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시의,

by 강물처럼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 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사람들이 읽지 않는 그의 시에 스토리를 담는다.

광주리만 무거워지고 들여다 볼 사연 없는 스토리를 담는 일도 지난하다.

새벽을 이처럼 덧없이 보내는 일이 경범죄 정도는 맞먹을 것이다. 입안이 텁텁한 것이 똑 그렇다.

30년 전 장정일이 소년이었을 때 그를 만났던 8월의 더운 대구가 여기 있다.

1988년 8월 하루를 적어놓고 그는 죽었고 장정일 소년은 나이를 먹었고 나는 여전히 그들을 모른다.

시라도 써놓고 나면 아는 체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요원하기만 하다.

수줍은 생각이 어젯밤 안개처럼 희부윰하니 번지는 것도 반갑지 않다.

그냥 우리는 모르는 사이로 이 세상을 살아가자.


<푸른 체크무늬 와이셔츠를 입은 짧은 머리의 소년, 우리는 가까운 호프로 가서 한잔하였고 내가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줄 그는 금방 눈치챘다. 그는 자신은 직업으로 시를 쓰고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서울서 봤을 때는 말이 없었는데 대구라 그런지 말을 많이 하였고 발랄했다. 그는 내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장정일은 책은 지문 묻을까 봐 손을 씻은 뒤 읽으며, 초판만 읽지 재판은 읽지 않으며, 책에는 볼펜 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한번 본 시들은 모두 외우다시피 한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 내 고통의 윤곽을 조금 말해주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만 마시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기형도 1988년 8월 2일 화요일,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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