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love can make a memory
제주에 스무 개가 넘는 올레길이 있는데 이번에 17, 18코스를 걷기로 한 이유는 단순하다. 서로의 일정이 맞지 않아 나 혼자 떠나온 제주여서 모든 것들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먹고 자는 것부터 움직이는 것까지 소소하게 대신 날짜가 다른 때보다 여유로우니까 느긋하기로 마음먹었다. 신제주 로터리 부근에 숙소를 정한 것은 제대로 얻어걸린 행운이었다. 5층 끝방을 얻은 것도 마음에 들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두 그루도 어느 순간부터 잘 잤냐고 인사를 전하는 사이가 됐다. 한때는 정원이었을 주차장도 사연 있어 보여서 좋았다. 허름한 정장을 차려입고 먼 길 나들이 다녀오는 초로의 신사가 엿보였다. 멀리 내다보이는 것도 좋았고 도가니탕을 파는 식당에 불이 밝은 것도 10초쯤 살펴볼 만했다. 그 방에서 5일을 그대로 머물렀다. 수행자처럼 아무 요구도 하지 않고 양말과 수건을 빨아 널어놓고 매일 머리카락과 먼지를 닦고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작은 탁자가 불편해서 이불을 바닥에 깔고 베개를 벽에 기대놓고 글을 썼다. 하루 세끼를 부지런히 챙겨 먹었다. 설사를 하면서 알았다. 안 먹던 것, 자극적인 것은 피했는데도 내 사정이 이렇다는 것은 ··· 10년이면 잘 지내온 것이다고. 집도 낡고 쇠로 된 기계들도 녹스는데 잘 버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집에서 먹고 지낼 수 있게 해주는 아내한테 고마움이 돋았다. 아무리 맛있고 소문난 식당이라도 나 같이 '속 없는 사람'은 힘들다. 한 끼를 먹어도 신호가 오는데 첫날 저녁부터 열 끼나 먹은 것이다. 제주를 떠나는 아침까지 네 끼를 더 먹어야 한다. 물론 잘 먹을 것이다. '이만큼이 어디냐' 그게 식탁에 앉은 내 마음이다. 그 마음을 꺼내놓고 밥 한 술 뜰 때마다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17, 18코스를 걷게 된 이유는 숙소에서 가까운 편에 속했고, 내 딴에는 다른 코스보다 더 번잡할 거라고 생각해서다. 도심을 지나는 길이라 차들이 다닐 것이고 그만큼 매연도 있을 거라서 비발디의 겨울을 듣기도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듣기에도 좋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우리가 함께 모든 길을 다 걸을 수 없다면 조금 복잡한 길은 내가 걸어두고 싶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이 두 코스마저 사람을 들었나 놓았다 개구진 것이 싫지 않다. 저 아이는 나를 좋아하는 줄 뻔히 알 수 있는 장난이 길가에 만연하다. 알록달록 코스모스다. 기운이 없으니까 힘이 들기도 했지만 지리산 둘레길을 다녀온 이력이 있어서 해변 도로는 사람을 도우면 도왔지, 이만큼도 못 가면 어디를 가겠냐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인생 선배다운 풍모가 느껴진다.
길 왼편에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의 둥그런 지붕이 보였다. 오늘은 어떤 배가 기다리고 있을까. 배를 타고 왔던 지난해 봄을 떠올리다가 문득 오른편에 있는 너른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공원 같은데 그러기에는 색감이 없이 회색 톤이다. 저 중앙에 탑인 듯 보이는 조형물도 있다. 저쪽에 안내 표지판 발견, 주정공장수용소 4·3 역사관 & 역사 공원.
