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목욕탕

영화의,

by 강물처럼

아이들이 행복해한다.

애들 엄마하고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거실에 모여서 불 다 끄고 이불 깔아 놓고 뭐 먹으면서 영화 보는 것이 좋은가 보다고.

게다가 난로도 켜놓으니까 분위기가 더 사는 것 같다고.

그 말을 못 했다.

사실은 나도 좋다고.


왜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오랜만에 보게 됐는지 잠시 생각해봤다.

거의 석 달만이다.

'늑대 아이'를 재미있게 보고 한 여름밤의 꿈을 꿨던 것이 지난 8월 말의 일이다.

그 사이에 바닷가 언덕이 나오는 잔잔한 영화를 한 편 봤었다.

강릉 어딘가를 배경으로 했던 그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규모가 작았던 영화였고 스토리 중심의 얼개에서 벗어난 느낌이 좋았지만 조용하기까지 해서 금방 잊힌 듯하다.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었는데 내가 나이를 먹은 탓에 쉽게 희미해지는 것들이 많다.

행복 목욕탕도 어서 적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초조함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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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목욕탕.

영화 몇 편을 두고 나는 이 제목을 골랐다.

알다시피 우리의 연령대는 11살에서 쉰 살, 사실 공공연한 비밀인데 애들 엄마는 나보다 더 어른님이시다. ㅋ

40년 세월을 사이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편하고, 무리 없이, 재미있으면서 감동까지 받는 영화라니.

내 생각에도 그것은 욕심 같아서 얼마쯤은 내 기대를 접고 영화를 고른다.

나 혼자 보는 영화라면 주제와 장르, 19세 이하, 이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넷이 보는 영화는 신경 써야 한다.

특히 일본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건을 전개시키는 버릇이 있으니까 더욱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마치 딸아이의 남자 친구를 고르듯이 말이다.


영화를 다 보고 강이가 물었다.

"근데 왜 행복 목욕탕이지?"

"목욕탕이 행복 목욕탕이잖아!"

산이가 먼저 대답을 했는데 그 말은 중의적으로 해석된다.

한동안 문을 열지 않았던 목욕탕 이름이 '행복 목욕탕'이었다.

사람들은 이름을 잘 짓고 싶어 한다.

내 이름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름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진지해진다.

이름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길 소망하는 것이다.

이름처럼 살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나이 쉰쯤 되니까 알 것 같다.

그래서 이름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의 이름은 산이와 강이다.

어떤 느낌이 드는지는 묻고 싶지 않다.

각각의 느낌 그대로 조금씩 묻어나는 색들을 좋아한다.

영화, 행복 목욕탕은 이름을 완성시켜 가는 에피소드를 그리는 영화다.

하나의 이름을 완성시켜 가는 여러 사람들 이야기,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눈물이 흐르게 만든다.

왜 '완성'이란 말이 위압적으로 보일 때가 있고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끄트머리에 서 있다는 느낌이 확 다가올 때가 있잖은가.

수고하는 것이 다 보이는 시절을 함께 살아낸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봉사 같은 것 아닐까.

순수한 이기 利己가 적극적으로 이타 利他가 되어 보며 완성시키는 삶이라는 삶 말이다.

행복이란 말이 세상에 피어날 꽃이라고 한다면 그런 생태 환경에서 자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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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리에를 그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얼마나 영화에 잘 녹아들었는지 나도 그녀를 '엄마'라고 한번 불러보고 싶을 정도였다.

홋카이도 최북단을 목표로 설정해 주며 응원하던 그녀를 보면서 아, 부럽다, 청년!

나도 좀 저렇게 안기고 싶어라.

서른셋이었을 것이다.

오호츠크 바다를 건너다보면서 커다란 얼음 조각이 떠내려 오는 것을 바람 속에서 보고 싶었다.

한겨울의 홋카이도 끝에 서보고 싶었던 오래된 옛날.

우연히 그 시절이 생각나게 했던 장면이 개인적으로 행복했다.

나도 완성시키고 싶었던 이름들이 있었다는 감각을 돋워 준 것에 또 한 번 감사.


훌쩍이는 소리가 박자도 맞춰가면서 앞에서 훌쩍, 뒤에서 훌쩍이고 있다.

작은 훌쩍임은 딸아이 것이고 큰 것은 애들 엄마 것이다.

그 와중에도 아들 산이는 어디가 얼마만큼 슬픈 것인지 따지려 한다.

아마 산이에게는 영화도 영화지만 엄마나 여동생이 흘리던 눈물이 오랫동안 촉촉하게 기억될 것이다.

사람의 감정을 가늠할 줄 아는 것도 실력이라고 포장하는 쓸쓸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갖고 놀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 게임밖에 없는 현실이 사막 같아서 따로 할 말도 없다.

사막에 비가 내리면 그대로 행복한 장면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들 사이에 그런 비가 내렸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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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미, 엄마도 아즈미하고 똑같아.'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딸이 마침내 교복도 다 뺏기고 더 이상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됐을 때,

엄마는 얼마나 힘들까.

더구나 몇 개월 살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아즈미가 교실에서 보여줬던 그 장면 하나에 엔도 슈사쿠의 무거운 '침묵'을 벗어던질 수 있겠다는 반가움이 있었다.

자기희생 없이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없다.

제대로 된 희생은 더 많은 것을 얻는 계기가 된다.

내가 희생하는 것만큼 내 건강도 좋아질 수 있는 것처럼 아즈미는 자기희생으로 자기를 지키는 힘을 회복한다.

행복 목욕탕에 흐르는 메시지는 건강하고 탄탄하다.

행복하려면 이쯤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쿡쿡 찌르면서 물어온다.

'엄마'

엄마가 있어야 행복할 것 같은데 엄마가 세상을 떠나면서 행복을 완성시키는 스토리는 하나의 종교를 닮았다.

목욕탕에서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 처음에는 뜻밖이었는데 하루쯤 지나서 생각하니 끄덕여진다.

십자가 같은 곳이 목욕탕이었으며 십자가의 완성은 뒤에 남은 우리들, 목욕탕은 식구들에게 남겨진다.

어딘가 상처가 숨겨져 있는 사람들끼리 상처 없는 하나의 역할 - 목욕탕 영업 - 을 해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각자 자신들의 이름을 찾아낼 것이다.

반가워하고 아파하고 또 고마워하면서 내내 행복해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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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때문에 속상한 사람이나 그런 자신이 미운 사람에게 추천한다.

또 행복해 본 기억이 너무 오래됐거나 그래 본 기억조차 없는 느낌의 느낌을 입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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