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짜리 여행 9

부안 격포 마실길 8코스의,

by 강물처럼

11월이 왔다.

그 길을 다 걷고 내가 마주친 것은 침묵이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하지 못하지만 웅연조대 앞 갯벌에 부는 바람이 청량했다.

언덕배기에는 파 냄새가 물씬했다.

바다를 잠시 돌아가는 샛길 옆으로 밭이 길게 펼쳐졌고 거기에는 배추가 바다를 이루었다.

곧 세상에 나가 소금에 절여질 배춧잎들 위로 갯벌에서 날아오는 짠내가 골고루 스며들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배추는 소금 맛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알아맞히겠다.

곰소항에서 시작하는 마실길 8코스는 줄포만 갯벌 생태 공원에서 끝이 난다.

버진 로드, 교회에 다니지는 않아도 결혼은 교회에서 하는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 virgin road를 떠올린다.

꽃 같은 신부가 걸어 나오는 길.

네가 가장 예뻤을 때 걷는 길 위에는 무엇이 놓여있어야 마땅할까.

어떤 길에서든 예쁘라고 축원하고픈 나는 웅연조대 앞에 서서 봄에 떠나간 사람을, 그 사람이 했던 이야기와 표정들을 천천히 살폈다.

사장님은 안녕하세요.

물음표로 찍지 않는 인사가 아무래도 맞겠다는 생각을 벌써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부터 써먹고 있다.

나를 떠난 사람들,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이 떠오르는 길을 나는 이름 짓지 않고 버진 로드처럼 걸어본다.

성스럽게, 행복해 본 적 없는 사람에게 행복을 전하고픈 심정으로, 내가 방해되지 않도록 걷는다.

나비가 내려앉았다가 날아갔을 배추밭과 파밭을 지나 마트 사장님이 서 있던 자리까지를 다른 사람처럼 걸었다.

그동안 걸어온 마실길이 그 순간 밝아졌다.

지금까지 어느 길을 걸어도 밟지 못했던 것을 밟고 섰다.

뜻이 명료해지는 말씀은 음 音을 타고 곡조가 되는 것을 그대는 알았던가.

사람의 일생도 그러하고 공룡 등 거죽 같이 울퉁불퉁하게 갈라져 소용돌이 닮은 큰 갯벌에 타고 있던 조가비와 수천수만 마리의 날아가는 새들이 내려앉는 활강 같은 것들이 11월의 노래를 짓고 있다.

바람이 물들이고 바람에 마르고 바람이 흩어가는 단풍들이 부르는 합창.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축축하게 11월 22일에 내리는 늦가을 빗소리 같은 것 말이다.


나는 거기에서 끝날 줄 모르고 걸었다.

겨우 8코스를 걷고 내가 이런 식으로 침묵할 줄 몰랐다.

2020년 봄볕에 새만금 방조제가 시작되는 마실길에 첫발을 떼고 우리는 세상을 구비구비 돌아다녔다.

지난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와 함께 머물던 그 생각들은 오늘 우리가 만난 생각들과 얼마만큼 닮아있는 것일까.

생각도 자랐고 그 사이 우리도 자랐다.

찾을 길 없어도 괜찮은 것은 유전자처럼 내가 알지 못해도 나로 남아서 나를 증명해줄 그런 부류의 친구들이니까.

그리운 우리의 옛날 생각들이다. 지나간 바람들이다.

강이는 계단에서 다친 다리가 아직 불편해서 집에 남기로 했다.

다음 주에는 김장을 해야 하고 그다음은 12월로 넘어가면 나도 그렇고 너희도 감기들 수 있어서 오늘이 적격이었다.

'오늘'

새삼 좋은 말이라는 실감이 든다.

살아있어서 바람결을 느끼는 것처럼 오늘이란 말 안에는 비상하는 날갯짓이 한창이다.

오늘 우리는 셋이서, 그리고 넷이서 걷는다.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처음 갖는 강이는 우리를 따라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며 그만큼 또 자랄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통해서 양분을 얻는 것이 가장 보기 좋은 순리 같은 것이니까.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공부를 오늘은 혼자서 해보겠구나.


8코스는 이정표 없이 동남쪽으로 걷는다.

곰소항은 시골 정취가 묻어나는 어시장이 있고 무엇이든 하나쯤 낚시로 건져 올릴 것 같은 바닷가다.

돌아오는 길에는 한창 맛이 오른 아귀를 몇 마리 사서 어머니에게도 드리고 장모님에게도 가져다 드렸다.

산이는 간장게장, 간장게장 노래를 불렀다.

전라도에는 맛집이 많다.

김동률의 목소리처럼 감미로운 간장게장이었다.

다음에 거기를 다시 들러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 지는 맛이었다.


12km 정도 되는 8코스였지만 무조건 갯벌을 따라 걸었던 탓에 더 돌아가야 했다.

나의 동행자들은 내가 길을 잘 찾는다고 그러지만 내가 아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오른쪽에 갯벌을 두고 계속 걸을 것.

묶어두었지만 덩치가 큰 개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다른 길로 가자고 재촉했다.

아, 그전에 우리는 수만 마리 철새들의 군무를 구경했구나.

아빠는 논두렁에서 멀리 히치콕의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나무 한 그루를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찍고 있었다.

우연이란 얼마나 사람을 설레게 하는지.

새떼가 나무를 향해 날아오는 장면 같았다.

그 모습 하나로 오늘 내가 얻어야 할 모든 것이 충족된 기분이었다.

거기서부터 벌써 나는 다 내려놓고 즐기기로 했었던 거 같아.

금방 차 버리는 곳간을 가진 나는 부자인가, 영 가난뱅이인가 모르겠구나.

덩치 큰 개도 지나고 물이 다 빠진 염전도 지나고 양식장에서 활어를 쏟아담는 사람들도 지났다.

마실길 전체를 걸으면서 우리는 몇 번이나 길을 잃었을까.

길을 알려주는 팻말이 부실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처럼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지금은 뜸한 것을 알겠더라.

우리는 이번에도 길을 두 번 돌아 나왔구나.

별거 아니지만 산이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 돌아 나오는 용기를 즐겨라.'

그것을 억울해하거나 피곤해하지 말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너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

빠르게 가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는 아니니까 속도를 견지하는 것.

주변을 잃지 않고 챙겨보는 사람에게는 삶이 풍요롭다는 것을 잘 받아들였으면 한다.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또 하나의 깊은 클래식 같았다.

내가 누굴 알아서 그에 알맞은 비유를 하겠냐만은 바흐든 브람스든 나는 좋아하기로 한다.

삶이 이렇게 나그네 같다면 어디든 가보고 싶어 진다.

반가운 얼굴이 하루 동안 우리를 기다렸다.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는 또 어록을 많이도 남겼구나.

아빠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길을 걸은 것만으로도 벅차서 얼마쯤 시간이 지나야 우리가 웃고 떠들면서 했던 말들이 떠오르겠구나.

다 같이 마실길을 무사히 걸어온 날들을 축하했다.

건배가 건배 같아서 좋더구나.

아, 강이는 7코스 혼자 김밥을 먹던 장소가 특히 좋았다고 그랬다.

나는 거기가 어딘지 안다.

그리고 그때 강이가 무엇 때문인가 살짝 토라졌던 것도 안다.

풍경이란 이렇듯 설익은 감정일랑 날려 보내고 진짜 알짜배기만 남겨서 우리를 키운다.

너희는 잘 걷고 잘 자란다.

아빠나 엄마는 그것이 많이 고마울 뿐이다.

자꾸 기도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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