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짜리 여행 6

우리가 하는,

by 강물처럼

인후가 정말 좋아하더라는 말을 듣고 아빠는 흐뭇했다.

어제 우리는 얼마나 걸었을까.

그것은 몇 킬로미터라고 말할 수 있는 거리였을까.

아빠는 길을 더듬어본다.

처음부터 너희가 잠에서 깨기 전, 아니 세상에 오기 훨씬 전에 보았던 길에서부터 시작해본다.

쓸쓸했던가, 흑백 사진처럼 담담했던가, 그렇지 않음 첫눈을 맞았던가.


아빠가 길에서 했던 말들은 어떤 것이었냐.

아빠는 쏟아놓고 반짝거릴 줄은 아는데 담아놓고 철썩 일 줄은 모르는 썰물이다.

내 썰물에 너희는 무엇을 싣고 어디까지 나아가 볼 셈이냐.

솔섬은 소나무 몇 그루가 전부였는데 왜 천 년 만 년 그림 같을까.

사내아이 둘하고 계집아이 하나가 송골송골 맺혀 진주처럼 영롱했던 것을 두고두고 보고 싶다.

너희가 내게 선물한 어제는 마당 깊은 집에 우물인 양 사시사철 나를 비춰보기도 좋을 것이다.

맑고 차가운 물을 한 두레박 퍼올려 손과 얼굴을 씻기 전에 언제나 11살, 12살, 14살 너희를 기억하기로 한다. 하늘처럼 오래 바라보기로 한다.

내 나이 오십 살이라고 해도 아무 상관없이 웃고 까불고 재잘거리던 너희야말로 젊음의 전령사 傳令使다.

제비꽃이 바닷가에 피었더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너희가 걸었던 자리마다 제비꽃이었다는 것을 어쩌면 좋냐.

소금 내가 코끝에 잠기고 발밑으로 바닷개가 숨어드는 마실길 4코스와 5코스에서 아빠는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도 기가 막힌 허풍선이가 되었다.

아빠가 들이마신 바닷바람은 빈 虛, 믿기지 않는다고 거짓일 순 없는 비어있음의 허 虛, 거기에서 부는 바람 風.

바다가 텅텅 비었더라고 혼자 웃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진주 조가비들아, 철썩이는 파도야.

나를 싣고 네 가고자 하는 바와 네 하고자 하는 곳을 두루 유람 遊覽하자.

10월 초 서해 격포항.

바다에도 곧 가을이 들 텐데 그때 파란 바탕에 든 단풍은 얼마나 예쁠까.

어쩌다가 우리가 길을 걷는 동행으로 만났을까요.

인후는 산이보다 어리고 강이 보다는 한 살 많은 아는 동생? 성당 오빠? 대충의 관계로 우리 아이들과 친하다.

그래, 대충의 관계는 보기 좋은 것이로구나.

물 한 모금 건네고 얻어 마시는 사이가 따로 기쁘거나 슬프지 않아도 되는 홀가분한 맛이 있어 좋구나.

저희끼리는 진지한 것도 있겠지만 내가 보는 저희는 얼마 큼은 이기적이고 얼마 큼은 동화적이면서 또 얼마는 도형을 이루는 하나의 면이나 꼭짓점 역할을 부지런히 해댄다.

이런 것을 올망졸망이라고 그랬던가.

스무날 지나면 부산으로 이사를 가는 인후와 산이 강이는 아웅다웅 이별 여행을 하고 있는 줄 알기나 할까.

다시 보기 어렵다는 말이 그들 사이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화폐 같다.

전혀 아쉬움이 없는 표정으로 대신 조금 힘든 얼굴로 5시간을 걸었다.

같이 있어야 모양이 갖춰지는 트랜스포머 스타일의 관계론을 열 장쯤 읽은 느낌.

아빠는 무슨 생각인 줄도 모르면서 생각하느라 더 웃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었는데 너희는 생각 따위는 던져놓고 바람보다 먼저 웃고 바람보다 먼저 까불거린다.

나라는 존재를 우리라는 관계에서 바라볼 줄 알고 거기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맞겠다고 깨달았다면 너희는 '갑분싸' 그러면서 또 웃겠다.

강이는 나선형으로 계단을 오르던 전망대가 좋았다고 그런다.

지금 생각하니 거기가 우리가 걸었던 길의 한 가운데였었구나.

격포항은 무질서하고 시민 의식은 없고 배들은 어지러웠다.

아무 데나 쓰레기가 쌓여있었고 강태공 닮은 낚시꾼은 없었다.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길도 헷갈려서 복잡한 거기를 헤맸다.

