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습니다.
주말을 이용해 고창에 다녀올 계획으로 간단하게 짐을 챙겼습니다.
몇 가지 면역 치료제를 맞고 조용히 쉬었다가 오는 것입니다.
안정기라는 말을 쓰는 것조차 건방져 보이면 어쩌나 싶어 다른 말로 대신할 것이 없을까 두리번거렸습니다.
피로감이라든지 다른 통증이나 불편함이 많이 차분한 상태입니다.
그렇더라도 불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까 조심하는 차원에서 고창에 다니고 있습니다.
시간이 허락하고 주변 여건이 갖춰져야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니까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군다나 아무도 없는 주말 병실은 쓸쓸함도 맞춤형으로 준비된 분위기입니다.
고즈넉이란 말을 좋아하는 편인데 내게 잘 맞춰진 드라마 세트장에 짐을 푸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일상을 여행이라고 말하면서 그 안에서 꽃을 보거나 꽃씨를 심거나 오늘처럼 물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게 이르는 섬세한 직선들, 그 끝에 볼펜 심처럼 동그란 머리로 내리는 빗방울 하나하나에도 인사를 건넬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쓰던 날의 동주를 닮은 눈빛과 애정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과 떨어지는 것들, 그리고 피어나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싶어 집니다.
여기에 오면 나는 착해지고 시인이 되어 버립니다.
산이와 강이가 토요일 아침 달콤한 늦잠을 마다하고 일어나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넵니다.
아들은 아들답게 나에게 웃음을, 딸은 딸처럼 운전 조심하라며 당부합니다.
삶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눈빛들이 아른거리는 차 앞유리를 응시하면서 고창에 왔습니다.
익숙한 베드와 거기 깔아놓을 이불과 베개. 그리고 내가 가져온 슬리퍼와 여벌 옷, 수건을 꺼내놓습니다.
체온과 혈압과 맥박을 재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면 일종의 기분 좋은 체념을 맛봅니다.
환자와 일반인을 구분하는 병원 특유의 알코올이나 소독약 냄새가 내 몸 안팎으로 다 발라졌다 싶을 때 찾아오는 편안함.
자리에 눕습니다.
풀처럼 누워서 미지수와 기지수를 떠올립니다.
살아있음과 이 베드에서 세상을 떠난 어떤 이들의 이름을 천장에 써놓고 접선의 기울기 같은 말들이 지나가는 풍경을 관찰합니다.
그러다가 생에서 죽음으로 중심축을 옮겨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키토시이케루모노. 生きとし生けるもの,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라고도 써봅니다.
어떻게든 살아라, 그 말이 나를 삼킵니다.
'통증이 심해져서 1인실로 옮겼어요.'
방금 전에 들었던 소식에 나는 금방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나이가 되고 맙니다. 다시 미워져 돌아갈, 그러다가 그리워지기도 할 것처럼 나는 가만히 누워서 암 癌을 조용히 만져 봅니다.
'잘 있나. 잘 지내고 있나.'
사람들에게는 물어도 나에게는 묻지 못하고 살아온 말에 이번에도 물음표를 달지 않습니다.
마트 사장님은 어디에 계실까.
비도 오는데 댁에서 아들들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까, 서울 병원에라도 다니러 가셨을까.
부질없는 호기심이란 말, 참 쓸쓸한 말입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던 날이 다 저물고 겨울 내내 눈 한 번 내리지 않았는데 눈 소식이 날립니다.
빗소리 그치면 그리고 혹시 눈 내리는 소리가 잠결에라도 나를 깨우면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흘렀던 바이올린을 켜야겠습니다.
한밤중이래도 그래 봐야겠습니다.
나는 혼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