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이 순간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무엇이 가장 슬플까.
그 질문은 너무 무겁고 거창하지만 대답은 쉽고도 간단합니다.
'딸'
우리 딸입니다.
내가 왜 아빠를 좋아하는 줄 아느냐며 옆에 와서 묻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오빠는 무조건 엄마를 좋아하니까 나도 엄마를 좋아하면 아빠 혼자 남으면 슬프니까 나를 좋아한답니다.
그러니까 좋아해 준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빠를 생각이 많게 만들고 딸은 여러 감정에 휩싸이게 합니다.
사랑스러운 것이 자꾸 커지다가 애틋해지기도 하고 살갑고 곱고 예쁘고 그러면서도 마음에 북받치는 다사다난한 감이 있습니다.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한 시간 겨우 쓰던 일이 두 시간 가까이 앉아있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딘가 싶어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고 나면 손이 붓고 배가 아프거나 뱃속이 힘들 때에는 금방 풀이 죽습니다.
일종의 한계점 같은 것을 시시때때로 자각하면서 갖게 되는 자기 방어 기제 같은 것들이 생겨납니다.
크게 좋아하지 않으며 크게 실망하지도 않는 상태를 스스로 꾸며놓고 사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없어졌고 사소하게 연락하는 친구들도 드물어졌습니다.
고립을 일부러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적절하기만 하다면 고요한 편이 낫습니다.
음악이란 것이 사람들에게 받았던 위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전보다 훨씬 음악을 찾아서 듣고 가만히 켜놓고도 잘 지냅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대신에 사람들에게 '기도'를 보냅니다.
아침마다 성경구절을 적어놓고 내 나름의 묵상을 하며 거기에 어울리겠다 싶은 에세이를 적어서 보냅니다.
멀리 프라하에 있는 친구나 프랑스 파리에 사는 친구 부부에게도 날아갑니다.
백 명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약속한 '약속'을 잘 지켜가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입을 헹구고 자리에 앉아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기도라고 생각하면 은근히 멋스럽기도 합니다.
다행히 나는 나에게 힘이 되는 것들을 찾아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서 그것이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것이 큰 힘입니다.
아직 어린 아들과 딸이지만 아이들에게서 얻는 에너지는 어떤 암 치료제보다 월등합니다.
달콤하고 부작용도 없으면서 웃음이 나는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기꺼이 아이들과 나의 바탕이 되어주는 아내에게는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고마운 것을 갚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배경이 되어주고 바탕이 되어 풍경을 돋보이게 하는 존재들에게 우리 애들 엄마를 소개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모든 것이 톱니바퀴 구르듯이 돌아야 하나의 인생이 무난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내 하루가 하늘에서 툭 떨어져 내린 수고로울 것 하나 없는 그저 그런 날이 아니고 이렇듯 애쓰면서 서로 다잡아 주며 만들어낸 하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화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지내는 인연들이라도 그들에게서 내가 여전히 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생각난다는 것만 해도 그래서 보고 싶다는 것만 해도 그것이 어딥니까.
그런 힘으로 먹고 자고 쓰는 것입니다.
딸아이가 70 80 노래에 맞춰 춤을 춥니다.
오랜만에 듣는 옛날 노래에 애들 엄마도 흥겨워하며 설거지를 하는 저녁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설거지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 딸아이와 함께 막춤을 추었습니다.
제법 리듬을 타니까 재미있습니다.
어디 가서 절대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제일로 편하게 드러내 보이는 공간이 집이고, 그런 집에 함께 사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나쁜 버릇 중에 하나가 좋을 때, 많이 좋을 때 슬픈 생각 하나가 실을 풀어낸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내가 놓여있는 처지라는 것도 얼마간 그 마음 줄에 작용을 미치기도 합니다.
한층 밝아진 모습으로 엄마와 아빠 사이를 오가며 마무리 서비스로 엉덩이 춤을 추는 딸아이가 예쁩니다.
그 예쁜 것이 애잔한 것입니다.
"강이야"
딸에게 지어준 이름이 나는 정말 마음에 듭니다.
'강이야'하고 불러 놓고는 나를 쳐다보는 그 눈동자가 생글생글해서 다시 또 행복하다고 그 순간 슬쩍 고백합니다.
1초, 1초가 너랑 사랑하는 순간이어서 고맙다.
할 말을 잊고 있는 틈에 딸아이가 선수를 칩니다.
"아빠, 첫 키스나 첫사랑은 누구야?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착한 사람이야."
눈치를 못 채고 그게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제 느낌에 '엄마'는 아닌 것 같았는지 눈이 커지면서 힘을 줍니다.
"그게 누구야?"
"9살짜리야."
웃음이 나나 봅니다.
피식거립니다.
기분이 좋아진 딸을 앞에 앉혀놓고 나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입니다.
"강이야, 나중에 나중에 아빠가 하늘나라 가더라도 울지 마."
아빠는 강이가 안 울고 재밌게 잘 지냈으면 좋겠어."
녀석이 입을 삐쭉거리며 입은 웃으면서도 벌써 눈이 울려고 분위기를 잡습니다.
"백 살까지 산다고 그랬잖아!"
"그렇지, 백 살까지 살 거야. 그러니까 그다음에 말이야."
행복은 머무르지 않습니다.
금방 일어나서 또 떠납니다.
슬픔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떠날 것입니다.
앉았다가 일어서면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야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가만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음악이 한 바퀴 다 돌았다.
새벽이 한창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