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거짓말 같아 21

모녀 母女

by 강물처럼


면역 치료를 받으러 고창에 들렀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은 누구나 주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면역력 저하'입니다.

예전에는 의료 시스템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암을 조기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발견되는 암은 수술하기도 어렵고 항암이나 방사선 치료도 후유증이 큽니다.


지금은 많은 지표에서 암환자들의 사망률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사람들이 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매년 건강검진을 통해서 일찍 암을 찾아내어 치료에 임하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동시에 의료 수준도 향상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첨단 의료기기의 혜택도 누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20년 전에는 사망에 이르렀던 것이 지금은 치료 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불과 20년의 차이로 생사生死는 다른 경로를 지나는 것입니다.


한편 그만큼 암환자들의 숫자도 늘었다는 통계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환경을 탓할 수도 있지만 '검사'를 받는 횟수 자체가 옛날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상태가 악화되어 환자가 병원을 찾는 패턴에서 건강검진으로 암환자를 먼저 찾아내는 방식으로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앞으로 의료 환경은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어쩌면 암으로 진행될 가능성 있는 상태를 미리 집어내는 시도가 이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오늘날처럼 우울한 치료를 몇 년 동안 이어갈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면역치료 또한 그러한 과정을 지나왔습니다. 개념 자체가 낯설었기에 수술을 받고 각자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자가치료를 해왔던 것이 바뀌었습니다. 재발과 전이는 암환자에게 치명적이다는 사실이 적극적인 사후관리를 받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면역치료입니다.


서울에서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환자 여덟 분을 만났습니다.

내 손가락에 끼어있는 묵주반지를 보고 고창에도 성당이 있냐고 물어보시던 분 덕분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네 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네 분은 나보다 젊었습니다.

어떻게 여덟 분들이 다들 친하게 지내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곧 의문이 풀렸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병원 주변 산책에 나서고 싶어 하기에 가이드를 자청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환자들끼리는 금방 친밀감이 형성됩니다.

섬끼리 서 있는 바다 풍경이 보기 좋듯이 암환자는 암환자를 서로 편하게 여깁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긍정과 동정은 더 얹어주는 고깃국 같이 푸짐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을 식기 전에 어서 먹으라고 내어주는 마음 닮았습니다.


예순다섯 되셨다는 어머니 한 분이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이런 데가 다 있었다며 서울에 있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며 귀여운 투정이십니다.

한 발 떼고 좋다, 한 발 떼고 좋다 그러십니다.

대숲에 소슬바람이 불어주는 길에서 바라보는 초가을 저녁달이라니.

하늘은 비 온 뒤여서 맑게 푸르게 어두워지면서도 여운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나이 젊은 네 명은 자기들끼리 사진을 찍느라고 뒤쳐졌습니다.

상쾌했던지 여자들 웃음소리가 멀리서도 기분 좋게 들려왔습니다.

다들 좋아하니까 저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웃으면서 지금을 잘 지나가세요, 라며 혼자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나는 그게 그렇게 싫더구먼..."

앞장서서 걷던 예순 다섯 어머니가 말을 꺼내십니다.

당신은 유방암에 걸렸고 마흔 갓 넘은 자기 딸은 대장암에 걸렸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러십니다.


"처음엔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억울하고 화도 나고...

그런데 딸까지 그랬다니까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야."

옆에서 같이 걷던 다른 환자분이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닐 텐데 혀끝을 끌끌 차면서 걷습니다.


"저기 뒤에 지금 저기 검정 옷 입고 오는 애가 내 딸이여."


지난여름에 개인적으로 집에 아이들 엄마가 아픈 바람에 크게 당황했던 나는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난감했었는데....'


어머니 상심이 얼마나 컸겠냐고 묻지도 못했습니다.

지금도 진행 중인데...

어떤 말을 한들 저 어머니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어머니,

여기 그네에 잠시 앉았다 가시게요.

아침마다 산책을 하면서 마지막에 꼭 들렀다 가는 그네로 안내했습니다.


멀리 샛별이 깨끗하게 빛나고 있는 하늘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할 말을 못 찾고 하늘만 보고 있는데 '사진'을 찍어 달라십니다.

웃음이 나왔습니다.

예쁘게 찍어달라며 어머니 두 분이 손을 맞대고 하트를 그립니다.


슬픔을 달래는 방법을 누가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곧 오십이 되는데 누가 물어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이런 풍경 앞에서 그네를 타고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슬픈 이야기가 자꾸 만들어지는 날에는 그렇게라도 있어야지 그래야 겨우 진정이 될 것 같은...


아니, 그것도 참 많이 슬플 것 같습니다.


이전 20화가끔 거짓말 같아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