이제 모든 개인의 이해할 수 없거나 더러는 놀라운 활약들도 과학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고, 개인의 예외적 성취를 신적 초월성이 아니라 그렇게 된 상황의 독특함을 분석하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컴퓨터를 어떻게 숭배할 수 있는가? 컴퓨터가 뻔한데. 이만희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을 어떻게 숭배할 수 있는가? 인간이 뻔한데. 동시대 한국사에서 아주 소중한 기여를 해 주었던 김대중-노무현-문재인과 같은 민주화의 기수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정상국가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전설적인 삶의 궤적을 가졌고, 많은 팬덤이 있으나 이제 그들을 기념하는 방식은 인류가 오랜 세월 반복해 온 개인에 대한 이상화와는 다를 것이다.


이제 주술은 없다. 이제 숭배는 없다. 이제 세상에는 인간이 이해한 것과, 인간이 앞으로 이해할 예정인 것밖에 남지 않았다. 과학의 빛 아래에서 숭배는 해부될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 숭배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사람의 행동에 대한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평가와 기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다. 개인의 활약을 신비로 포장하여 숭배하지는 않더라도,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고마워하고 존경을 바칠 여지는 얼마든지 남아 있다. 주술과 숭배 없이도 우리는 민주화운동가나 역사 속 위인들을 좋게 평가할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이 타고난 신적 능력이 없이 그냥 나와 똑같은 몸과 똑같은 정신으로 그렇게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상황이 주어진다면 그들과 똑같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행동의 원리에 대한 탐구가 개인의 특별함에서 사회-환경의 결합 문제로 옮겨갈 때, 우리는 진정한 공공 정책과 공동으로 참여하여 마련해야 할 사회적 조건과 환경에 노력을 집중할 수 있다.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하여, 인간의 동일성과 동등성을 파악하고, 그 공통지반 위에서 새로운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 인류를 혼돈과 주술로부터 구하는 것. 그것이 심리학이 우리에게 주는 어둠 속의 빛이고, 인류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나눔이다. 심리학을 통해서 우리는 숭배와 신비에 면역이 된다. 만세 삼창은 끝났다. 과학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우리는 우리가 정확히 바라는 것만을 얻으리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Edwin Andrad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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