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

시의,

by 강물처럼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 손택수


멀리 여행을 갈 처지도 못 되고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 생을 함께 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에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고 있는 거라

나무 그늘 이리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 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이맘때가 되면 달맞이꽃이 곳곳에 노랗다.

곧 백중 百中이다.

음력 7월 보름 백중에는 농사짓느라 수고한 머슴을 하루 쉬게 하고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아귀 餓鬼 지옥에서 고통받는 어머니의 구원을 아들 목건련 目犍連이 부처님에게 청원하던 날이기도 하다.

날이 뜨겁게 지글거리는 속에서 반듯하게 맑은 노란 잎들이 풍성하다.

아픈 사람들이 저를 보고 지날 때 달맞이꽃은 활짝 달아오른다.

살포시.


부처가 되기 위해 수없이 윤회를 거듭하며 수행하는 보살들처럼 달맞이 노란 꽃들이 길가에 산다.

돌무더기 같은 세월은 누구를 위해 힘껏 여름을 응시하고 무엇을 그 꽃대에 담았는가.

지나면 잊고 지나가면서 잊히는 것들,

속 깊은 아픔이었어도 낫기만 한다면 그 통증이 내린 뿌리까지 다 없었던 일로 그러기로.

향기라도 멀리 날아가 산까치가 입에 물고서 우는 날이 있으면 좋겠다.

둥근달이 뜨는 여름밤은 나만 아는 그 향기로 오래오래 늙고 싶다.

꽃이 피기 전에는 반드시 눈보라는 짙고 쓸쓸한 기운이 해 저문 줄도 모르고 머물 것이다.

그때에도 저 혼자서 아픈 배를 붙잡고 달맞이 가자.

기껏해야 나 같은 것을 맞으러 애써서 노랗게 노랗게 웃고 있겠다는 뜻에,

섧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닻 / 함민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