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도 쓰는
전날은 강풍 경보가 사람을 깨우더니 이번에는 강풍 주의보가 울렸다. 중산간 도로 일부를 말하는 것 같이 몇몇 도로의 통제를 알리는 안전 문자가 전달됐다. 윗세 오름에서 넘어져 다친 왼쪽 정강이에 시커멓게 멍이 졌다. 아픈 줄 모르고 산을 내려왔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다가 그제야 알아차리고 물이 닿지 않게 조심했다. 휴일이라 문을 연 약국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았고, 무엇보다 허리 때문에 눕고 싶었다. 그렇게 새해 첫날은 저물었다. 따로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디뎌봤다. 정강이보다 오히려 발목이 시큰했다. 대신 정강이 걱정은 덜었다. 발목이야, 높은 산에 다녀오면 다들 이 정도 고생을 하기 마련이다. 어리목을 내려오던 시간들이 잠시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눈에서 잠이 싹 달아났다. 불을 켜고 창가에 섰다. 날씨 점을 쳐야 한다. 어떻게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 차가운 공기를 방안에 들이고 싶었다. 창밖 마당에 두 그루 은행나무가 서있다. 오른쪽에 넉넉하게 보이는 것이 분명 암나무다. 은행나무 두 그루의 빈 가지가 버드나무줄기처럼 낭창거린다. 그게 바로 강풍 경보였다. 어디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 큰 누나, 큰 형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는 듯하다.
2일은 그 바람 덕분에 뜻밖의 장소를 찾았다. 우당 도서관 제2열람실에 앉아서 3시간 동안 내가 한 것은 한 페이지가 될까 싶은 글이었다. 눈발이 바람에 날리는 풍경 앞에서 떠오르는 것이 그거였다니, 재미있는 인생이다. 명암이란 제목으로 시작했다. - 아무도 모를 텐데, 나는 천성적으로 스포일러다. 나쯔메소세키의 미완성작을 그 순간 떠올렸던 것이다. - 12월 31일 오후부터 1월 5일 아침까지, 그러니까 내가 제주에 머무는 시간 동안을 소설로 - 허구의 세계로 - 미끄러져 들어가 보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불꽃이 튀었을까. 사람은 보이지 않고 부싯돌을 맞부딪히는 소리는 울린다. 딱딱! 차고 맑다. 도서관은 이렇게 놀이터가 되어야 마땅한 곳이다.
강풍 주의보가 사람을 붙잡기도 하고 등을 떠밀기도 한다. 아마 강풍 경보 없이 강풍 주의보를 먼저 만났다면, 날 궂었다며 걷지 않았겠지. 어디 따뜻한 곳을 찾아 거기 머물며 시간을 보내며 그것을 여행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SNS 같은 데 사진 한 장 걸어두고 망중한(忙中閑)을, 아니 한중난(寒中暖)을 은근히 뻐겼을지도 모른다. 무슨 난초나 되는 양 길게 턱을 뽑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서관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한가했다. 이제 버스 노선이 하나둘 머릿속에 들어온다. 325번만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370번, 312번을 타도 되고 신제주 R이라고 쓰여 있으면 어떤 번호든지 여기에 내린다. 지선과 간선을 구분해서 버스를 기다리면 제주는 한결 쉬워진다.
여행 에세이를 꼭 소설처럼 구성하는 고약한 취미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내다 버릴 만큼 거슬리거나 냄새나는 것도 아니라서 ··· 손가락질하는 사람 없으면 당분간 품에 품고서 가보자. 나 하나로 이 땅의 자유와 진리가 흔들린다면 그 자유와 진리는 서둘러서 바꿔야 한다. 더 위대해져야 한다. 깐족거리는 것도 사족(蛇足)이다.
애월읍에 있는 광령 초등학교 앞을 도로 건너편에 오렌지와 파도를 연상시키는 주홍과 파랑이 나풀거린다. 바람이 언제나 잠잠해질지, 그것은 허무맹랑한 바람인 줄도 알면서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했다. 오늘 하루 잘 부탁한다. 멀리 있는 것들을 잘 보려고 아예 안경을 쓰고 길을 나섰다. 그 선택은 주효했다. 저 휘날리는 리본과 화살표를 곳곳에서 찾아내느라 애를 먹었을 것이다. 고생했다는 말을 애먹었다고 쓰는 우리네 정서가 소설처럼 쓰는 에세이 같아서 마음에 든다. 매 순간 찾아내고 있다. 해찰이 심한 줄은 알고 있지만 19, 5km나 되는 길을 가려면 서둘러야 된다.
올레길 17코스를 걷기로 한 것은 우선 도청 근처에 마련한 숙소에서 멀지 않기 때문이다. 스무 개가 넘는 올레길을 다 걸으면 제주도를 한 바퀴 걷게 된다. 25년 5월에 우리가 성산 일대를 걸었던 것이 아직 생생하다. 그때 남동쪽 해안이었다면 북서쪽에 해당하는 코스를 지금 걷는 것이다. 혼자 걸을 때, 도심에 가까운 17, 18코스를 '걸어 놓고자' 했다. 아무래도 더 복잡하고 시끄러울 거 같아서 그런 것인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올래는 어디나 좋다. 17코스에서는 비행기를 참 많이 본다. 멀리서 날아오는 모습도 근사하지만 바로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의 아랫배를 보고 있으면 혹등고래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 같다. 고래가 난다. 하늘이 바다 같아서 재미있다. 비행기가 기다리지 않아도 자꾸 날아오는 것이 17코스를 걷는 동안에 누리는 즐거움 중에 하나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어디까지 갈까, 북쪽으로 가는 것은 서울로 가고 바다 옆, 서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는 중국 대륙에 가겠지?
올레길 17코스 초반은 광령리 일대를 두루 걷게 된다. 서귀포 정방폭포에서 봤던 '먼나무'가 어느 집 마당에 아름드리 정원수로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이한테 물어보면 또 모른다고 그럴 텐데, 이게 '뭔 나무'냐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른 계곡이 나온다. 한라산 윗세 오름에서 시작하는 물줄기가 이 계곡을 지나 25km나 흘러 외도 앞바다에 닿는다고 한다. 근심을 다 씻어낸다는 무수천(無愁川)이다. 물이 흐르는 계절에는 그만한 동행이 없을 것이다. 무수천 주변 경관은 또 하나의 풍경이라서 걸음이 절로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