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여름날 태풍이 불듯이 새벽바람이 거셉니다.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탐스럽게 핀 봄꽃들이 아침이면 모두 떨어져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꽃피고 나서 비가 일찍 찾아왔고 바람도 차가웠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벚꽃, 사쿠라를 흠모했습니다.
자신들의 삶이 벚꽃 닮기를 바랐습니다.
화려하게 피어나고 순식간에 흩날리며 사라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을 정신으로 삼았습니다.
어제 함라산에 올랐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아침시간을 이용해서 산책을 다닙니다.
나는 그 시간이 무척 좋습니다.
한 번은 요전에 말했던 '버스 운전수 아저씨'와 다니면서 그의 일본어 공부를 돕습니다.
"자, 지금부터 일본어로만 이야기하세요."
그는 이제 주저하지도 쑥스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어려워하는 기색은 있지만 굳이 피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일부러 내가 모를만한 것들을 준비해서 묻곤 합니다.
재미있습니다.
내가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하면 그는 즐거워합니다.
나름 세상이 공평하게도 느껴지나 봅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 결국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겁니다.
나머지 한 번은 가능한 혼자 찾아갑니다.
혼자 가는 날에는 주로 음악을 들으면서 갑니다.
음악은 문외한이지만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 음악프로를 10년 넘게 듣고 있나 봅니다.
유일하게 듣는 라디오 방송이면서 오래 듣고 있기도 합니다.
누구든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싶으면 그 방송을 추천합니다.
"연인을 잃고 난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겨울을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보내면서 이 음악들로 겨우 그 터널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동안 이 음악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지.... 고마운 마음에 사연을 보냅니다."
진행자의 목소리로 읽는 사연에서 그 사연의 주인공이 떠올랐습니다.
그랬었구나...
정말 힘들었겠구나...
잘했네.
정말 잘 됐네.
이런 식의 작은 공감과 감상을 하면서 산길을 걷는 겁니다.
무척 좋겠지요?
네..
좋은 시간입니다.
사소하지만 소소해서 좋습니다.
심심하지만 조용해서 좋습니다.
한가하지만 나만 할 수 있는 거라서 좋습니다.
사연의 주인공이 신청한 곡, Panis Angelicus를 호젓한 봄 산책길에서 듣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제목처럼 '천사 같은' 그런 기분에 취합니다.
걸음걸음이 산길이 아니라 비단길을 걷는 듯합니다.
내 삶이 이렇게 좋아도 괜찮은 건가요? 하고 확인하고 싶을 만큼 황홀경에 빠집니다.
우습지 않나요?
과장도 저런 과장이 다 있나 싶지요?
그런데 그게 다 사실입니다.
많이 목이 말랐던 사람은 물이 뭔지 알거든요.
'물맛'이란 것이 어떻다는 것을 그는 알 수밖에 없거든요.
몸이 많이 상한 사람은 '공기 맛'을 잘 압니다.
깨끗한 공기 속에 있으면 누구나 상쾌해지잖아요.
상쾌한 기분에서 저절로 유쾌한 속으로 옮겨가고 그러다가 문득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잖아요.
저는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한히 고마움을 갖습니다.
세상에는 불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짐이 되고 일이 되어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버스 운전수'아저씨와 함께 오르던 날에 마침 앞서가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불편한 다리로 언덕길을 쉬어가며 오르셨습니다.
"저, 괜찮으시면 이 스틱 빌려드릴까요?"
함라산은 따로 스틱이 필요 없는 산입니다.
습관적으로 손에 쥐고 산을 올랐던 터라 그렇게 말을 건넬 수 있었습니다.
괜찮다며 고마워하셨습니다.
정상까지 갈 생각도 아니고 요 앞에 정자까지만 갈 거라며 사양하셨습니다.
만약 내가 걷지 못했다면 아마 우울해서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20kg이 내 몸에서 빠져나갔습니다.
부러우시죠?
한 달 반 만에 절대로 빠지지 않을 것 같았던 몸무게가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가벼워지면 정말 가벼워질 줄 알았습니다.
산을 뛰어서 오르지 않을까? 마라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힘겨움 속에서도 제법 희망적인 상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10분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일단 배가 아팠지만 무엇보다도 기력이 없었습니다.
실감이 났습니다.
웃을 일이 아니구나....
근육이 없으면 몸이 굳습니다.
유연하지 않다는 겁니다.
허리를 굽혀 손이 땅에 닿지 않습니다.
가벼워졌는데 그만큼 딱딱해졌습니다.
'걷기'마저 안 하면 사는 게 영 재미없을 것 같았습니다.
여름이었기에 새벽 시간에 일어나 병원 주차장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한 바퀴 돌고 쉬고, 한 바퀴 돌고 쉬고.
그때 달맞이꽃에게 말을 자주 걸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그래 봤습니다.
'너는 생각보다 이뻤구나.'
'몰랐다.'
그런 거지요. 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거!
땅에서 멀어지면서 사람은 공허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쓸쓸해지고 외로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밥값'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밥은 돈을 내야만 하지만 땅은 돈 내라는 말도 없습니다.
'밥값'하느라 고생하는 그대에게 '땅기운' 담뿍 담아서 한 그릇 건네고 싶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