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보는 날
일요일 오후, 작년 수능 문제를 풀고 정답까지 확인한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가만히 앞에 서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살폈다. 이제 이렇게 앉아 있는 모습도 더 없구나. 무성 영화 같았다. 소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대신 아이들의 동작이며 표정이 하나씩 선명해졌다. 저렇게 웃었구나. 너는 수줍구나. 그래, 그 장난도 예쁜 구석이 있다. 한꺼번에 세 문제를 동그랗게 그리면서 통쾌해하는 너는 여전히 유쾌하다. 너희는 사이가 좋구나. 정말 걱정이 없는 사람들 같다. 5분이나 됐을까, 짧은 순간 동안 아이들이 마치 화소가 다른 필름처럼 제각각 내 인상에 담겼다.
시간은 끄트머리에 와서 늘 이렇게 사람을 무방비로 만든다.
10분만 이야기할게 ···. 그래 놓고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을 두 번쯤 삼켰을까. 그 사이 안구가 습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오래, 잘 지냈다.
헤어지는 거 알지?
그 말에 모두 일순 눈동자가 나에게 멈췄다.
여전히 꼰대 같은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두 가지를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여기 머물지 않을 거라고도 미리 일렀다. 하지만 언젠가 어렴풋이 생각날지도 모른다고.
한자를 종종 써가며 영어 수업을 했다. 순전히 국어 공부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었다. 혹시 모른다며 그날도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水適穿石, 이제는 묻지 않고 먼저 읽어준다. 수적천석,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야. 저기에 숨은 글자들이 있는데 세상은 그렇게 숨어 있는 것들을 '보물'이라고 부른다며 다시 적었다. 작은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바위도 뚫는다.
그리고 보이냐고 물었다. 끊임없이, 노력하면이 보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하고 말했다.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며 그 뜻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따라 할 수가 없으니까 포기하는 게 좋다고 알려줬다. 대신 사람은 습관을 만들 수 있다며, 무엇이든 습관이 들면 그렇지 않냐고 했다.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가 끄덕이고 농구를 좋아하는 아이도 그렇다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들이라고 당부했다. 앞으로 더 중요한 시간들이 속속 도착할 테니까, 부디 좋은 습관을 이어가라고 부탁했다.
또 하나는 부처님 말씀이었다.
생선을 싼 종이는 비린내가 나고 꽃다발을 싼 종이는 꽃향기가 나는 법이야. 자기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한 번씩 살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느 길을 걷고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자기를 알아보는 방법을 하나쯤 가졌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내일이면 수능 시험을 본다. 오늘 저녁에는 아이들이 1년 전에 써놓았던 편지를 아이들 앞으로 각각 보내 줄 것이다. 장난처럼 썼던 말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늘 밤을 보낼 것이다. 아이들이 내일이 지나고 그다음 날이 지나서도 여전히 잘 지내기를 바란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던데 인연은 끝나고서도 끝나지 않는다. 나는 이 게임을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