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짜리 여행 7

부안 마실길 6코스,

by 강물처럼

맛있는 것과 덜 맛있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먼저 먹느냐?

경제학적으로는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편이 이익이다.

그 유명한 한계효용 체감이란 이론이 적용되는 영역이다. 특히 먹는 일에는 더욱 철저하게 적용된다.

이 하나만 봐도 나는 경제적으로 덜된 인간이다.

나는 좋은 것, 맛있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나중으로 남겨놓는다.

그러다가 잊거나 상하거나 계절마저 바뀌고 때로는 모두 돌아가고 나만 혼자 남은 것을 늦게 알아챈다.

자본주의를 배웠지만 성적이 좋지 않은, 그렇다고 혁명 같은 것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도 아닌 소심한 사람,

문제를 일으킬 일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학교를 마치는 그가 나다.

언제나 학교는 그렇게 마무리 짓고 싶다.



부안 마실길이라고 할까, 격포 마실길이라고 할까.

길을 걷는 도중에 보면 '서해랑길'이라는 푯말이 군데군데 달려있다.

찾아보니 부안 마실길을 포함해서 서해안을 전부 잇는 둘레길, 코리아 둘레길이 서해랑길이다.

그러니까 서해랑길이 하나의 구 區라고 한다면 마실길은 동 洞이 되는 것이다.

마실길 6코스를 2주 전에 우리 넷은 완성했다.

아직 어린 산이나 강이는 잘 모를 테지만 길이 사람 인생을 닮았다는 말에 걸으면 걸을수록 공감하게 된다.

5코스를 시작하면서 길이 내 마음 같지 않다고 투덜대던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6코스를 걸으면서 그랬던 나를 반성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절로 반성이 됐다.

좋은 것만 좋아하는 나는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가볍고 흔쾌히 깨우쳤다.

부안 마실길을 걷고 그 길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남기면서 매번 바다와 산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궁리한다.

그런 면에서 언어는 역시나 부족하고 연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걸음이 다 같았으면서 또 다 달랐던 것을 어떻게 글로 써낼 수 있겠는가.

나는 마실길을 걷는 내내 바닷바람이 하나도 질리지 않았다고 말하면 복사 複寫되는 쪽은 어느 것일까?

말일까, 마음일까. 걸음일까, 거리일까, 풍경일까, 세월일까. 나일까, 세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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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코스는 따로 이름을 지어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긴 거리를 걷지 못하는 날에는 여기를 걸어보는 편을 권한다.

소프라노 홍혜란이 부르는 '가을밤'을 듣고 있으면 밖에 있는 것들은 수고롭게 보이고 안에 있는 것들은 따스하게 다가서는 기분이 든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어쩐지 용서라도 하고 싶어 진다고 주책없이 읊조리는데 그 길이 그렇다.

사람의 감상을 돕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이 더 힘들어서 어쩔 줄 모르는 이에게 맑은 물 한 통을 건네고 그의 신발끈을 묶어주며 권하고 싶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걸어라 걸어라 너여, 시름 많은 너여, 걸어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을 향해 민들레 하얀 솜털 같은 바람을 날려 보낸다.

걸어간 만큼 살아오기로 약속하자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하자고 부탁도 당부도 격려도 다 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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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생을 하루 살았다는 느낌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시골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무슨 대수냐.

도로에 쌩쌩 달리는 차들을 구경한다.

우리는 우리끼리 튼튼하게 버스를 기다린다.

튼튼한 것들은 하늘이나 바람 같은 것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구경 삼아 일부러 둘러보는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사람을 키우는 것인가 싶다.

이쪽으로 오는 버스가 없을 텐데 기다리고 있구나 싶어 지나가던 택시 아저씨가 차를 돌려 오셨단다.

그렇다면 우리 차가 있는 데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지.

곰소 소금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받는다고 한소리 하시는 아저씨는 우리가 얼마나 멋진 길을 걷고 왔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곰소에서 고창 쪽으로 다리를 놓거나 땅을 메우는 일이 영 허튼 일은 아닐 거라는 말씀도 주워 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긴 길을 걸어보는 일은 지금뿐이겠다는 생각만 했다.

하긴 내가 오십이고 아이들이 열네 살, 열한 살인 것은 지금밖에 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6코스 소감을 어떻게 요리해낼지 망설이고 미뤘다.

어쩐지 10월이 다 지나가버리면 해안가 대나무 숲길에 불던 바람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조마했지만 서두르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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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11월에는 남은 7코스와 8코스를 이어 붙일 계획이다.

언제 시작했는지 잊었다.

여기까지 올 것을 생각하고 걸었던 것이 아니듯 삶이란 것은 사람의 생각보다 더 높거나 아니면 넓은 흐름이 아닐까.

그것은 시간도 아니고 어떤 바탕이 되는 공간, 운명이라고 하는 약속 같은 것도 아닌 커피 향 같은 방향 芳香 아닐까.

꽃향이라도 좋은 그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주머니에 넣을 것도 아니고 항아리에 담아질 것도 아니며 깊게 호흡하는 것만이 최선인 것이다.


마실길 마지막 코스는 향이 좋은 내음으로 온통 걸어봐야겠다.

취해봐야겠다.

사람 냄새에, 삶의 향기에, 길 끝에서 맡아지는 그것들을 흠뻑 다 들이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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