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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n 19. 2024

그것이 옳다

某也視善


 8시 반에 일과를 마치고 강이 저녁을 차려주고 - 계란 스크램블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 곧바로 프로야구를 봤다. 기아 VS 엘지, 올해는 1위 팀의 승률도 6할이 못 되고 하위팀도 4할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순위 싸움이 치열하고 어느 순간 추락할지 모르는 긴장감이 있다. 광주 경기는 암표를 사서 들어간다고 할 정도다. 엘지는 어제 진 탓에 3위로 내려갔다. 하룻밤 자고 나면 순위가 바뀌어 있다.

그것이 있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외롭고 쓸쓸하지만 편하고 좋다는 것은 비교적 덜 느낀다. 혼자 있는 사람이 편해서 좋다고 그러는 것도 아직 그 마음에는 힘들고 불편했던 예전 기억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외로움이나 고독이 절대적 감정이라면 편하고 좋다는 감정은 상대적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있어도 외롭고 즐거운 곳에서도 고독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편하고 느긋하려면 편하지도 않고 느긋하지도 않은 상대가 필요하다. 슬픔이나 기쁨도 비슷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내 슬픔이 더 큰 슬픔 앞에서 흐물흐물해지고 내 기쁨이 더 큰 기쁨을 만나면 기가 죽는다. 그라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치는 선수들이 경기에 매진할 때 내가 느끼는 편안함은 치솟는다. 한 치 앞을 모를수록 선수들은 긴장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엔도르핀이 쏟아지는 것이다. 그것이 쾌감이 된다. 그러다가 어제처럼 경기를 이기면 흐뭇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다. 경기에 졌다, 그러면 쾌감까지 올라갔던 상승 곡선이 차갑게 식는다. 사람이 맛보고 싶은 많은 감정 중에 상층부를 이루는, 그 하나가 바로 보람이다. 보람 없는 삶이야말로 누구나 두려워하는 삶일 것이다. 보람이 있어야 웃음이 난다. 그것은 매출에서 경비를 제하고 남은 순수익 같은 것이다. 자기가 번 만큼 행복해지는 것이 삶의 구조다. 그래서 야구팬들이 응원하던 팀이 경기에 지면 두 배, 세 배로 낙담한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손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니 꾸준히 야구를 좋아하고 있다. 올해도 야구장에 찾아갈 수 있을지 불확실하지만 어디서든 그들을 응원하고 있다. 회의 때문에 퇴근이 늦은 아내도 합류했다. 야구를 좋아하게 된 아줌마가 옆에서 집중한다.

 경기가 다 끝난 시간이 10시 반, 하이라이트까지 보고 일어난 시간이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아직 한두 시간 움직일 여력이 있겠지만 그때쯤이 나는 잠들기에 딱 좋다. 예외 없이 쓰러지듯 잠에 든다.

 박완서의 티베트 여행기, 모독을 보고 있다. 65살의 나이로 거기를 여행하면서 쓴 책이다. 그리고 15년 뒤 2011년 세상을 떠난다. 다시 13년이 지나서 선생이 쓴 글을 읽는 나다. 요즘 우연찮게 30년이란 간격이 몇 번 마주친다. 일본 영화도 러브레터도 그렇고, 작은 아버지 장례식에서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30년 지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30년 밖에 있는 일들과 30년이 되는 일들로 앞으로 내 삶은 차곡차곡 되감기가 되겠구나. 사실 살아만 있을 뿐이지, 지금이라는 시간이 별 감흥이 없다. 여차하면 우울증에라도 빠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처지다. 내가 쓰는 아이들 일기가 30년 지나서 과연 어떻게 읽힐까. 어떻게 읽힐까 생각하는 거, 그거 생각할수록 우스운 거다. 사람은 그런 데 잘 기댄다. 시를 쓰려면 자기를 둘러싼 주변을 의인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 은유니 직유 같은 것들이 거기에서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삶은 시가 아니다. 시 같은 삶이 있지만 삶은 시가 아니다. 아이들이 30년 후에 읽을지 안 읽을지도 모르지만, 읽더라도 거기에 '어떻게'는 없다. 물론 '어떻게' 읽을 것이다. 모든 읽는다는 행위는 어떻게 없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그렇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어떻게'는 없다. 그런 것을 부질없다고 말했던 것은 아닌가.

 박완서 선생은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읽은 줄은 아예 모른다. 모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것은 '없다'가 된다. 누군가에 감동을 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인간적이다. '모독'을 읽으면서 나도 선생을 따라 티베트를 달린다. 나도 고산병을 같이 겪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없다'가 된다. 그것이 옳다. 그렇게 직시하는 편이 쓸쓸하지만 맞다. 삶은 거기까지가 자기 땅이다. 그 땅에서 은유법이나 의인법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없어도 있으니까.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니까. 거기는 그런 곳이다.

 일기를 헛되이 쓴다. 그것이 옳다. 없어지는 것은 옳다. 옳은 것이어서 없어질 것이다. 어제는 그렇게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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