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에

교육의,

by 강물처럼

열흘이나 지나서 돌아다보는 장면은 어떻게 보이는가.

과거라는 시간이나 장면은 가능한 최상급으로 구성되는 속성을 가진다.

현재가 기획하는 미래, 현재가 비평하는 과거.

역시 비평은 따끔하되 따뜻한 편이 도움이 된다.

상대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작이야말로 자기 생명을 가지고 사는 개체에게 기대되는 최고의 역량 아닐까.

구분될 듯 되지 않는 그 연속되는 컷들을 신비라고 부르지 않고서는 배겨 낼 재량이 없다.

시간은 미스터리 하지만 속물적이지 않고 오래전 서울을 찍은 사진이면서 그 사진으로 내가 걸어 들어가는 현상을 실현해 보이는 근사한 실험가답다.

열흘 전 산이와 강이는 들떴었다.

자기들 생일도 아니고 엄마하고 아빠가 14년 전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마치 시간처럼 믿는 표정들이었다.

너희는 시간을 어떻게 믿느냐?

그랬구나, 아빠가 결혼을 했었구나.

아빠는 아빠의 시간이 두려움이 연기처럼 날아가버린 드라이아이스 같은 인상이다.

그것은 동화책 속에 나오는 호랑이나 여우 할멈 같아서 절대 놀랄 일이 없는데도 은근히 재미있는 장면을 기대하게 만드는 주인공들이다.

내 시간은 너희와 함께 존재했으며 우리의 자양분으로 승화되는 기쁨이었다.

열매였으며, 흔적도 없이 여기에서 먼 우주로 날아가고 있는 꿈이다. 빛이 찾아오는 길에 서로 마주치며 인사하는 꿈이다. 미지 未知로의 비행을 그치지 않고 영원히 흘러가는 에너지의 충만한 웃음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 웃음소리들이 내 시간의 연료가 되어 오랫동안 꿈을 그린다.

지난 열흘뿐만 아니라 14년 전에 엄마와 아빠가 결혼을 하고 산이와 강이가 차례차례 세상에 나와서 지었던 모든 꽃들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시간과 춤을 추고 있다.

그것은 무도곡이나 왈츠가 되어도 좋고 성당의 성가처럼 고요하고 깊고 아취가 있어서 만물에 깃든 영혼이 지긋이 눈을 감고 기도하는 노래다.

우리의 시간에 밀레의 저녁종이 울리며 하루를 감사하는 순간이다.



그때 열흘 지난 오늘은 어떤 그림이었을까.

10년 전 오늘은 어떻게 그려볼 그림이었으며 어떻게 현상될 사진이었던지 그대는 아시는가.

20년 전 오늘은 슬픈 날이었다.

30년 전 오늘은 슬픈 날이었다.

무엇을 하든 그 안에 내가 없는 날은 슬픈 날이다.

웃어봐도 울어봐도 소리쳐봐도 허물어지지 않고 투명해지지 않는 나는 시간과 맞붙어 산산조각이라도 나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은 경험이 없는 미숙아다. 현실과 허공을 구분하지 못하고 뛰어내리기 하는 14살 중학생.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살피는 일 같아서, 내가 충만해지는 연습이다.

기저귀를 갈고 아이를 업고 그 아이가 걷고 학교에 가며 인사하는 날들 하루하루가 가교 架橋가 되어 14살이었던 내가 쉰 살이 될 수 있게 했던 초침 秒針과 분침 分針, 그리고 많은 가르침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슬픔에서 나를 구원한 시간들,

나는 너희를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열흘 전에 , 1월 14일에 산이는 춤을 추고 강이는 글을 써서 우리를 축하했다.

엄마는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오십 넘은 엄마가 열한 살 강이를 안아줬다.

'엄마가 엄마여서 좋아요.'

둘 사이에서 꽃바구니에 달린 리본이 살짝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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