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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l 05. 2024

공부가 재밌네

오래 쓰는 육아 일기



 강이는 시험 첫날, '역사' 한 과목만 봤다. 4일에 걸쳐 기말시험을 보는 일정이다. 목요일, 금요일, 주말 이틀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까지 시험이다. 공부를 시키겠다는 학교의 의지와 굳이 이럴 거 있냐 싶은 아이의 입장이 선명하게 맞선다. 나는 강이 편에 서고 싶다. 어쨌든, - 그래, 사실은 이런 대목에서 '어쨌든' 하고 대충 넘어가려는 태도가 문제였으며 문제고 문제가 될 것이다. 다시 말을 바꾼다. 어쨌든, '어쨌든'은 안 된다. -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이런 스케줄은 별로다. 학교가 정하는 학사 일정에 간섭하고 싶지는 않지만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주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다. 말이 없다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교도 학생도 만족스러울 수는 없을까. 혹시 그런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역사를 어려워하는 강이였는데 시험지를 받고 15분 만에 다 풀었다고 한다. 물론 백 점은 아니란다. 강이가 3주 가까이 시험공부를 하느라 시간을 보낸 것을 잘 알고 있다.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게 사실 마음처럼 안 된다. 그리고 도와준다는 것이 과연 뭘까? 싶은 생각도 없잖아 든다. 혼자서 또는 스스로 교과서도 읽고 밑줄도 긋고 중요한 것들 정리해서 암기할 것은 암기하고 이해할 것은 이해하며 문제집도 풀어보는 것이 시험공부다. 수업을 하면서 가장 크게 신경 쓰는 부분은 아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도록 이끄는 일이다. 내가 읽어주고 이해시키는 열 개의 문장보다 아이가 직접 읽고 풀이하는 한 개의 문장이 더 가치가 있고 그게 결국 힘이 된다. 옆에서 아무리 친절하게 떠들어도 자기가 만들어 내지 않는 사고思考는 신기루처럼 형태가 없다. 늘 저기 있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실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실력은 내 손안에 있는 거, 내 의지대로 나와 한 몸처럼 움직일 줄 아는 것이어야 한다. 실력은 뿜어져 나오는 것이기도 하고 넘쳐나는 것이며 묻어나는 것이다. 때로는 눈부시고 때로는 향기롭다. 같은 문장이라도 경험이 바탕이 된 문장은 상상으로만 엮어진 문장과는 결과 무늬가 다를 수밖에 없다. 실감이 질감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300년 전 조선을 그리더라도 인간은 서로 관통하고 밀접한 데가 있어서 얼마든지 자신의 경험치가 반영된 인물을 등장시킬 수 있다. 내가 만든 것들, 내가 보는 것들, 내가 아는 것들은 내 경험, 내 공부, 내 실력의 반영이다. 삶은 운이면서도 실력 같은 거라서, 함부로 낙관적이거나 비관적이지 못하게 한다. 그게 삶이 품고 있는 문장이며 메시지다. 메시지는 단호한 명령일 수도 있지만 사람을 울리는 울림일 수도 있다. 메시지를 마음을 주무르는 안마나 마사지로 쓸 수 있다면 수신자와 발신자 모두에게 이로울 것이다. 지혜는 마술이 아니다. 없던 것을 생겨나게 하거나 있던 것을 사라지게 하는 눈속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것으로 저것을 만들어 보는 창작활동이다. 배려 같고 친절 같은 것이다. 지혜는 그래서 부드럽다.

 제대로 시험을 본 적 없이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치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보다 어릴 적부터 '문제'를 풀었다. 내가 했던 공부는 '문제'를 푸는 훈련이었고 강이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공부는 '읽는' 것이었다. 아이 딴에는 읽는 것이 좋은 줄만 알고 있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었을 것이다. 즐겁게 읽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세상이 어느 날 문제로 둔갑해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놀랐을 것이고 어쩌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 또한 어리둥절하고 갸우뚱거렸으며 입맛이 썼다. 그러나,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그때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잘 읽는 것, 꾸준히 읽는 것, 생각하는 것, 그 생각이 들판을 적시고 흘러서 바다로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거기 어디에도 문제가 문제 되는 장면은 없다. 물은 그렇게 흐르지 않는다. 자유롭게 모양이 없는 모양으로 제 모양을 갖춰나간다. 결국에는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 오롯이 남을 것이다. 공부도 없는 공부를 하고 문제도 없는 문제를 풀 것이다. 그게 물인 것처럼.

 산이는 오늘 시험이 끝난다. 어제 모처럼 나는 늦게 잤고 산이는 일찍 귀가했다. 거실에서 마주친 우리는 어정쩡했다. 어느새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아이다. 확률과 통계를 엄청 어렵게 출제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아이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잘 봤다느니, 못 봤다느니 따로 말이 없다. 대신 처음으로 그런 말을 한다. '공부가 재밌네, 엄마.'

재미가 있기는 얼마나 있겠냐. 나는 그 말이 막 불을 붙인 촛불 같았다. 손으로 가려줄까, 통으로 된 유리라도 씌울까. 피곤할 테니까 일찍 자라는 말을 건네고 방으로 들어왔다. 저는 무슨 마음으로 지금을 지내고 있을까. 정말, 공부가 재미있어진 걸까. 내가 저보다 더 살았다는 것은 아마 이런 뜻일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싶은 거. 엄마와 아빠는 이렇게 작은 사람들인데 너는 자꾸 자라고 있어서, 보기 좋아서, 가끔은 이렇게 사람을 웃게도 해줘서. 고마운 사람이어서 고맙다는 거. 그런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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