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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승부다

오래 쓰는 육아일기

by 강물처럼


안개가 짙고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콘크리트 건물이 창 하나에 다 들어오는 배경에서는 봄비가 내린다는 말이 잘못 온 문자 메시지같이 부조화를 이룬다. 서로 다른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를 바라봐야 하는 아련한 구석이 있다. 물 비린 내가 날 것 같아서 가만히 숨을 참고 바라본다. 109라고 큼지막하게 쓴 글자도 비에 젖었다. 건너편 아파트에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 비 오는 아침, 모두 물속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누군가 잘 아는 사람에게 보낸 듯한 말투와 내용, 잘못 보냈다는 말을 다시 보내줘야 하나, 가만있어야 하나. 비가 아직 내리고 있나, 그쳤나. 건너편 아파트가 점점 안개에 잠기고 있다.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잠시 느긋하기로 마음먹는다. '간발의 차이로' 지금 그 음악을 틀어놓는다면 바깥은 춤을 출까, 탱고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일순간에 주위를 춤추게 만드는 그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탱고를 두드리기로 한다. 산이와 강이 일기를 적는 일은 이렇듯 춤곡 같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엄마가 깨우면 다시 엄마를 부르는 산이는 꼭 주물러 달라고 그런다. 나한테는 한 번도 그래본 적 없는 것을 매일 아침 - 제 엄마는 마음이 바빠 허둥대는데도 - 마사지를 받고 일어난다. 어디가 편하고 좋을까. 나는 그것이 마음인 줄 안다. 그렇게 부드러운 것들로 저를 채우고 싶은 마음인 줄 안다. 내가 그때 틀어주는 노래는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메조소프라노 캐서린 젠킨스 Katherine Jenkins의 목소리로 산이 방 앞에 놓아준다. 좋으라고, 저도 좋고 엄마도 좋으라고.

오늘 아침은 유부초밥이다. 나는 밥을 먹고 산이하고 강이는 거실을 오며 가며 하나씩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빈 그릇을 들고 일어서는 나를 보고 산이는 웃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또 엄마를 부른다. 엄마!

못 봤어? 아빠, 지팡이?

아니, 봤지, 봤는데 이거 정말 미안한데 웃음이 나와서.

그 웃음은 특이했다. 빈 그릇을 옮기던 나도 웃음이 났다. 왼손에 쥔 지팡이는 자기 일에 열심이다.

모두 떠나간 집에 다시 정적이 감돈다. 이 아침의 고요는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길 잘했다 싶어서 커피를 탔다. 10년, 조금 있으면 20년,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줬던 모습은 '웃긴' 이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를 들고 살 수도 있었는데, 무서울 수도 있었는데, 어려울 수 있었는데. '웃긴' 사람일 수 있어서 그 세월이 후회되지 않을 것 같다.

엊그제 저녁에는 강이하고 꽤 긴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은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대화'였다. 대화라고 할 만큼 인상적이었고 들떴으며 그때에도 제법 인생다운 인생이 곧 내 앞에 보일 것 같은 황홀감이 끼쳤다. 너는 대화를 할 줄 아는구나 싶어서 자꾸 말을 하면서도 응원을 했고 아이를 존경하고픈 마음도 일었다. '나는 사라져야 할 직업과 계속 세상에 남을 직업들 사이를 고민해야 하는 첫 번째 인류'라는 말에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게 서 있어야 너에게 그늘이 되고 풍경이 될 수 있겠냐며 그윽하게 - 그 순간만이라도 - 바라보려고 애썼다.

'어쩌면 엄마하고 아빠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마지막 사람들일지도 몰라. 너희는 머리가 그 일을 하는 세대가 될 것 같거든.'

어느 쪽이든 좋은 것 그렇지 않은 것도 같이 갖고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믿을 것인지는 끝내 중요하다고 부탁 같은 말도 늘어놓았다.

'나는 무승부라고 생각해, 삶은 결국 최대로 양보하고 배려하고 타협해서 무승부로 이끌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보거든.'

탄생과 죽음까지 꺼내놓고 한바탕 놀았던 거 같다. 아빠의 인생관을 탐색하려 드는 저 꼬맹이에게 어떤 요리를 내주면 좋을까 흥미로웠던 시간이었다. 승부는 사실 경기를 하는 동안에 얼마든지 결정된다고 그랬다. 다들 경기장 안에서 뛰는 사람들은 알기 마련이다. 누가 더 잘했는지, 누가 더 뛰어나고 누가 더 운이 좋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누가 멋있었는지 우리는 정말 잘 알고 있잖아, 그랬다.

너는 이 이름을 아냐고 물었다. 곰취, 이 맛이 어떤지 모르지? 나는 이 맛이 피자한테 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피자를 좋아한다고 곰취가 피자한테 진 것은 아니잖아. 봄이 딱 그 계절이야, 어떤 꽃이든 당당하게 경기장에 나와 힘껏 자기 기량을 펼쳐 보이는 시절. 나는 그래서 다 멋지고 예쁘다. 그런데 이 말도 그냥 따라오면 안 돼, 나중에 따라오기로 하고 너는 네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 좋아. 그래야 너를 네가 알 수 있으니까.

비가 그쳤고 안개도 옅어졌다. 나는 기울어진 세상을 바라본다. 잘 기울어진 것은 꼭 나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울어져서 계절도 생긴 거라면 거기에도 뜻은 있을 것이다. 내 허리가 기울어지니까 아들이 웃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그런다. 나도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할 것만 같은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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