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밥상머리 21

누룽지 먹는 토요일 아침에,

by 강물처럼

기침만 나와도 눈치를 보게 된다.

날이 차가워지면서 공기는 건조해지고 나처럼 병을 핑계로 몸이 빠르게 늙어가는 쉰 살의 남자는 이 계절이 쉽지 않다.

몸에 따스한 기운이 없으니까 여름에도 손 하고 발이 시리다는 낙망한 푸념을 쏟았는데 11월쯤 되니까 그동안이 낙원이었구나 싶어 진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부디 더 잘하면서 살 것을 나는 간질거리며 끝이 갈리진 느낌을 전하는 내 기관지 어딘가를 두고 또 다짐을 한다.

나는 감기에 든 것은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조심한다고 하긴 하는데 솔직히 끝까지 나는 괜찮을 거라는 자신은 없다.

미리 걱정하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지만 지역 내 어디에서 확진자가 몇 명 나왔다는 메시지가 뜨는 일상은 우리가 얼마나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매일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마른기침이라도 나올 것 같으면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아침 식사로 누룽지를 먹던 중이었다.

누룽지는 느긋하다는 문장을 갖춘 수필이다고 생각하면 된다.

밥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배고프지 않고 또 언제든 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여유로울 때 차려내는 밥상이다.

먹는 것의 민주주의라고나 할까.

초라한 이라는 말보다 소박한 이라는 말이 어울리고 다른 날보다 토요일, 그것도 아침이 누룽지 먹기에는 최적이다.

11월에는 무 맛이 좋다.

아이들도 단맛이 난다고 할 정도로 무 김치는 맛이 깊어진다.

적당히 식은 누룽지 한 술에 알맞게 익은 무를 싹둑 베어 먹으면 입안이 상쾌해진다.

청량한 김칫국 냄새가 속을 환기시킨다.


"아빠, 아빠 괜찮아?"

나하고 30센티미터 거리에 예쁜 얼굴을 하고 밥을 먹는 강이가 물어본다.

나는 지금까지도 누가 괜찮아? 하고 물어오면 뜸을 들이고 만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싶은 내 엉뚱한 삶의 흔적들.

우리 엄마나 아빠는 그런 걸 물어보면서 살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끼리 - 4남매- 밥을 먹고 그릇을 치우고 반찬을 챙겨 넣고 그렇게 지냈던 거 아닐까.

아빠와 엄마는 돈을 벌었지, 밥을 먹지는 않았다.

아빠와 엄마는 밥도 돈을 버는 것처럼 먹었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가 먹었던 것은 밥이었을까.

하나가 꼬이니까 여러 가지 것들이 엉켜서 붙어 나오는 것 같다.

느긋한 토요일 아침이란 말이 내 어린 시절에는 없었다.


다시 오늘로 돌아가자.

아빠, 괜찮아? 하며 물어보는 장면이 계속된다.

나는 안 괜찮아,라고 말을 해보고 싶다.

한 번도 그렇게 말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 삭막하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서는 '괜찮아' 그러면서 또 그 끝을 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빠, 정말 신기하다."

나는 이런 부분이 고맙고 또 죄송스럽다.

무슨 말을 하든 우리 아이들은 앞에다가, '아빠'를 꺼내놓고 시작한다.

아빠, 이거 알아?

아빠, 오늘 학교에서 시험 봤어.

아빠,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어떤 때는 두 번씩 반복해서 부른다.

'아빠 아빠, 지금 프로야구해.'

나는 아빠라는 말을 꺼내놓고 말을 시작하는 법이 없었다.

아빠라는 말 생략하고 다음 말부터, 그래도 뜻은 통할 테니까.

아빠라고 부르지 않으면 어색할 것 같은 말은 그냥 하지 않거나 없던 것으로.

어디에서부터 나는 호칭을 잃어버린 것일까.

내가 잃어버린 것은 호칭이었을까, 아빠였을까.


"봐봐, 하느님이 많이 바쁘잖아?

내가 발 아픈 거 아빠도 알지?"

4학년 한 해를 학교에 거의 가지 못하고 보낸 강이다.

빨리 코로나 같은 것은 없어져야 한다.

저번에 오래 걷고 나서 그러는 건지 발목이 아프다고 그러던 강이다.

강이의 표정이 진지하다.

나도 그만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내가 내 기도 대신에 아빠 낫게 해달라고 어제 잠자기 전에 이쪽 방에서 기도했거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근데 오늘 아빠가 나았잖아!"

무슨 말을....


여기는 내 혼잣말이다.

저렇게 작고 예쁜 입에서 종알거리는 말이란 것은 사람에게 행복을 깨닫게 하는구나.

내 딸이 엄마가 되고 다시 할머니가 되는 것을 나는 어느 하늘에서라도 보고 있겠구나.

저 성스러운 표정을 어떻게 잊고 우주의 나이가 되어가겠는가.

두고두고 나는 이 아이의 아빠 아빠라는 부름을 견디어 내겠구나.

기도 속에서, 슬픔이나 시련 속에서, 또는 기쁨과 축복 속에서 내 이름은 불리어지겠다.


누룽지가 속을 편하게 다스려준다.

멸치 볶음을 하나씩 입에 넣어주면 심심하지 않게 좋다.

참고로 누룽지를 먹을 때는 계란 프라이보다 계란말이가 낫다.

이왕이면 계란찜이 더 어울리고.


아이에게 반찬도 먹어가면서 먹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같이 누룽지를 끓여 먹는 사이, 내가 봐도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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