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는 새로 2학년에 올라가는 반에 소문이 좋지 않은 아이가 한 명도 아니고 둘이나 된다고 푸념이다.
나도 그랬었다. 신학기가 되면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았다. '새로운'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부분이 부담스러웠다. 담임 선생님은 얼마나 무섭지 않느냐가 언제나 기준이었다. 같은 반에는 껄렁거리거나 싸움을 잘하는 몇몇이 꼭 있기 마련이었다. 다만 불편하게 엉키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교실에 들어서곤 했다. 설렘은 거의 느낄 수 없었고 낯선 것들이 불편해서 3월은 우울한 쪽이었다. 하늘도 3월이란 이름이 주는 기대감을 하나도 반영하지 못했다. 차가운 바람이 옷 속으로 들어오고 하늘은 창백한 쪽에 가까워 을씨년스러웠다. 회색 건물이나 적벽돌로 쌓은 굴뚝같은 것들이 자주 눈에 띄는 계절, 처량하기도 하고 어쩐지 여기에서 잘 지낼 것 같지도 않은 막막함이 내게는 있었다.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은 날들, 그것이 내가 보낸 3월 초의 모습이다.
강이야, 지리산을 걷는 것처럼 학교에 다니는 거야.
엄마는 어떤 점이 좋냐고 일부러 물어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엄마는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고 그런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엄마가 있어서 강이는 좋겠네, 그러면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우리는 왜 답을 주려고 할까. 강이는 분명히 엄마가 말을 잘 들어줘서 좋다고 그러는데 나는 늘 결론을 짓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문이 닫히지 않게 받치고 저 안에 들락날락한다. 처음으로 글을 쓰면서 강이의 입장에 대해서 생각한다. 강이는 어떤 악기일까. 오케스트라, 관현악단을 꾸민다면 강이가 소리 내는 악기는 무엇일까. 실내악이라면 그것은 피아노일까, 바이올린일까, 첼로가 될까.
김홍도가 그린 무동舞童에 나오는 장구는 어떨까, 피리는 또 어떻고 대금, 해금 소리도 싫지 않다. 궁글채를 잡고 장단을 맞추는 북이 울리면 어떨까. 생각이란 것이 이처럼 하잘것없구나.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떤 악기는 내 입장이고 강이 입장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무대 밖이 아이의 무대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내 시작은 거기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늘 '답'을 주는 것에 그치고 만다. 하느님이 그러지 않으셨는데 사람은 그러고 산다.
생각을 물어야지, 답을 물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자고 생각 = 문제 해결이라는 성城을 쌓으면서 살았을까. 문제가 없다면 생각할 것도 없다는 것은 터무니없지 않나. 있을 것이 없으면 당황스럽다. 어처구니가 있어야 말이 되고 어이가 있어야 이해가 된다. 모든 것들은 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만물의 처음, 그것이 '터'다. 처음이 없는 중간이나 끝은 그래서 어처구니없다. 처음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보다 처음은 있는 대로 보는 것, 어디에 짜 맞추지 않고 그대로 보는 것이 맨 처음이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헛심을 쓰고 있는 것이다. 헛심 위에 지은 집은 터 없이 지은 것 마냥 환상일 뿐이다. 내가 지은 집이 아니라 내가 지은 잘못으로 아무도 살지 못하고 만다. 나는 더 이상 문제를 풀지 않아도 될 것을 이제야 기뻐한다. 아이는 문제가 없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아이에게 이겨내라고 가르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인생이 평가 문제집 한 권 푸는 일은 아니니까, 문제는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고 우리는 생각을 하고 살기로 한다. 내 생각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그것은 선물 세트가 될 수 있을까, 거기에도 고민만 잔뜩 쌓여 있을까. 아니면 돈일까.
신학기를 맞아 긴장하는 아이를 격려하려고 쓴 육아일기가 나를 일깨우는 문장으로 채워진다. 문제없어, 나는 문제없어, 그런 노래가 있었는데······.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豕顔見惟豕 시안견유시.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佛眼見惟拂 불안견유불.
세상은 문제집이 아니다. 세상이 언제 저를 풀라고 그랬단 말인가. 그러지 말고 우리나 풀자. 우리끼리라도 풀고 지내자. 아니면 나라도 풀어야겠다. 그게 뭐라고 나는 나를 칭칭 감고 그러는지, 풀 것은 풀어야겠다. 문제가 아니라 나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