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 /함민복

시의,

by 강물처럼

명함 / 함민복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다

경계의 명함은 군인이다

길의 명함은 이정표다

돌의 명함은 침묵이다

꽃의 명함은 향기다

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



먼저 명함을 내미는 사람들에게 얼굴은 웃으면서 걸음이 물러선다.

나와 나의 페르소나는 그 또는 그녀를 거부한다.

물러서고 말고는 내 남은 땅, 여지 餘地다.

명함이 있으면 나 또는 나를 대신하는 모든 것들이 편하겠지만 나중에나 파기로 한다.

한 번도 주인이 되어 본 적 없이 살.아.온. 나를 왜?

떠나고만 싶었지, 소속감 없이 소속되어 있던 날에 부끄럽던 기억들,

그 기억들이 앉았던 의자와 책상에 그림자가 희붐하였다.

아침이면 나는 인사를 하고 내 얼굴은 웃고 내 걸음은 물러났다.

내 이름이 풍경 風磬처럼 흔들렸어도 울지 않던 것이

바람 없는 속에서 비린내 나는 물고기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만나고 인사하고 다시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인사하고, 또

그래서 나는 명함을 준 나를, 그 또는 그녀를 잊기로 약속한다.

꼭꼭.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야 우리는 죽을 수 있을까.

이러다가 명함으로 수의 壽衣를 해 입어도 되겠다 싶었을 때

암에 걸려 뱃속을 헤집었다.

내 뱃속에서 나온 날 것 그대로의 명함들이 양동이에 둥둥 떠있었다고 한다.

나 떠난 자리에 늘 놓여있을 명함 같은 것들로 연락을 받은 적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죽고 그 또는 그녀가 건네준 명함에 그 또는 그녀가 금붕어처럼 뻐끔뻐끔 산소를 태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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