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er
루돌프 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만일 내가 봤다면 불붙는다 했겠지. 크리스마스 캐럴이 좀 울렸으면 싶은 12월이다. 주하나 강이 또래의 아이들을 데리고 1980년대 거리를 한 시간쯤 거닌다면 과연 어떤 표정 지을까. 신기한 거 말고, 낯설다는 그 느낌 이전에 커튼처럼 먼저 걷히는 그것은 무엇을 머금은 표정일까.
잘 시작하는 시작이 있다. 무슨 일이든 그런 시작이 있다. 잘 어울리고 매끄럽고 편안하면서도 중요한, 그야말로 '첫인상'이 되는 순간이 있다. 활짝 웃는 모습은 언제나 주위를 환하게 만든다. 활짝 피어날 것을 예감하게 하는 찰나를 어쩌면 좋냐. 표정보다 먼저 바람처럼 스치는, 감도는 첫인상의 첫인상을 우리는 수많은 전생으로부터 배워온 것은 아니었을까. 결코 손가락 사이로 쏟아지지 않고 두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도 놓칠 일이 없는, 말없이 전하는 말이 있다.
독립 부정사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다음에 어떤 말이 내게 건네질지 벌써 다 알 것 같아서 더 두근거리고 더 차분해진다. 나도 저만한 때, 쓰면서 외웠던 표현들을 주하도 강이도 배우고 있다. 자기들이 이슬반 꼬맹이였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을 들고 찾아갔던 산타가 나였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아이들이다. 이 표현들은 꼭 외우고 있어야 해. 삭 싹싹, 노트 위로 펜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좋다. 해가 저무는 곳에서 들려오는 트럼펫 소리처럼 평화롭기 그지없다.
To be sure, She is very charming. '확실히' 그녀는 매우 매력적이다. To be frank with you, He is not sick. '솔직히 말하면' 그는 아프지 않아. He is, so to speak, a walking dictionary. 그는 '말하자면' 걸어 다니는 사전이야. Needless to say, You should finish the homework today. '말할 것도 없이' 너는 오늘 그 숙제를 끝내야 한다.
다른 아이들도 바쁘게 손이 움직인다. 문득 궁금해졌다. 책에는 설상가상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중현이에게 맨 먼저 물었다. 유난히 눈이 커지고 동그랗다. 윗입술을 두 번쯤 안으로 당기는 것도 보인다. 사실상? 그러면서 갸우뚱,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보경이는? ······ 무엇인가 말할 것 같으면서도 배시시 웃기만 한다. 잠시 기다리는 중에 아이들 한 사람씩 눈을 맞춘다. 눈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 뭐냐고 내게 되묻고 있다.
'내가 잘난 체하는 시간'이다며 화이트보드에 쓴다. 우선 이 글자! 雨.
이 글자는 뭐지? 분위기가 한번 저쪽으로 기울어지면 자신 없어진다. 아는 것도 머뭇거린다. 이게 비야. 비! 하늘에서 내리는 것들은 이 글자에서 시작해. 구름은 雲, 눈은 雪, 이슬은 露, 번개는 雷, 서리는 霜.
주하는 '아~ 이거 알았는데', 단골손님처럼 그 말이 늘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조금만 거기에서 더 나아갔으면 하는데 매번 그 주변에서만 맴을 돌고 있다. 효묵이는 하던 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찬민이는 '엎친 데 덮친' 그러면서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눈이 내린 그 위에 雪上, 서리까지 내리면 加霜. 위험하겠어 안 하겠어? 그것을 to make matters worse라고 한다는 거야. 그러면서 matter를 찾아보게 했다.
matter - 명사 1. 문제(일) 2. 상황, 사태, 사정 3. 물질(물건/성분)
동사 1. 중요하다. 문제 되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Black lives matter.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장이라며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사고를 이야기했다.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그때 유행했던 사회적 슬로건을 소개했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본능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이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서 필요했던 언어가 어느 순간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아이들이 영어 공부를 많이 하고 있지만 정작 언어를 내팽개치고 있는 현실이다. 저 아까운 것을 버리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대충 말하고 아무렇게나 말할 때, 우리의 언어는 초라해진다. 초라한 언어는 아무리 번쩍거리는 영어를 입었다고 해도 금방 실체가 드러나고 만다. 거기에다 한자는 어렵고 따분하다고 한쪽으로 밀어놓고 방치한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지만 우리말을 그만큼 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영어든 우리말이든 어렵기는 매한가지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경우도 많다. 태양과 달은 서로 마주치지 않지만 하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둘 다 있어야 한다. 그처럼 언어는 상보적이다. 완벽한 것은 없다. 영어를 배우면서 그리고 국어를 배우면서 영어 안에 국어가 있고 국어 안에 영어가 있다는 시각을 키우지 못하면 언어는 어렵기만 할 것이다. 귀찮고 성가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