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 정양

시의,

by 강물처럼

건망증 / 정양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

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도 미심쩍은 계단을

그냥 내려왔다 누구는

마스크 쓴 채 깜박 잊고

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

그런 축에 낄 위인도 못 된다

혼자 남은 주막에서

술값을 치르다가 다시 미심쩍다

창문을 닫은 기억이 없다

출입문 잠근 기억이 전혀 없다

전기코드도 꽂아둔 채

그냥 나온 것 같다

다들 가고 없지만 누구와도

헤어진 기억이 없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 일이냐

매일같이 닫고 잠그고 꽂고 뽑는 것이

보통 일이냐, 그래, 보통 일이다

헤어진 기억도 없이

보고 싶은 사람 오래오래

못 만나고 사는 것도 보통 일이다

망할 것들이 안 망하는 것쯤은

열어놓고 꽂아놓고 사는 것쯤은

얼마든지 보통 일이다

닫고잠그고가고보고싶고

다 보통 일이다 술기운만 믿고

그냥 집으로 간다 집에서도 다시

닫고잠그고뽑고마시고끄고그리고

깜박깜박 그대 보고 싶다



'헤어진 기억도 없이'

다른 부분은 다 닳아서 해져도 다시 고쳐쓸 수 있겠지만,

거기는 내가 무릎을 꿇고 배워야 한다.

헤지고 나서 남은 것 없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우두망찰,

그 마저도 건방져 보이는 망해야 할 기억들을 나는 지키고 있다.

그래서 다시 두 눈을 의심해 가며 손가락으로 짚고 말한다.

'헤어진 기억'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나는, 차라리 뽑고 잠그고 닫는다.


건망증이라는 작품에 그려진 그림은 '쓸쓸한'이라는 초상 肖像

그래서 다행스럽고 웃기도 하였지만

나는 따로 물어본다.

엔리오 모리코네를 선물한 여자는 헤어진 적이 없는지.

그저 없는 것인지, 더듬거리면 잘 익은 파김치 냄새가 목 깊은 데에서 나는 것 같다고 말해준다.

곧 '옛날'이 되어가겠지.

못 만나고 사는 일이 보통 일이 되었어도 출발 FM이라든지 토요일 저녁에는 로또를,

로또를 생각하다 보면 깜박깜박해지겠지.

이제 헤어진 기억도 없이 보고 싶어 하다가 날이 저무는 날도 가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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