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죽란시사첩 序 / 정약용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나면 서지 西池에 연꽃 놀이 삼아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 큰 눈이 왔을 때 한 차례 모이고.
세밑에 분매 盆梅가 피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마시며 시를 읊조릴 수 있도록 한다. 나이 적은 사람부터 먼저 모임을 준비하여 한 차례 돌면 다시
그렇게 하되, 혹 아들을 본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승진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하고, 자제 중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으면 마련한다.
내가 연戀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게 여자이든 남자이든 상관하지 않고
약속은 입으로 하지 않고 붓으로 써서 정하리라.
정하는 것도 내 뜻대로 하지 않고
흐르는 것들에 맡겨두리라.
먼저 하늘의 구름에게 맡겨서 뜻의 靑함을 믿고
흐르는 시냇가에 가져다 비춰 그 맑은 淸함을 확인받아
네 마음은 어디에다 연서連書하여 둘까 궁리하며 좋아하리다.
바람 속에 감추어 둔 옥돌을 꺼내 매화꽃향에 하룻밤 묻혀 놓으리라.
내 약속은 세월이겠거니, 하고 쥐어주리라.
장부丈夫라면 푸른 구름이 되고 여인麗人이라면 버드나무 살이 되기를.
어디서든 우리 그리 쉬이 만나고서도 애틋하여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