- 일제 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제주 주정공장인 이곳은 제주 4·3사건 당시 최대 규모의 강제수용소로 이용되었다. 군경의 무차별 학살극을 피해 한라산 등지로 피난했던 주민들이 산에서 내려오자 이곳에 수용되었다. 수용자들은 혹독한 고문과 열약한 환경 때문에 죽기도 했다. 일부는 석방되었지만 대다수는 총살 당해 암매장 됐거나 바다에 던져져 희생되었다. - 안내 표지판을 읽고 숙연해졌다. 가까이 가서 본 조형물은 사람들이었다.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이 거대한 눈물 한 방울 앞에서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던 날의 표정 '그날의 슬픔'이었다.
5.18도 모르고 4·3도 모르는 나는 겨우 밑줄이나 긋기 위해서 잠시 멈춘다. 수집하듯 사람들의 슬픔이나 아픔을 모으고, 그뿐이다. 백 년도 안 된 이야기는 모르면서 조선이나 고려, 그보다 더 오래된 것들을 떠든다. 친구나 가족은 외면하면서 좌파다, 우파다 외친다. Only love can make a memory. 사랑만이 기억한다. 나나무수쿠리의 노래라도 따라 불러야 할까. 그래서 나는 '현기영'이 멋있다. 도저히 나는 못할 것을 했던 그가 부럽다. 그의 순이 삼촌이 없었다면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순이 삼촌」이 발표될 당시만 해도 4·3사건은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4·3사건과 관련해서는 피해자들의 어떠한 신세 한탄도 공개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나마 사람들은 제사나 굿마당에서 4·3사건을 이야기하고 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이렇게 구전되던 4·3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전환시킨 최초의 소설이 바로 「순이 삼촌」이다. 문학에서만이 아니라 공식화된 문헌으로서도 최초였다. - 창비, 현기영 중단편집, 순이 삼촌 337p. 해설.
제주에 오면서 그의 소설 한 권을 가방에 넣어 왔다. 「마지막 테우리」를 제주 어느 길모퉁이에서 펼칠까 궁리했었다. 우당 도서관에 찾아간 우연을 나는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그 책을 펴는 대신 소설을 썼다. 소설을 읽는 대신 창밖 눈 오는 풍경을 느끼면서 소설을 썼다. 한 페이지 되는 시작을 오래, 오후가 끝날 때까지 받아 적었다. 18코스에 다녀온 이야기를 쓰고 나면 우당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그 소설의 다음 페이지를 열어볼 것이다. 거기 흰 바탕이 하얗게 깜박거리고 있을 것이다. 잘 다녀왔냐며 먼저 물어볼지도 모른다.
30분 전에는 김만덕 박물관을 둘러봤는데 이번에는 역사관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에 추모의 방부터 걸었다. 사람들 이름이 화면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3,994명의 영혼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래고자 하는 공간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사진을 보고 그들이 가족들에게 보냈던 편지도 읽었다. 고통도 아우성도 슬픔도 느낄 수 없는 지금에서야 소금맛을 본 것처럼 혀끝에서 짠맛이 감돌았다. 밥은 먹었을까. 한라산에 숨어 지내면서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누구 편을 들었을까, 나라면 그때 어느 쪽이었을까. 세상은 슬픈 일이 너무도 많다···. "살아남은 우리는 이러한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강요배 화백의 그림 여백에 쓰여 있는 저 말에 정신이 들었다. 추모하는 마음이 가득해졌다. 바람이 불어서 좋았다. 역사관을 뒤로하고 사라봉 쪽으로 향했다. 146.5m 사라봉에 오른다. 사라봉(紗羅峯) 공원이었다.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는 비석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페인트는 벗겨지고 콘크리트 기단도 깨지고 낡았다. 한자로 쓴 글씨도 정겹다. 사라, 비단 같은 모래를 밟으면서 걸었다. 사라봉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어제 걸었던 길이 보였다. 도두봉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저렇게 멀었나 싶은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걸음만큼 놀랄 만한 것이 있을까. 사라봉 공원은 생각보다 넓었다. 금방 정상이 나오길래 작은 오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쭉 한동안 산길이다. 거기 오솔길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산책로인 듯했다. 일요일 오전이라 그랬는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