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알아봤다
무수천은 길어서 좋다. 그 계곡에서 하이킹을 즐긴다고 한다. 무수천변을 걷다 보니까 마치 땅이 흐를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전에는 저기로 용암이 흘렀을 것이다. 흐르다가 저 모습으로 굳었을 것이다. 바다로 흘렀던 산을 상상했다. 그래, 영광은 한라산에게! 한껏 낮은 자세로 한라산을 떠받치는 무수천이다. 한라산이 두고두고 높은 까닭은 이렇듯 낮은 모습으로 산을 떠받치는 무수천 때문이구나. 여기가 한라산의 기둥이었다. 간밤에 불었던 거센 바람도 무수천에서는 나지막이 사운대고 나는 노래가 듣고 싶어진다. 길에서는 음악이 술이다. 그 술에 서걱거리는 바람 한 점이 입에 맞는다. 시간은 세월은 너의 얼굴에 쓰여 있다*고 노래하는 이브디떼이 Yves Duteil의 욕심 없는 목소리가 살살 감겼다. 취중에 꽁꽁 묶인 줄도 모르는 나, 나 ··· 강그네다.
단 한 사람이 알아봤다. 막 중학교에 들어가는 꼬마 손님이 첫눈에 알아보는 것이 신기했다. 성(性)이 강이고, 이름이 물처럼 이예요? 그러는 것이 깜찍했다. 다들 강물 띄고 처럼 그러는데, 알아보는구나! 재미로 사용했던 이름이었다. 필명이냐고도 묻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 글을 적을 때 쓰는 아이디 같은 것이다. 강물처럼 지음. 앞으로도 걷는 이야기를 책으로 낼 때는 계속 저 이름이 세상에 나가기로 한다. 이름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짓는다. 이름을 많이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름이 없었으면 한다. 아주 흔해지면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없으니까. 그 많은 돌에 누가 이름 붙이던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내게로 와서 꽃이 되는 꽃은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이름 없어도 꽃은 꽃이다. 의미 없이도 너는 너다. 무심천에 바람이 흐른다. 그 바람을 뽀드득 소리 나게 닦아 한 번 베어 물고 너에게 준다. 이름이여, 맛있는 바람이다. 아사삭 소리마저 예쁘다. 무수천이 나에게서 너에게로 흐른다. 강물처럼 흐른다.
걷자, 이름이고 구름이고 무슨 상관이냐. 걸으러 여기 왔으면서 시답잖게 말이 많다. 입 말고 발로 쓰자고 다짐을 한다. 걸으면서 쓰자고 새로 마음을 먹는 그 사람이 어쩐지 좋아진다. 걷는 기능을 향상시켜 쓰는 기능까지 장착하면,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처럼 '백만 불짜리 다리'를 갖는 것은 아닐까. 초원이 다리는? 백만 불짜리 다리! 우리도 ···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그게 뭐라고,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외도동이다. 거기 아파트 단지도 있고 축구장이며 체육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도 한 달 살아보고 싶고 저기서도 살아보고 싶고, 제주는 사람을 꼬신다. 지도 앱을 보면서 17코스를 공부했다. 외도 선착장 지나서 이호테우 해수욕장, 거기 서 있는 말등대를 찾아봤다. 앞으로 만나게 될 풍경들, 말등대 지나서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또 걸어갈 기운이 났다. 사실 1월 1일에 윗세 오름에 다녀오고 그다음 날부터 뱃속이 좋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원인을 찾아도 따로 의심 갈 만한 것이 없다. 평소보다 더 주의해서 식단을 골랐다. 자극적인 것, 낯선 것, 날 것은 참았다. 제주에 와서 해산물은 그림자도 못 봤다. 그런데도 이틀째 설사다. 허기는 지는데 밥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몸은 필요 이상으로 정직해서 미열로 저를 드러낸다. 어지럽고 메슥거렸다. 왜 이러지? 방금 전까지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던 자신이 순식간에 초라해지는 것이 한 편의 연극 같아서 헛웃음이 난다. 나는 연기를 참 잘해. 지금부터는 기운 없는 연기를 하면서 걸어가자. 실연당한 남자처럼 바다를 바라보고, 내일이 회사를 그만두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고개도 들어 하늘을 본다. 그러면서도 '이호테우'는 무슨 뜻인지 궁금해한다. 이호? Hijo de la luna*의 그 Hijo? 그 순간에도 농담이 나를 건드렸다. 농담이 나오면 거기가 막다른 골목은 아니다. 샛길이 반드시 나온다. 큰길로 이어지는 작은 길이, 숨통을 트여주는 길이 나오기 마련이다. 샛길로 빠지는 묘미, 그것이 농담이다. 내 농담(弄談)에는 정말 농담(濃淡)이 들어있기를 바란다. 짙은 것은 깊은 바다보다 더 짙고 맑은 것은 설악산의 옹달샘만큼 맑았으면 한다. 내게 거리낌 없이 농담을 거는 나도 오랜만이었다.
거기 이름이 원래 이호였단다. 테우는 통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 같은 것으로 그것을 타고 고기도 낚고 미역을 채취하러 다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호에서는 테우가 목숨 같았을 것이다. 마을과 뗏목이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겨울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태 서프보드를 만져본 적도 없는데 이번 여름에는 저것을 붙잡고 뒹굴어 봐야겠다. 입으로 코로 물을 먹더라도 한 번은 파도에 올라타고 싶다. 생각지도 않았던 생각에 사람이 들뜬다. 벌써 파도를 타는 기분이다. 그렇게 파도를 타는 사람들을 오래 바라봤다. 파도가 밀려드는 해변을 걸을 수 있어서 좋았던 새해 첫 토요일이었다. 멀리 말 두 마리가 서 있다. 저것이 말등대구나. 빨갛고 하얀 말이 나란히 마을을 보고 서 있다. 올해 병오년, 붉은 말의 해를 이 언덕에서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하늘도 신화 속의 하늘, 저 말은 트로이의 목마, 바다는 지중해, 이 모든 것들 앞에서 태연할 수가 없었다. 받아쓰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받아 적고 싶었다.
* Le Temps S'ecrit Sur Ton Visage - Yves Duteil
* 스페인 밴드 Mecano의 노래, Hijo de la Luna 달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