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17코스 세 번째 이야기

사랑도 그러할 것이다

by 강물처럼


제주 올레길 17코스 : 광령초 - 관덕정 3

올레길은 21개 코스가 기본 노선이다. 지리산 둘레길하고 똑같다. 그 밖에 제주도 인근의 섬, 우도 · 가파도 · 추자도에도 6개의 길이 더 있다. 제주 올레길은 27첩 반상이다. 임금님 수라상에 찬이 스무 가지 정도 올랐다는데 이쯤 되면 진수성찬이다. 아무리 맛있어도 먹지 못하면 그만인 것을 지난 10년 동안 배우고 있다. 새해 첫날 한라산에 가는 택시 안에서도 그랬다.

"어? 신자세요?"

하늘이 어두웠고 바람이 세찼다. 오후부터는 눈이 내릴 거라고 했다. 처음 오르는 한라산이라 살짝 긴장이 됐다.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얼마나 눈이 내릴까. 그때 나는 어디쯤일까. 그런 생각들로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라산을 달리는 도로, 1100 도로를 굽이굽이 달리던 중에 갑자기 전면에 햇살이 들었다. 기사님이,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이마에 손을 대고 성호를 긋는다. 이번 제주행에 나 모르게 동행한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을 그때도 눈치채지 못했다. 자꾸 반복되는 그것이 꼼지락거렸던 순간이다. 우연이 나를 돕고 있다.

기사님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가볍게 웃어 보였다. 나도 왼손을 들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운전대에 걸린 작은 묵주가 보였다. 종교가 없는 친구가 언젠가 밥을 먹다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너답지 않게 금반지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짓궂게 되물었다.

"나다운 것이 뭔데, 나는 금반지 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이거, 묵주 반지야. 멋지게 로사리오라고 그러지."

일부러 R 발음을 과장되게 굴리고 마지막 O는 길게 끌었다. 그제야 대충 알아차리는 눈치였다.

동작 하나로 택시 안이 달라졌다. 기사와 손님이었던 관계가 같은 신앙인으로 바뀌었다. 삽시간에 눈이 내리는 풍경처럼 그때부터 눈이 내렸다. 길이 아직 많이 남은 것이 반가웠던 시간이었다. 세례명이 마태오라고 그랬고 사위가 익산 사람이라고 그랬고 - 우연의 일치! 이 부분까지 저도 그래요! 그러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일 거 같아서 꾹 참았다. - 트로트 가수를 겸업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술술 꺼내셨다. 한옥마을과 전동 성당 이야기를 제주 한라산 길에서 듣고 있었다.

"그런데 왜 혼자 다니세요?"

나도 미소를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좀 길게 이야기해도 괜찮겠냐며 말을 꺼냈다.

뜻밖이라는 말은 사람을 한 번에 알아보는 '저울' 같다. 거기 올라서면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시간이 그 사람을 지나갔는지 그때 하늘은 어땠는지 표정으로 드러난다. 화가 유영국*의 작품 '산'처럼 자연과 추상이 패턴과 색채를 실컷 뽐내는 곳에서 느끼는 평면의 당혹스러움, 안도, 기회 같은 것들이 '뜻밖에'라는 문을 여는 것이다.

"그래서요?"

10년 전에 내게 일어난 일들을 시간 순서로 꺼냈다. 그때마다 기사님은 목소리가 높아졌고 같은 말로 되물었다. 그다음이 뭔지 서둘렀다. 걱정과 호기심이 반반씩 섞인 표정이었다.

" ··· 이렇게 오늘 걷고 있습니다."

처음 봤다고 그랬다. 나도 나 같은 사람, 수술하고 그동안 한 번 봤다고 대답했다. 여자분이었는데, 젊었고, 집에 있는 어린 딸 걱정을 많이 했었다고, 그런데 하늘나라 갔다고.

조심하라는 말과 관리 잘하니까 80까지도 거뜬할 거라며 차에서 내릴 때까지 거듭 반복하셨다. 새해 덕담을 이렇게 듣는다며 나도 기사님이 평온하시기를 바랐다.

길을 나서면, 길 위에 서면 나를 따라오는 그것을 믿는다. 그것이 우연인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그네에게는 행운이 필요하다.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이 아니라, 빛이 비치는 행운 말이다. 그래야 깊이 숨을 쉬고 다시 일어서서 가던 길을 가게 된다. 숨을 쉴 수 있는 만큼의 불안과 평화가 그의 행낭(行囊)에는 언제든 들어 있어야 한다.

말등대를 지나서 커피를 마실 만한 곳을 찾았다.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인다. 커피 파는 곳을 서너 군데 더 지나쳤다. 크고 화려한 곳들을 지나쳤다. 차가 많이 주차되어 있는 곳도 언덕 위에 전망 좋아 보이는 곳도 지나왔다. 중학생 강이가 좋아할 만한 카페에 들어섰다. 가게에 들어서기 전에 사진을 3장 찍었다. 회반죽을 칠한 벽이며 거기 칠한 페인트, 밖에서 보는 실내 그리고 작은 마당을 찍어서 강이에게 보냈다. 그 집에서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거기서도 바다가 잘 보였다.

혼자 걸을 때는 처음 두 시간을 걷고 10분을 쉰다. 세 시간째부터는 10분씩 더 쉬면서 걷는다. 그러니까 20분을 여유롭게 쉬면 된다. 내내 바다를 보고 걸었는데도 20분 동안 바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랑이 그러할 것이다.



* 유영국 ㅡ 한국의 대표적 추상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