마실길은 미안하지만 관리가 더 잘 될 필요가 있는 길이다.

길은 어수선하고 팻말은 안내자로서 역할을 억지로, 간신히 해내고 있는 인상들이다.

충분히 좋은 재료를 가지고 정성을 들이지 않는 빵을 굽는 가계에 누가 빵을 사러 다녀가겠는가.

어떤 커피를 내놓아도 어울릴 테라스가 겸비된 마실길이, 산과 바다가 조화로워 사람이 흐르기 좋은 땅이 마른 햇살에 방치된 고깃배처럼 깔깔하게 속에 걸린다.

격포항에서 해넘이 공원으로 빠져 산 하나를 넘어오는 듯하더니 드라마 세트장이 나왔다.

전라좌수영 세트장이라고 하기에는 삐그덕 대고 정리되지 않은 모습에 일부러 여길 보러 왔더라면 약이 올랐을 것이다.

궁항 앞바다에 서있는 자그마한 등대를 바라보면서 아쉬움이 안타까움으로 번졌다.

마실길 자체는 걸을수록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데 결국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과장 광고의 씁쓸한 뒷맛 같은 것들.

많이 말고 대충, 가볍게만 다뤄도 좋을 것을 어쩌다가 손을 놓고 말았는지, 짓다가 만 건물들을 지나면서 코스모스로 속을 달랬다.

, 빨갛고 하얀, 분홍이 흔들어 주는 가을.

우리가 쉬었던 전망대가 바로 거기였다.

한쪽으로 펜션이 반대편으로 오렌지색 지붕들이 늘어선 바닷가 마을을 가운데 두고 우리는 누가 빠삐코를 살 것인가 가위 바위 보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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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기분 좋아지게 하는 음악이 몇 개 있는데 들어볼래?

캘리포니아 드리밍 California Dreamin'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가 있었다.

내가 스물몇 살에 봤으니까 산이나 강이, 인후가 세상에 나올 생각도 못했을 때네.

아이큐 75의 검프라는 아저씨가 쉼 없이 달리는 인생을 담은 영화거든.

그 영화에서 듣고 좋아했던 노래를 들으면서 걷고 싶었다.

이탈리아의 나폴리가 아니더라도 스위스의 몽블랑이 아니더라도 나는 마실길을 예찬하기로 한다.

머리에 꽃을 꽂고 걸어야 하는 샌프란시스코를 찾아가듯이 자세를 바꿔 걸었다.

모항으로 간다.

모항까지 간다.


엄마가 약한 소리는 잘 안 하는 편인데 오늘 아침에는 그러더라.

허리가 아프고 팔도 아프고 몸에 피로가 풀리지 않는 것 같다고.

엄마는 그럴 만하다.

내가 보니까 엄마가 가장 많이 걷더라.

뒤에서 부르면 다가가고 누가 무겁다고 그러면 그 가방을 들고, 마치 대답처럼 너희들 입에 바싹 붙어서 길을 걷더라.

아빠는 앞서서 걷는 일에만 열중이니까, 아빠는 조금만 닮아라.

다 잊어도 엄마가 같이 걸어준 길을 갖고만 살아도 너희는 보석이 될 것이다.

엄마는 산이랑 강이가 씩씩하게 걸어주는 것으로 산다고 그럴 것이다.

먼 훗날 아빠 말이 맞았다면 그때에 웃어주라.

뜬금없이 아빠, 소주 한 잔 해요,라고 말 걸어주라.

5시 50분 격포 가는 버스를 타려고 우리 부지런히 걸었다.

길이 차분해지는 곳에서 우리는 지친 것도 같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5코스 모항에 다 왔다.

4시 20분에 바닷가에 앉아 오늘 영업을 마치기로 했었는데 그러고도 한 시간을 더 걸어서 우리는 버스를 타러 왔다.

아빠는 버스 타는 것이 참 좋다.

나한테 어울리는 것 같아서 좋고 걸어온 길을 달리면서 바라보는 일은 꽤나 낭만적이기도 하니까.

인후야, 오늘 어땠냐?

인후는 집에 가서 자기 엄마한테 실컷 자랑했다고 그런다.

정말 재미있었다고.

아닌데, 정말 재미없었을 텐데 너는 의리도 있고 튼튼하기도 하고 착하기도 하구나.

항상 건강해라.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란다. 네가 무엇을 고를 것인지 아무도 모르지.'

내가 젊은 날에 들었던 그 좋은 말을 키가 작은 인후에게 선물로 건넨다.


가을이 멋스러워지는 날에 우리 다섯은 길을 걸었다.

또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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