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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Jul 21. 2024

혼자서도 잘 놀고 있습니다

신발은 무슨 소용일까

2022. 0708.



수변로를 놔두고 등산로를 택했습니다. 입구부터 오르막입니다. 아침 두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이 영 탐탁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옜다 모르겠다 그러면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목에는 수건도 둘렀습니다.

생각이 많았습니다. 다른 날은 생각들이 나에게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볼 정도였는데 어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생각들이 떠나가지 않고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땀과 함께 질척거렸습니다. 소서 小暑라는데 어쩌겠는가 싶었습니다. 엇박자가 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6월 7일 따로, 나 따로, 마음과 몸이 제각각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입장 난처한 것은 길이었습니다. 줄여줄 수도 없고 깎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색한 기운이 흐르는 공간이었습니다.

침묵은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은 쏟아버리면 시원할 것 같아도 그때뿐입니다. 곧 다시 더워지고 운이 좋지 않으면 쏟은 만큼 화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혼자서는 떠들 수 없어서 저절로 차분하게 걷습니다. 이것저것이 불리했는데 용케도 발은 길을 잘 찾아다녔습니다. 돌이나 뾰족한 것에 걸리지도 않고 저를 도왔습니다. 발바닥이 움찔 아플 때도 있었지만 견딜 만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쭉 가자. 아무 말 말고.

발이 가르쳐줬습니다. 일부러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는 사람이 고운 길만 찾아 걷겠느냐 묻습니다. 그렇다고 또 거친 돌길만 찾아 걷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발길 닿는 대로 걷기로 합니다. 그것은 마치 내 일상을 들여다보는 렌즈 같았습니다. 사람이 신발을 신고 사는지 벗고 사는지 살짝 묘해졌습니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그 물음과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고요했을 것입니다. 불편이나 고통은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걷지도 않았을 테고, 걷지 않는다면 신발은 무슨 소용일까 싶었습니다. 잘 걸어보려고 세상에 왔고, 더 잘 걸으라고 신발도 신었는데 오히려 걸어야 할 길은 짧아졌고 짧아진 거리마저 또 흥정을 합니다. 다른 것은 깎지 않아도 걸어야 할 것을 반으로, 싹둑 잘도 자릅니다. 시원하게 깎아버립니다. 그런데 신은 벗지 않습니다. 이제 신발은 신발이 아니라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모양내기 일색입니다.

우리의 아저씨, 위대한 영혼, 간디 아저씨도 신발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고등학생들 영어 교재 지문에 자주 등장하는 한 토막입니다.

¶ 간디가 여행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막 기차에 올랐을 때 그의 신발 한 짝을 기차 밖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기차는 움직였고, 그 순간 간디는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떨어진 신발 가까이에 던졌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간디는 대답한다. 나한테는 이제 쓸모가 없는 신발이지만 누군가 그것을 주어서 신을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니겠느냐.

그 간디 아저씨가 ´철학 없는 정치´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거라고 내내 부탁하고 걱정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낡은 슬리퍼를 신고 다녔던 간디 아저씨는 물레를 돌렸습니다. 세상을 돌리고 삶을 돌렸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아저씨의 물레 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발등이 당기다가 서서히 한 발짝 내딛기가 힘들어지면서 가져간 물 두 통으로 발을 씻었습니다. 10km를 그렇게 걸었습니다. 발을 정성스럽게 닦고 신발을 신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걷는 것인지 뛰는 것인지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신발이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알고 산다면 기분 나쁠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이래저래 재미난 창조물입니다. 혼자서도 잘 놀고 있습니다.

아참, 내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지 다 잊었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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