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하루 지났다.
지나간 것들은 두루뭉술하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으니까 그동안 내가 봐왔던 추석 보름달들은 어땠을까.
내가 본 것들을 거꾸로 상상해야 하다니, 신기하면서 허전한 일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일부러 달을 구경하지 않았다.
휘영청 밝았다면 처갓집 마당을 나올 때쯤 저절로 눈에 들었을 텐데 올해는 그러지 않았다.
추석이 휴일처럼 지났다.
무엇인가.
오랫동안 입고 살았던 겉옷을 벗어 놓은 기분이다.
어떤 이들의 삶은 그들이 입는 옷으로 알아본다.
추석이란 옷은 가을이 입고 지냈던 가장 비싸고 눈부시며 화려한 옷이 아니었던가.
무대에 어울리는 그것은 웅숭깊은 한복의 주름 같아서 오랜 세월 사람들을 즐겁고 복되게 했으니 아름다웠다.
추석은 아름다운 것들이 높이 떠오르는 가을밤이었다.
바다를 보고 돌아온 날에는 물결이 출렁인다.
바다를 앞에 두고 있을 때에는 망망한 것과 구원이란 것은 저 깊은 색이 만들어지는 세상의 일이겠다는 무상함으로 가득할 뿐이다.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주님, 바다는 너무도 파랗습니다.'
바다에서 기억하는 순교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 같은 문장 하나로 나를 온통 파도치게 한다.
바다가 나오는 영화를 봤다.
´나는 보리´라는 자그마한 영화가 있습니다.
말 못 하는 엄마와 아빠, 남동생을 둔 말 할 줄 아는 4학년 소녀가 보리입니다.
보리는 소리가 사라지는 소원을 빕니다.
다른 식구들처럼 온몸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해석해 주고 설명해 주고 대신 전달해 주는 자신이 외롭게 보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보리는 불편과 차별, 그리고 운명 같은 것을 깨닫습니다.
식구들 앞에서 기꺼이 말을 할 줄 모르는 ´식구´가 되었지만 보리의 세상은 답답함으로 차올랐습니다.
´없는 것´을 갖지 못한 슬픔도 있겠구나.
나는 여태 결핍을 부족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란 것을 결핍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없는 것´이 채우는 공간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없는 것´이 챙기는 ´있음´을 몰라서 몰라봅니다.
보리는 엄마, 아빠, 동생이 말하지 못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행복해 보였습니다.
보리도 그 속에 들어가 같이 헤엄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푸른 바닷속 같은 고요한 세상에 머물면서 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행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있음´이 놓치고 마는 ´없음´의 미학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뻗어가는 뿌리들에게 영화 ´나는 보리´가 해주고 싶었던 말.
그 말은 바다를 닮고 하늘을 담아서 참 푸르고 넓었습니다.
어제 그러니까 가을 저녁, 秋夕에 산이, 강이, 그리고 야구에서 영화로 취미가 하나 더 늘어난 여사님과 본 영화다.
영화를 보고 아침에 쓴 기도문이다.
곧 세상으로 날아갈 그 기도문에 무엇이라도 하나 더 얹어 보라면 무엇이 손에 잡힐까.
오늘 우리는 격포에 갑니다.
마실길 4코스하고 5코스를 지날 것입니다.
10월에 부산으로 이사 가는 인후도 함께 걷기로 했습니다.
오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만날지 모르겠습니다.
그중에 가장 빛나는 것을 나중에라도 잊지 않고 따로 날려 보내겠습니다.
추석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요.
추석에는 그렇게 좋은 것들로 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