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개의 도시락

일본 영화

by 강물처럼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生育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는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 중용 23장

아무리 써도 모자란 문장, 중용의 그 문장을 다시 가져왔다. 지난 세월 나는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옮겼던가. 그때마다 어떤 인연이 - 나는 에너지, 힘을 인연이라 부르는 사람이다. - 이 책상 위로 찾아들었던가.

자고 나면 개학이다. 긴 겨울 방학이 끝나갈 무렵 그렇지 않아도 짧아서 서러운 2월 끝에서 내가 느꼈었던 막막함, 나는 한껏 나약했었다.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날개가 붙잡힌 수리 한 마리. 나는 잘 길들여진 날짐승이었을까.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무단결석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내가 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학교에 잘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무던히도 잘 참는 그것 때문에 나는 시인이 되지 못하고도 여전히 중용 23장을 베끼고 있다.

어제는 날이 포근했다. 오후 늦게 비치는 햇살도 곱다시, 어쩐지 심간 편하다. 마치 방금 빨랫줄에서 걷은 옷을 입고 맡아보는 새물내가 내 몸에서 물씬 풍길 것만 같았다. 마음이 편하니까 바깥이 다정해 보인다. 산책이 가벼웠다. 한 달만 지나면 여기에 때죽 나무 흰 꽃들이 사방을 밝힐 것이다.

"어제, 그제 추웠던 것이 이제 보니까 산통産痛이었네. 바람이 달라졌잖아. 오늘 새벽에 봄을 낳았군."

그렇지 않아도 저기 의자에 좀 앉았으면 했다고 숨을 고르는 아내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오래 천천히 끄덕이는 것이 세월이 지은 문장을 읽어 내리는 것 같았다.

일요일이 다 저물고 거실 블라인드도 내리고 가운데로 모여 앉았다. 내일은 개학이니까 일찍 자자, 영화 하나 보고. 성별과 연령층이 다른 네 사람이 모두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나는 것도 인연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2시간 동안 하나의 생명이 되어 우리가 만난 인연과 깊은 대화를 나눈다. 나는 눈이 되고 아내는 귀가 되고 산이는 머리, 강이는 심장이 되어 그를 알아간다. 2시간짜리 연애 이야기가 펼쳐진다.

"왜 461개일까?"

"3년 동안 이래잖아."

"3년이면, 아! 방학을 빼면·····. 그래도 너무 적은 거 아냐?"

영화가 시작하면서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서 '이것은 도시락에 대한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친절하게 정리해 주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 말에는 중용 23장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도시락 안에 담은 반찬, 누구나 좋아했던 반찬 한두 개는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한번 물어볼까. 영원히 우리를 기쁘게 하는 반찬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그것을 ㅇㅇㅇㅇ라고 생각한다.

문제없는 집이 없다고 그러면 안심이 되는가, 아니면 쓸쓸한 생각이 드는가.

코우키네도 산뜻한 출발을 했다. 나는 아이가 태어날 때 나무를 심어주는 '선물'을 낭만적이라고 여긴다. 낭만이 깃들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술술 나올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그 이야기만 그대로 주워 담아도 소설이 될 것 같아서 낭만이 보석처럼 보인다. 보석을 속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보고 싶다. 그런 보석 같았던 사람들이 이혼을 한다. 산다는 것은 보석만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닌 것을 다시 확인하며.

아빠 카즈키는 순하고 자유롭다. 그는 뮤지션이다. 그는 알아차린다. 영혼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하면 광고 카피가 될까. 순한 존재가 갖는 능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쟁하지 않는 사람은 파도 소리의 파도, 바람 소리의 바람, 사람 마음의 마음이 잘 들리는 것 같다. 부부의 이혼에 집중하지 않는다. 영화는 말했던 것처럼 '도시락'에 정성을 쏟는다. 역시 도시락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마음'으로 만들고 '정성'으로 싸는 선물이다.

산이 육아일기는 열여덟 해가 되어간다. 스무 살까지 쓸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가 챙기는 아이들 도시락은 '일기'다. 나도 빼먹기 아까워서 그리고 내가 좋아지는 것 같아서 쓰고 있다고 고백한다. 아빠 카즈키는 알았을까. 자유롭던 자기 영혼에게도 - 기분 좋은 날에는 술을 마시며 다음 날이든 뭐든 아무 걱정이 없었던, 음악이 전부라고 여겼던 영혼 - 빛이 들기 시작한 것을. 영화는 방을 하나 보여주는 것 같다. 코우키네가 사는 집은 언덕 위에 있는 예쁜 집이다. 집을 짓고 나면 방이 생기고 한번 위치를 잡은 방은 햇볕을 따라 움직일 수가 없다. 고정된 것이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도시락을 만들면서 그리고 그것을 먹으면서 아빠라는 방, 아들이라는 방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다. 햇볕이 좋아, 바람이 좋아 그러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들도 모르게 방이 움직인다. 그래서 집이 좋아지는, 근사해지는 스토리. 집이 좋아지면 세상이 좋아지는 거야, 뻔한 일이 된다.

인구 절벽이니, 그래서 대책이 필요하다고 1억을 준다느니 별별 아우성이다. 나는 그 해결책이란 것들에 기대가 가지 않는다. 도시락 하나만도 못하는 정책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한다. 그러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거 아닐까 걱정도 된다. 영화 마지막에는 코우키가 울먹이며 계란말이를 입에 넣는다. 그래, 맞다. 우리에게는 '눈물 나는 맛'이 필요하다. 그 맛을 잃어가고 있다. 벌써 다 잃어버렸다면 그거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도시락을 만들고 싶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까지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는 편리지상주의는 사람까지 대신 낳아주기를 바라는 태도로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 나라가 발전을 꿈꾸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발전이 어쩌다가 겉만 치장하는 일로 변질되었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마음이 몸을 따라가는 사람은 위태롭다. 몸이 마음을 붙잡고 길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도시락 하나에 담겨 있는 가르침이다. 전날부터 무엇을 요리할지 식단을 정하고 재료를 다듬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밥부터 짓고 차근차근 반찬통에 찬을 담는 일. 그것이 통째로 생략된 오늘 아침, 아이들은 무엇을 들고 밖에 나서는가.

영화는 도시락에 관한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감동이 있고 부러움도 있다. 내가 부러워한 것은 계란말이 레시피. 하지만 부러워만 해서는 안 된다. 오늘 이 이야기도 산이와 강이 일기에 끼어놓을 것이다. 나는 몇 개의 일기를 썼을까. 산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코우키가 대학에 잘 다닐 수 있을 것 같다며 두 부자가 웃으며 언덕을 오르면서 영화가 끝난다. 산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나도 육아일기를 졸업할 것이다. 그때부터는 일기는 자기가 쓰는 거라고 일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